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12:22:47

W. O. 벤틀리


{{{#!wiki style="margin: -8px;"<tablealign=center><tablebgcolor=#4c4c4c><tablebordercolor=#4c4c4c> 파일:자동차 명예의 전당 로고.jpg 1995년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자
}}}
W. O. 벤틀리
MBE
파일:W O Bentley_Profile.jpg
<colbgcolor=#4c4c4c><colcolor=white> 성명 월터 오언 벤틀리
Walter Owen Bentley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888년 9월 16일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런던, 햄스테드
사망 1971년 3월 19일 (향년 82세)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서리, 워킹
직업 항공기 및 자동차 엔진 엔지니어, 기업인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4c4c4c><colcolor=white> 학력 <colbgcolor=#fff,#1f2023>클리프턴 칼리지[1]
킹스 칼리지 런던
상훈 대영제국 훈장 5등급 (MBE)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 (1995년)
배우자 리오니 고어 (1914년 결혼 / 1919년 사별)
오드리 허친슨 (1920년 결혼 / 1931년 이혼)
마거릿 로버츠 허튼 (1934년 결혼)
}}}}}}}}} ||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영국 출신의 엔지니어이자 벤틀리 설립자. 영국의 대표적 명문대 킹스 칼리지 런던 출신이기도 하다. 자동차와 항공기의 엔진을 제작했으며, 젊었을땐 레이싱에 직접 출전하기도 했다.

2. 생애

파일:월터 오언 벤틀리_(1921).jpg
▲ 1921년경의 W. O. 벤틀리
W. O. 벤틀리는 1888년 9월 16일 런던 햄스테드에서 태어난 벤틀리는 부모의 아홉 자녀 중 막내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은퇴한 사업가 알프레드 벤틀리이다. 부유한 가정의 아들로 그는 1902년부터 1905년까지 브리스톨의 클리프턴 칼리지에서 사교육을 받았고 16세에 당시 4-4-2 애틀란틱 증기기관차(Atlantic Locomotive) 디자이너로 유명한 헨리 이바트(Henry Ivatt) 밑에서 일하기 위해 영국철도청에 입사했다. 당시만 해도 기관차의 지지자였던 벤틀리는 자동차는 사람들에게 진흙탕물이나 튀기는 쓸모없는 도구라고 하찮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보다 오토바이크와 자동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어 1909년 5마력 렉스(Rex) 오토바이크를 몰았고 1910년 그의 첫 차인 중고 라일리 V 트윈(Riley V-twin)을 구입했다.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이론 공학(Theoretical Engineering)을 전공한 후 국립자동차택시회사(National Motor Cab Co.)에서 잠시 근무했다. 허나 곧 프랑스의 DFP라는 차를 수입, 판매하던 동생 호레이스(Horace Milner Bentley)와 동업을 시작함으로써 자동차 산업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생과의 동업 이후 DFP의 엔진 피스톤을 88% 알루미늄, 12% 구리로 보다 가볍게 교체하여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2L 엔진으로 144.3km/h라는 굉장한 속도를 내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알루미늄 피스톤 기술을 이용해 전쟁 중 군에 복무하며 항공기 엔진 개발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나고 1919년 벤틀리모터스(Bentley Motors Ltd.)를 세우고 자동차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벤틀리는 만든 첫 차를 내놓기에 앞서 시험용 차부터 만들었다. 첫 번째 시험용 차인 EXP 1은 시험주행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두 번째 시험용 차인 EXP 2를 1919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올림피아 모터쇼에서 공개했다. 당시 전시된 차는 차체 없이 섀시와 동력계 및 구동계만 갖춘 롤링 섀시였다. EXP 2는 1920년대 초반 엔진으로는 높은 기술 수준과 성능을 고루 갖추고 있었고 변속기는 4단 수동이었고 시속 129km의 최고 속도를 내기에 충분했다. 시험용 차를 바탕으로 생산된 벤틀리의 첫 차는 엔진 배기량인 3리터(3-liter)가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1921년 9월에 완성된 첫 양산 벤틀리 3리터 롤링 섀시의 값은 1919년 올림피아 모터쇼에 공개했을 때 제시했던 750파운드보다 크게 올라 1,100파운드가 되었다. 모든 모델은 런던 북부 크리클우드(Cricklewood) 공장에서 롤링 섀시 형태로 출고되었다. 차체는 주로 세단과 오픈 카로 만들어졌는데 특히 오픈 카의 인기가 높았다. 시험용 EXP 2부터 1921년에 열린 여러 경주에 출전해 우승을 거뒀고 1924년과 1927년에는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우승했다. 3리터는 레드와 블루, 그린 라벨 등의 버전으로 발전하며 1927년까지 생산되었고 1,620대 이상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첫 모델 3리터(3-liter)를 선보인 이후에도 계속 수공 생산에 따라 자금 사정은 좋지 않아서 결국 1925년 백만장자 스포츠맨이었던 울프 바나토(Woolf Barnato)가 회장으로서 경영권을 갖기에 이르렀고 회사의 경영자가 바뀐 이후 동생 호레이스 벤틀리는 회사를 떠났다. 울프 바나토의 자금 수혈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후반부터 경제공황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고 급기야 바나토도 1931년 자금 공급을 중단했다. 같은 해 완전히 자금이 끊긴 벤틀리를 롤스로이스가 인수하였고 월터는 롤스로이스의 고용인이 되어 일했지만 자동차 디자인과는 상관없는 일들이었고 이에 불만이었던 그는 1935년 회사를 그만두고 라곤다로 옮긴다.

라곤다에서 V12 엔진과 2리터 DOHC 엔진 개발에 관여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회사를 그만두었다. 자동차 산업에서 은퇴한 그는 벤틀리 드라이버 클럽같은 소모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와 같이 항공기 엔진 개발에 집중했다. 벤틀리는 로터리 타입의 에어로 엔진을 통해 연합군에 기동성을 보장했다. 연합군의 승리하고 특히 제공권 확보에 큰 기여를 한 벤틀리는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는 이를 인정받아 대영제국의 훈장 중 하나인 MBE(Member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를 수여받기도 했다.

벤틀리는 1971년 8월 13일 사망하였으며, 1995년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2]에 입성하였다.
[1] 영국 브리스톨에 위치한 퍼블릭 스쿨.
위키피디아 - Clifton College 참고.
[2] Automotive Hall of Fame(AHF) - WALTER O. BENTLEY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