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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00:48:32

1924년 고려혁명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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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관련 문서

1. 개요

1924년 추풍지방 일대의 고려혁명군이 한인들과 러시아인들을 위협하고 약탈하다가 소련 적군에 의해 해산된 사건. 이 사건의 고려혁명군은 고려혁명군의 러시아 농민 살해사건의 고려혁명군과는 다른 단체다.

2. 상세

1924년 고려혁명군 사령관 허승환은 원래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었을 때 중대장이었다고 한다. 허승환의 군대는 잠시 해산했다가 소련 적군 당국으로부터 한인무장단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아 약 30여명의 무장단을 조직하고 '고려혁명군'이라고 불렸다. 고려혁명군의 모든 무기와 탄약 등은 소련에게 지급받았다. 이후 대한제국 시대 소좌였던 신현대가 삼차구에서 단원을 이끌고 와서 허승환의 군대와 병합시켜 고려혁명군의 병력은 12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신현대는 공산주의를 수용하지 않고 항상 국권회복을 외치며 단원들의 사상을 변화시켰고 결국 고려혁명군은 공산당 측과 유리된 단체가 되었다.[1]

무슨 이야기냐면 외국의 영토에서 영토의 주권국가에게 무기와 탄약을 지급받는 자치적 군사단체에 기존 자치 단체보다 3배나 많은 외부세력이 들어가 병합시키고 소련과 반대되는 성향의 단체로 테라포밍했다는 의미다. 이 시점에서 고려혁명군은 영토의 주권국가를 위협하는 불법 무장단체로 탈바꿈된 것이다.

니꼴스크-우스리스크시 소련 적군은 허승환과 협정을 맺고 고려혁명군을 해산하기로 하였다. 허승환은 분산배치된 각 단원들을 소집했다. 3일 후인 1924년 7월 15일 저녁무렵 재피거우 부근이 소련 적군 병력에 의해 포위되었다. 도망가지 않은 단원들은 모두 체포되어 무장해제되고 결박되어 구인되었다. 이를 본 신현대의 부하 13명은 소련 적군에게 발포했다. 발포한 대원들은 금방 체포되어 총살됐고 이 사건에서 신현대와 부하 약 20명이 피살됐다. 허승환은 미리 러시아측과 결탁하여 도주한 상태였다.[2]

해산 단원들은 허승환과 소련의 조치에 분개하여 추풍지방 일대 각지에서 대대적으로 약탈을 자행했다. 약탈 행위가 대대적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소련 적군에게 보고하여 해산단원들이 있는 지역을 포위하여 '청장년자들의 여하를 막론하고 살육하여 촌민 약 30명이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살육된 촌민 약 30명이 약탈단체의 일부인지 민간인인지 여부는 논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해산단원들은 허승환의 행동과 러시아측의 조치에 분개하여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하여 추풍지방 일대는 일시 비상한 소요가 일어났다.8월말 십수명의 단원은 自皮溝,揚子溝,五峯山 지방에서 대대적으로 약탈행위를 했기 때문에 주민은 이를 게뻬우에 보고하여 당시 게뻬우는 이들이 도주했던 흔적이 있는 부락을 포위하고 청장년자들의 여하를 막론하고 살육하여 촌민 약 30명이 그곳에서 죽었으며,일제토벌의 결과 잔당들은 전부 중국령으로 도피하고 현재 그 지방에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게되었다는 것이다.[3]
여기서 죽지 않고 살아난 병사의 증언이 독립신문에 게재됐다. 살아난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러시아 기병대의 일방적 공격에 의해 32명의 한인 병사들이 사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죽지않고 살아난 병사의 증언을 담은 독립신문의 기사는 좀 다른 정보를 준다. 그는 러시아기병대의 일방적 공격에 의해 32명의 한인 병사들이 사살당했다고 주장한다 [4]
살아남은 한인 병사는 이유없이 공격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증언은 일본의 기밀문서와 상반되며 일본이 굳이 소련에게 유리한 허위첩보를 날조할 정황이 없었고 오히려 정황상 개연성이 있으므로 일본의 기밀문서가 사실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무장해제의 원인에 대해 그 병사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소련 당국의 문서가 없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일본의 정보문서를 보더라도 고려혁명군의 존재는 그 지방의 한인들에게 뿐 아니라 러시아인들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그들은 독립의 미명을 빌어 농민들로부터 금품을 거둬들였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기부일 수 있지만, 주민들 입장에서는 강탈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나아가 이런 고려혁명군 군인들의 행동은 소비에트 당국이 연해주에서 치안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5]
요약하자면 외국에서 총기와 탄약을 지원하는 자치적 군사단체를 조직했는데 3배나 많은 외부세력이 외국의 자치적 군사단체를 병합해 영토의 주권국가와 반대되는 성향으로 테라포밍해서 불법 군사단체로 조직했다가 영토의 주권국가들에게 해산되자 해산된 병사들이 러시아인들의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약탈해서 주민들이 소련군에게 신고해 소련군에게 사살됐다는 이야기다.

3. 관련 문서



[1]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 2010), p.338~339[2]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 2010), p.339[3]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 2010), p.339[4]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 2010), p.40[5]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 2010), p.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