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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6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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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6px -12px; letter-spacing: 0px" | <rowcolor=#fff>시모어 80인 | ✔ (72.8%) 214인 그랜트 | }}}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1864년 11월 8일 1864 대선 | → | 1868년 11월 3일 1868 대선 | → | 1872년 11월 5일 1872 대선 |
선거 일시 | 11월 3일 8시 ~ 11월 4일 6시 (UTC) | |||||
투표율 | 78.1% | |||||
선거 결과 | ||||||
후보 | [[공화당(미국)| 공화당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부통령 스카일러 콜팩스 | [[민주당(미국)| 민주당 ]]대통령 호레이쇼 시모어 부통령 프랜시스 P. 블레어 | ||||
선거인단 | ||||||
214명 | 80명 | |||||
전국 득표 | ||||||
52.7% 3,013,421표 | 47.3% 2,706,829표 | |||||
대통령 당선인 | 부통령 당선인 | |||||
공화당 {{{#!wiki style="margin: -5px -10px"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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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진행된 선거로, 미국 역사상 마지막 내전인 남북 전쟁의 종전 이후 치러진 첫 대선이다.공화당의 율리시스 S. 그랜트 후보가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해 당선, 제18대 대통령이 되었다.
2. 주요 이슈
2.1. 흑인에 대한 시민권 부여 및 남부 재건 문제
남북전쟁이 남부연합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뒤 북군의 군정이 시작됐는데, 사실 여타 역사적 사례와 비교해보면 링컨 대통령이 연방의 재통합을 우선시하여 남부연합을 가담한 정치인들이나 남군에 대해 약한 처벌만을 내리는 등 남부에 상당히 관대한 처분을 내렸지만 어찌됐건 이들에게는 연방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참정권이 제한되고 남부 출신 정치인들은 연방 공직 임용이 제한되는 등 상당한 수준의 제재가 가해졌다.공화당 급진파는 더 가혹한 처분을 내려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링컨이 이를 억누르고 있었는데, 그 링컨이 1865년 남부 출신의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해 암살당하고 민주당의 앤드루 존슨이 대통령이 되면서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의 방향성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된다.
존슨 대통령이 겉으로는 링컨의 유화책을 계승하는 듯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넘어서 '링컨의 유산'으로 흑인들의 시민권 보장과 남부에 대한 제재를 포함한 수정헌법 제14조를 무시하면서 남부에 대한 제약을 해제해주려고 했고 공화당에서는 바로 그 수정헌법 제14조를 바탕으로 1866년 민권법을 제정해 이에 대응했다.
이에 반발한 존슨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자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에서는 거부권을 무시하고 법안을 재의결하는 등 양자는 극한 대립을 이어갔다. 결국 이를 보다못한 공화당에서는 아예 존슨 대통령을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했고, 실제 탄핵 인용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 존슨 행정부는 레임덕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후일 돌아볼때 인종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렇게 놓친 셈이 되었다.
이 사이 남부에서는 원래의 주정부를 대신해 군정 정부에서 흑인들의 시민권을 보장하고 과거 남부연합에 가담했던 백인들에 대한 제재를 지속했고, 남부인들은 이에대한 심적 반발과 저항으로 KKK를 조직해 흑인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방식으로 대항했다. 특히 대선이 열린 1868년에는 오펠루사스 학살을 비롯해 남부에서 공화당 주도의 군정과 흑인에 대한 끔찍한 살상극이 연이어 발생하기도 했다.
3. 후보 선출
3.1. 공화당
에이브러햄 링컨의 암살로 리더를 잃은 공화당이지만 공화당 급진파는 아직 건재하게 살아있었고, 남북전쟁 승리의 영향으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직 민주당은 공화당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당시 언론 등에도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 실제로 대선으로부터 2년전인 1866년에 있었던 중간선거에서도 공화당이 상원 2석, 하원 23석을 오히려 불리면서 민주당을 압도했다.하지만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남부주들이 다시 연방에 가입하면서 선거권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고, 전쟁민주당의 이름으로 공화당과 손잡았던 북부민주당 세력들이 다시 이탈하면서 북부주에서의 영향력도 링컨이 재선 대통령에 취임했던 1865년에 비해 상당히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공화당에서는 조금씩 기지개를 펴려는 민주당의 기세를 꺾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남북 전쟁의 영웅인 율리시스 S. 그랜트를 경선 없이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그랜트 역시 남부 재건 문제에 있어서 공화당 급진파와 마찬가지로 앤드루 존슨 대통령 시절과 다른 강경한 태도를 약속했다.
한편 부통령 후보로는 6차례에 거친 투표 끝에 오하이오 연방 상원의원인 벤자민 웨이드를 꺾고 연방하원의장을 지내고 있던 스카일러 콜팩스가 선택을 받았다. 다만 둘 다 공화당 급진파에 속했기 때문에 성향적 차이는 크지 않았다.
3.2. 민주당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좌충우돌 행보로 안그래도 지지율이 낮은데다가, 남부에 대한 과한 유화정책으로 남북 전쟁의 원죄까지 뒤집어쓴 상황이 되어버려서 대선 승리를 점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문인지 그랜트에 대한 추대로 끝난 공화당 전당대회와 달리 대선 후보를 정하는 과정이 매우 험난했다. 사실상 질 걸 알고 가는 자리였기 때문.투표 초반에는 지난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로 나섰던 조지 H. 펜들턴이 선두를 달렸고, 현직 대통령이었던 존슨은 1차 투표에서 62표(2위)를 획득하는데 그쳐 재선 도전 가능성을 시작부터 잃었다. 하지만 펜들턴 역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상황은 아니었고, 서로 후보를 맡으려는 걸 기피하는 분위기 속에 그저그런 후보군들이 계파 싸움[1]의 가운데서 아옹다옹하고 있는 상황에서 뜻밖에도 뉴욕 주지사 출신의 호레이쇼 시모어가 주목받게 되었다.
재밌는 것은 시모어가 이길 확률도 높지 않은 자리에 갔다가 정치 생명을 일찍 마감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일찌감치 자신의 후보 지명에 한사코 반대했다는 점. 아예 하지만 22라운드까지 진행된 후보 지명 투표에서 오하이오 대표단이 시모어에게 표를 던지면서 민주당의 분위기는 시모어에게 거의 후보직을 받을 것을 강요하는 수준이었고,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9차례에 거친 투표 끝에 자신의 대선 후보 강제 추대 소식을 신문을 통해 본 시모어가 "나보고 죽으라는 거냐?"라고 일갈했다는 이야기.
4. 본선
압도적인 후보의 지명도와 언론의 지원 속에 선거전을 시작한 공화당이었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있었다. 다름 아닌 정치 신인 그랜트 그 자체가 가진 리스크와 미국의 일반 대중들이 백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기저의 인종주의 성향을 민주당에서 적극 공략할 때 현재의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2] 두 가지였다.반면 민주당은 몇가지 반전의 여지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남북 전쟁의 원죄를 비롯해 텍사스, 미시시피, 버지니아가 아직 연방에 완전히 복귀하지 못한 점, 그나마 복귀한 주에서도 투표권을 회복하지 못한 지지자들이 많아 투표권을 가지게 된 흑인 자유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진 점 등 여전히 어려운 요소가 많았다.
따라서 대선은 공화당의 약점 줄이기라는 큰 그림 속에서 흘러갔다. 그랜트는 직접 선거 운동에 나서거나 공약을 내세우는 대신 이미지를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후보 수락 연설에서 내세운 "우리는 평화를 가집시다."(Let us have peace)를 선거 문구로 활용했다. 4년간 이어진 내전과 그 뒤 3년간 이어진 내전의 후폭풍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과 탄핵 시도라는 아픔을 이제는 마무리하자는 이 구호는 미국 국민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또한 언론들의 일방적인 도움도 상당히 공화당으로서는 든든한 부분이었다. 시모어 본인은 북부 민주당원으로서 전쟁 당시에도 뉴욕 주지사 자격으로 게티즈버그 전투에 병력을 파견하는 등 나름대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간엔 평화민주당(Peace Democrats)에 가까운 활동을 보였기 때문에 언론들은 그가 내전 과정에서 연방에 충성하지 않았다며 이 부분을 직접 공격했고, 남북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며 인기가 최악에 가까웠던 제임스 뷰캐넌 전 대통령에 비유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나온 프랜시스 P. 블레어는 위기에 처한 시모어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흑인들을 야만인으로 묘사하고, 백인 여성들을 상대로 성적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다며 폄하하는 발언을 일삼으면서 표를 날리는데 기여했다. 다만, 오히려 민주당 내 강경 세력을 비롯한 일부는 블레어가 솔직하다면서 치켜세우고 오히려 이를 비판하는 공화당 급진파를 비난했다.
시모어는 블레어의 돌발 행동을 극복하기 위해 '재건 문제'를 '각 주의 자유 문제'라고 프레임 전환을 시도했고, 남부의 변화가 국가적 간섭 없이 주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역시 당 차원에서는 인종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남북 전쟁 이전의 남부처럼 '주의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공약을 전환했다.
5. 선거 결과
투표 결과 | ||
후보자 | 율리시스 S. 그랜트 | 호레이쇼 시모어 |
선거인단 수 | 214명 / 294명 | 80명 / 294명 |
전국 득표 수 | 3,013,421표 (52.66%) | 2,706,829표 (47.34%) |
대통령 당선인 | ||
율리시스 S. 그랜트 |
예상대로 공화당의 율리시스 S. 그랜트 후보가 선거인단 294명 중 214명을 확보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미합중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서 공화당은 1865년 있었던 링컨 전 대통령의 암살 이후 3년만에 백악관을 되찾았고, 연방 상·하원에서도 다수당 지위를 지키면서(하원 243석 중 171석, 상원 66석 중 57석) 재건 시대를 이끌어갈 압도적 힘을 회복했다. 뉴욕을 내주긴 했지만 대부분의 북부주를 지켰고, 새롭게 투표권을 가진 흑인 유권자들의 도움으로 남부주에서도 무난하게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승리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마냥 웃을수가 없었는데, 전국 득표율이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근소한 격차(5.32%p)였기 때문. 이 사실에 대해서는 공화당뿐만 아니라 민주당을 포함한 당대 정치인들이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민심의 바로미터라 불리웠고, 후일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도 출마하는 제임스 G. 블레인 연방 하원의원은 이에 대해 "매우 놀라운 사실"("a very startling fact.")이라는 짤막한 평을 덧붙이기도 했다.
산술적으로 북부에 있는 다수의 백인 남성이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민심과 달리 기층 민심은 공화당의 재건 정책 및 흑인의 시민권 부여에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실제로 가장 많은 선거인단이 배정된 뉴욕은 아예 민주당의 손에 떨어졌고, 펜실베이니아와 오하이오에서도 대략 55% vs 45% 정도의 격차밖에 나지 않았다. 물론 전임 존슨 행정부 시절 정국을 파국으로 끌고 간 공화당 급진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또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켄터키에서는 아예 이에 대한 반발심을 동력으로 남부연합 출신 인사들이 주정부를 장악하기도 했고, 이것이 이번 대선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것이 민주당의 시모어 후보가 아예 뉴욕주지사만 2번을 지낼만큼 아예 정치 신인인 그랜트에 비해 뉴욕에 정치 기반이 탄탄한 정치인이기도 했고,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의 경우 한창 전쟁 중이었던 1864년 당시 대선(링컨 vs 매클러렌)때도 비슷한 수준의 격차를 보인 바 있기 때문. 학자에 따라선 오히려 구 남부연합 출신이거나 이에 동정적인 입장을 지녔던 백인들이 연방 정치에 대거 복귀했음에도 그랜트가 전쟁 과정에서 새로 등장한 이민자 출신 유권자들과 새롭게 투표권을 가진 흑인 유권자들의 도움을 받아 여유로운 차이로 이긴 것[3]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기에 시모어 역시 대선 후 반발 없이 빠르게 결과에 승복했다.
후일 시모어의 전기를 쓴 작가 스튜어트 미첼(Stewart Mitchell)은 이 대선을 평하면서 국민들이 연방을 구한 공화당의 공로를 인정한 대선으로 계속 미국을 통치할 자격을 얻은 것이라는 분석을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 공화당은 이 대선을 시작으로 1884년까지 16년간 정권을 장악한다.
5.1. 주별 결과
주(선거인단 수) | 비고 | ||
앨라배마 (8) | 호레이쇼 시모어 72,921표 (48.75%) | 율리시스 S. 그랜트 76,667표 (51.25%) | 공화당 획득 |
아칸소 (5) | 호레이쇼 시모어 19,078표 (46.32%) | 율리시스 S. 그랜트 22,112표 (53.68%) | 공화당 획득 |
캘리포니아 (5) | 호레이쇼 시모어 54,068표 (49.76%) | 율리시스 S. 그랜트 54,588표 (50.24%) | 공화당 수성 |
코네티컷 (6) | 호레이쇼 시모어 47,844표 (48.51%) | 율리시스 S. 그랜트 50,788표 (51.49%) | 공화당 수성 |
델라웨어 (3) | 호레이쇼 시모어 10,957표 (59.00%) | 율리시스 S. 그랜트 7,614표 (41.00%) | 민주당 수성 |
플로리다 (3)[간선] | 호레이쇼 시모어 9표 (18.37%) | 율리시스 S. 그랜트 40표 (81.63%) | 공화당 획득 |
조지아 (9) | 호레이쇼 시모어 102,707표 (64.27%) | 율리시스 S. 그랜트 57,109표 (35.73%) | 민주당 획득 |
일리노이 (11) | 호레이쇼 시모어 199,116표 (44.31%) | 율리시스 S. 그랜트 250,304표 (55.69%) | 공화당 수성 |
인디애나 (13) | 호레이쇼 시모어 166,980표 (48.61%) | 율리시스 S. 그랜트 176,552표 (51.39%) | 공화당 수성 |
아이오와 (8) | 호레이쇼 시모어 74,040표 (38.08%) | 율리시스 S. 그랜트 120,399표 (61.92%) | 공화당 수성 |
캔자스 (3) | 호레이쇼 시모어 13,600표 (31.17%) | 율리시스 S. 그랜트 30,027표 (68.82%) | 공화당 수성 |
켄터키 (11) | 호레이쇼 시모어 115,889표 (74.55%) | 율리시스 S. 그랜트 39,566표 (25.45%) | 민주당 수성 |
루이지애나 (7) | 호레이쇼 시모어 80,225표 (70.69%) | 율리시스 S. 그랜트 33,263표 (29.31%) | 민주당 획득 |
메인 (7) | 호레이쇼 시모어 42,460표 (37.59%) | 율리시스 S. 그랜트 70,502표 (62.41%) | 공화당 수성 |
메릴랜드 (7) | 호레이쇼 시모어 62,357표 (67.20%) | 율리시스 S. 그랜트 30,438표 (32.80%) | 민주당 획득 |
매사추세츠 (12) | 호레이쇼 시모어 59,103표 (30.23%) | 율리시스 S. 그랜트 136,379표 (69.76%) | 공화당 수성 |
미시간 (8) | 호레이쇼 시모어 97,060표 (43.02%) | 율리시스 S. 그랜트 128,560표 (56.98%) | 공화당 수성 |
미네소타 (4) | 호레이쇼 시모어 28,096표 (39.12%) | 율리시스 S. 그랜트 43,722표 (60.88%) | 공화당 수성 |
미주리 (11) | 호레이쇼 시모어 65,628표 (43.04%) | 율리시스 S. 그랜트 86,860표 (56.96%) | 공화당 수성 |
네브래스카 (3) | 호레이쇼 시모어 5,519표 (36.09%) | 율리시스 S. 그랜트 9,772표 (63.91%) | 공화당 획득 |
뉴햄프셔 (5) | 호레이쇼 시모어 12,045표 (44.76%) | 율리시스 S. 그랜트 37,718표 (55.22%) | 공화당 수성 |
뉴저지 (7) | 호레이쇼 시모어 83,001표 (50.88%) | 율리시스 S. 그랜트 80,131표 (49.12%) | 민주당 수성 |
뉴욕 (33) | 호레이쇼 시모어 429,883표 (50.59%) | 율리시스 S. 그랜트 419,888표 (49.41%) | 민주당 획득 |
노스캐롤라이나 (9) | 호레이쇼 시모어 84,559표 (46.59%) | 율리시스 S. 그랜트 96,939표 (53.41%) | 공화당 획득 |
오하이오 (21) | 호레이쇼 시모어 238,621표 (46.00%) | 율리시스 S. 그랜트 280,167표 (54.00%) | 공화당 수성 |
오리건 (3) | 호레이쇼 시모어 11,125표 (50.37%) | 율리시스 S. 그랜트 10,961표 (49.63%) | 민주당 획득 |
펜실베이니아 (27) | 호레이쇼 시모어 313,382표 (47.80%) | 율리시스 S. 그랜트 342,280표 (52.20%) | 공화당 수성 |
로드아일랜드 (4) | 호레이쇼 시모어 6,548표 (33.51%) | 율리시스 S. 그랜트 12,993표 (66.49%) | 공화당 수성 |
사우스캐롤라이나 (6) | 호레이쇼 시모어 45,237표 (42.07%) | 율리시스 S. 그랜트 62,301표 (57.93%) | 공화당 획득 |
테네시 (10) | 호레이쇼 시모어 26,129표 (31.57%) | 율리시스 S. 그랜트 56,628표 (68.43%) | 공화당 획득 |
버몬트 (5) | 호레이쇼 시모어 12,045표 (21.43%) | 율리시스 S. 그랜트 44,167표 (78.57%) | 공화당 수성 |
웨스트버지니아 (5) | 호레이쇼 시모어 20,306표 (41.17%) | 율리시스 S. 그랜트 29,015표 (58.83%) | 공화당 수성 |
위스콘신 (8) | 호레이쇼 시모어 84,703표 (43.75%) | 율리시스 S. 그랜트 108,900표 (56.25%) | 공화당 수성 |
6. 여담
[1] 동부 vs 서부를 비롯해 보수파 vs 진보파의 싸움이 더해져 그야말로 전당대회가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2] 하다못해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이끌었던 저명한 사령관들조차도 연방의 통합을 중시했을뿐 인종차별 문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거나, 아예 흑인을 낮게 보는 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했다.[3] 특히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등장하는 1904년까지 공화당이 남부주인 미주리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한 대선이고, 테네시에서는 이번 대선을 마지막으로 1920년까지 민주당이 계속 승리를 거둔다.[간선] 주의회에 의한 간선제로 투표가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