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후안 벨라즈 데 메드라노 4세 Juan Vélaz de Medrano IV |
출생 | 미상 |
나바라 왕국 이구스퀴사 | |
사망 | 1441년경 |
나바라 왕국 | |
아버지 | 알바르 디아즈 데 메드라노 이 알모라비드 |
아내 | 비앙카 데 루엔 |
자녀 | 페란 벨라즈 데 메드라노 이 루엔 |
직위 | 나바라 왕실 시종장, 이구스퀴사, 아르기냐노, 아르조즈, 리어자, 아르타주, 자발, 오렌다인의 남작, 몬하르딘과 비아나 성의 알카이데[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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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나바라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2. 생애
출생지는 나바라 왕국의 이구스퀴사이며, 아버지는 몬자르댕 성의 알카이데이자 나바라 왕국의 고위 귀족인 알바르 디아즈 데 메드라노 이 알모라비드였다.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1396년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종자로서 왕실 문서에 처음으로 언급되었으며, 1397년 카를로스 3세의 프랑스 방문에 참여해 50길더를 보상으로 받았다. 또한 1398년에서 1401년 사이에 왕실로부터 27플로린에 해당하는 소량의 왕실 보물을 받았다. 1405년 몬하르딘의 알카이데에 선임되었으며, 1406년 레가리아, 미라푸엔테스, 우방고 일대의 영지를 할당받아 그곳을 관리하는 대가로 40플로린을 받았다. 1407년 왕실 행렬의 종자로 선임되었고, 코르테스에서 특별세를 지급할 대상자에서 면제받는 혜택을 받았다. 같은 해에 우박으로 포도원이 망가졌기 때문에 포도 구입을 위해 15 플로린을 기부받았다.1409년 처음으로 기사에 선임되었으며, 1410년 아라곤 국왕 마르틴 1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급사한 뒤 벌어진 내전에 참여하려 했지만 해외로 떠난 카를로스 3세를 대신해 왕국을 섭정하던 엘레오노르 드 부르봉 왕비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해 그의 영지인 오렌다인 주민 2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나바라 궁정 문서에 따르면, 주민들은 영주가 만찬을 벌일 때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만찬세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코르테스는 반란을 일으켰던 당사자들에게 후안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벌금과 소송 비용을 지불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1412냔 나바라군이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도와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랑그독에서 전쟁을 벌일 때 석궁수 4명을 이끌고 참여했으며, 이를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해 오렌다인에 있는 재산을 저당잡혔다. 카를로스 3세는 그가 재산을 되찾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100 플로린을 지불했다. 1413년 4명의 시종을 대신해 왕에게 호소하여 코르테스가 승인한 특별세 지불 대상에서 면제되도록 했다. 1414년 몬하르딘의 알카이데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왕실 시종장이 되었으며, 1421년 연간 30파운드를 벌어들이는 6개 영지로 확장되면서 무장병 6명을 개인적으로 이끌 수 있게 되었다.
1425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한 뒤 나바라 여왕이 된 수리아 1세는 1428년 후안에게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영지를 계속 가지는 걸 허용했다. 1429~1430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나바라 왕국을 침공했을 때, 후안은 비아나 시의 알카이데로 선임되어 무장병 33명과 기병 13명을 이끌고 대항했다. 1429년 비아나를 포위한 카스티야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1433년 수리아 1세의 산타 마리아 델 필라르 순례에 동행했으며, 1432년 아라곤과 나바라 왕 추안 2세로부터 왕실 시종장으로 임명되었다. 1441년 1월에 마지막으로 왕실 기록에 언급되었던 것을 볼 때, 그는 1441년 초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안은 1396년 비앙카 데 루엔과 결혼해 아들 페란 벨라즈 데 메드라노 이 루엔을 낳았다. 페란은 아버지의 영지를 계씅받고 무예즈, 멘도사, 레가리아의 관리권을 부여받았으며, 1461년 추안 2세로부터 이구스키사의 영주로 발탁되었고 알린과 산테스테반 데 라 솔라나 계곡의 수입을 보장받았다. 벨라즈 데 메드라노 궁전을 재건했고, 페란과 그의 후손들은 매년 정해진 날짜에 화려한 축제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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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lcaide, 성 지휘관을 일컫는 나바라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