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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니토(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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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스페인의 前 축구 감독
파일:Juanito_Profile.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후아니토
Juanito
본명 후안 고메스 곤살레스
Juan Gómez González
출생 1954년 11월 10일
스페인국 푸엔히롤라
사망 1992년 4월 2일 (향년 37세)
스페인 칼사다데오로페사
국적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신체 169cm
직업 축구선수 (윙어,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72~1973)
부르고스 CF (1973~1977)
레알 마드리드 CF (1977~1987)
말라가 CF (1987~1989)
CD 로스 볼리체스 (1991)
감독 CP 메리다 (1991~1992)
국가대표 34경기 8골 (스페인 / 1976~1982)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은퇴 후5. 여담6. 수상 경력
6.1. 클럽6.2. 개인

[clearfix]

1. 개요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1970~1980년대 레알 마드리드를 대표했던 스트라이커였다. "베르나베우에서의 90분은 매우 길다."는 말을 남겼으며 이 말 때문에 흔히 불리는 "후아니토의 정신"의 당사자다.

2. 클럽 경력

말라가 주 푸엔히롤라 출신인 후아니토는 인근 푸엔히롤라 유스팀에서 축구를 시작해 1972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입단하였다. 아직 미성년자였던 후아니토는 고의로 서류를 조작해 18세 이하 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그는 첫 출전한 경기에서 2골을 넣었지만 정강뼈 골절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더 이상 활약하지 못하였고 1군에 올라서지도 못했다.

후아니토는 부르고스 CF에서 재기하였는데 소속 구단이 1975-76 시즌에 세군다 디비시온을 우승할 수 있게 도왔다. 그는 RCD 에스파뇰과의 이듬해 경기에서 라리가 신고식을 치르게 되었고, 그 시즌 돈 발론 올해의 국내 선수로 선정되게 되었다.

2.1. 레알 마드리드 CF

이후 레알 마드리드 CF의 시선을 사로잡게 되었고, 1977년 6월 이적이 성사되었다. 그는 산티야나, 울리 슈틸리케, 비센테 델 보스케, 그리고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등과 함께 1970년 말에서 1980년대 레알 마드리드 성공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마드리드 1년차에 10골을 기록한 그는 수도 연고 구단이 5번의 리그 우승, 2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 그리고 2번의 UEFA컵 우승에 지대한 공을 세우며 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그의 활약이 가장 드러난 경기로는 1980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으로, 우연찮게 구단의 2군인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CF와 붙은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여 6-1 승리를 견인했다. 1983년 5월 11일, 그는 애버딘 FC과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에서 페널티 킥으로 골을 기록했지만 1-2로 석패하였고, 이듬해 리그에서는 17골로 공동 득점왕에 올라 피치치를 거미쥐었다. 레알 소속으로 보낸 10시즌간 그는 284번의 1부 리그 경기에 출전해 85번 골망을 갈랐고 55번의 다양한 유럽 대항전에 나서서 17골을 기록했다.

레알 마드리드를 떠난 후아니토는 말라가에서 2년을 보내며 2부 리그에 소속된 말라가를 전설적인 쿠벌러 라슬로 감독과 힘을 합쳐 1년차에 1위로 승격을 이룩하였고 이듬해에는 5골을 넣은 뒤 1989년에 은퇴하였다. 이후 처음 축구를 했던 고향 안달루시아의 아마추어 구단 푸엔히롤라 소속으로 몇 경기 뛰었다.

3. 국가대표 경력

후아니토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34번 출전해 8골을 기록하였다. 그가 처음 출전한 경기는 1976년 10월 10일, 세비야에서 벌어진 유고슬라비아와의 1978 FIFA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2-0으로 이긴 이 경기에서 30분에 비센테 델 보스케와 교체되어 들어갔다.

1977년 11월 30일, 베오그라드에서 같은 상대를 만나 1-0으로 이긴 두 번째 출전 경기에서 교체되어 나가는 중 관중이 던진 병을 맞고 관중을 상대로 외설적인 손동작을 보였다.

후아니토는 스페인을 대표로 1978년과 자국에서 열린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1], 그리고 UEFA 유로 1980[2]에 출전하였다. 1982년 월드컵 대회에서 그는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페널티킥 골을 기록해 2-1 승리를 견인했다.[3] 또한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축구[4]에서 축구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4. 은퇴 후

그는 이후 메리다에서 감독직을 맡았고 1991-92 시즌 2부 리그에서 7위의 성적을 내었다. 그러나 1992년 4월 2일, 레알 마드리드와 토리노 FC 간의 UEFA컵 경기를 관전하고 메리다로 귀가하던 길에 톨레도 주 칼사다 데 오로페사의 고속도로에서 트럭과 충돌했고, 그의 차량의 오른쪽 부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다. 결국 그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향년 37세,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였다.[5]

5. 여담

베르나베우에서의 90분은 매우 길다.
후아니토의 말대로 레알 마드리드는 45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산티야나의 멀티 골에 힘입어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후반 15분에 미첼이 결승골을 기록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인터 밀란을 꺾고 종합 3-2로 승리하며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리고 헝가리의 비데오톤을 꺾고 UEFA 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다음 해인 1985-86시즌 UEFA 컵에서도 기적은 계속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3라운드 상대였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원정 경기에서 1-5로 패배했지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호르헤 발다노와 산티야나의 멀티 골에 힘입어 4-0으로 승리했다. 이처럼 2년 연속으로 기적과 같은 역전극이 일어나자, 이때부터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은 후아니토의 정신을 경이롭다고 여겼다. 또한, 이때부터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유럽 대항전이 열리면, 지고 있는 경기도 언제든지 역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후아니토의 정신이다. 그리고 이 정신이 훗날에 활약할 후배들에게 전승되어 지금까지도 수많은 역사를 써내려 왔다.

6. 수상 경력

6.1. 클럽

6.2. 개인



[1] 24개국 본선[2] 8강 본선[3] 다만 이 골은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얻어낸 파울을 페널티킥으로 판정했고, 후아니토가 1차 시도에서 실축하자 주심이 석연찮은 골키퍼 파울을 선언해 다시 기회를 얻어 넣은 골인지라 지금도 논란이 되는 골이다.[4] 16개국 본선[5] 이 사고가 없었다면 2020년대 현재도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로 대우받으며 감독 등으로 여전히 축구계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