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롄 胡琏 | Hu Li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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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7b00><colcolor=#FFF> 출생 | 1907년 11월 16일 |
| 청나라 산서성 화현 | |
| 사망 | 1977년 6월 22일 (향년 69세) |
| 대만 타이베이시 | |
| 군사 경력 | |
| 임관 | 황푸군관학교 (4기) |
| 복무 | 국민혁명군 |
| 1926년 ~ 1949년 | |
| 대만 육군 | |
| 1949년 ~ 1974년 | |
| 최종 계급 | 1급상장 (대만 육군) |
| 참전 | 국공내전 중일전쟁 진먼 포격전 |
1. 개요
대만의 군인.2. 생애
청나라 화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공부를 잘했으며 동네에서 천재소리를 들었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에 4기로 입교하고 1926년 졸업해 장교로 임관했다.[1] 국민혁명에 참가해 실전을 치렀으며 대대장까지 올라갔다.중일전쟁 당시 제18군 제11사단 66연대장이였고 상하이 전투 당시 북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본군은 포격, 항공지원, 전차를 앞세워 돌격해왔고 인접부대 여단장 차이빙옌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주력군이 단시간에 전멸당했고 그가 지휘하는 66연대는 전차를 잡기위한 특공조를 구성하는 등 분전했으나 패배했다. 서후베이 전투 당시 제11사단장으로 이창 인근의 요새를 방어했고 인접 제대들이 일본군의 공세를 받고 퇴각했으나 5일간의 혈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했다.
국공내전 당시 제18군 사령관으로 난마 전투에서 쑤위, 류보청, 예페이 등이 지휘하는 공산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마오쩌둥은 그를 보고 "교활하기로는 여우 같고 용맹하기로는 호랑이 같다"는 평을 내렸다. 쉬저우 전역에서 수류탄으로 인해 부상을 입었으며 국민당군이 점점 남쪽으로 후퇴하고 있음에도 부대를 재편성해 전투력을 오히려 강화한 채로 대만으로 건너갔다.
이후 진먼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구닝터우 전투 당시 진먼에 상륙한 중공군을 전멸시켰으며, 1952년에는 난르다오를 기습 공격해 섬에 주둔하던 중공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일시적으로 탈환하기도 했다. 진먼 포격전 당시 중공군의 포격으로 부사령관 자오자샹, 장제, 지싱원이 전사했고 본인 역시 전사할 뻔했다. 그럼에도 부대를 잘 추스려 응사했으며 미국의 지원과 대만군 역시 증원오며 상황은 대만에게 유리해졌다. 1958년 11월 16일 류안치에게 방위사령관직을 이임하고 육군 부참모장으로 영전했다.
다만 정치인들에게 아첨하는 것을 별로좋아하지 않아 장징궈가 진먼에 방문할때 맞이하지 않았고 장징궈는 개인적으로 섭섭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총참모장의 자격이 있음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주남베트남대만대사를 지내고 1972년 귀국해 1급상장으로 진급했다. 1974년 제대하고 국립타이완대학에 진학해 고전을 탐구했다. 주로 송나라의 문헌을 연구했다. 1977년 심부전으로 사망했고 시신은 화장되어 진먼 바다에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