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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7 14:24:37

활빈당

1. 개요2. 활동3. 취지4. 구성원5. 대한사민논설 13조목6. 같이 보기

1. 개요



구한말 삼남지방의 화적이 중심이 된 비밀결사조직으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활동하였다.[1]

고종의 의병해산권고 조칙을 통해 정식으로 해산된 을미의병 소속원들 중 일부가 모여 결성한 일종의 의적단이다.

2. 활동

특정한 목적을 가진 단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의적들이었기 때문에 관청을 공격하거나 하여 곡식을 탈취해 배포하는 활동을 하여 백성들의 지지가 높았다.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고,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외국의 경제적 침투에 항의하면서 일본상인 및 부자들을 공격하였다. 을미의병이 가담한 1895년부터 1904년까지는 거의 모든 신문에서 언급이 될 정도로 크게 활동을 하였는데, 당시 신문들 대부분은 욕하는 내용이었다. 신문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개화활동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었고, 특히 독립신문 같이 해외 열강 하고도 일본과 연결되어 있던 신문들과는 완전히 상극이었다. 위키백과 활빈당 문서는 글로벌 세계대백과 사전을 인용해서, 만민공동회가 좌절되면서 정치적 진출이 불가능해진 농민이 정치세력화를 기대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는데,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의 영향력이 미치던 범위와 활빈당의 활동이 활발해진 시기, 주장 내용 등을 보면 신뢰하기 대단히 어렵다고 하겠다. 당대 신문에서 꾸준히 묘사되는 활빈당은 화적, 혹은 동학군 일부세력이었고, 동학잔당 도적떼 토벌하라는 이야기는 독립신문도 열심히 했다. 1905년 주축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그 세력이 약해졌다. 그래도 잔존세력이 있어서, 이들은 을사의병에도 후에 가담하게 된다.

유교적 왕도사상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다는 비판도 있는데, 이전 동학 농민 혁명에서도 보이는 당시 농민운동의 특징이다. 더 정확하게는 '개화', '공화'는 곧 외국인들의 사상과 생각이었고, 농민들은 외세로부터 피해를 봤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구사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활빈당에서 말하는 반봉건은 유교적 질서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닌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수탈, 외세와 부화뇌동하는 지배계급에 대한 반대인 것이다.

3. 취지

일본 세력과 서양세력을 몰아내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명칭은 홍길동전의 활빈당처럼 의로운 도적이 되어, 백성들을 외세로부터 지켜내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4. 구성원

기본적으로 개화과정의 경제정책과, 열강, 그것도 일본에 의한 경제적 침략으로 몰락한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여기에 해당하는 동학농민운동 잔존세력과, 을미의병 잔존세력이 결합하면서 본격화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때문에 을미의병 이후부터 등장하게 된다.
직업적으로는 잔반[2], 농민, 장사꾼(보부상), 승려, 머슴, 거지, 병정, 포수, 관노, 훈장, 돌팔이[3] 의사, 광산 노동자 등 다양하게 구성 되어 있다.

5. 대한사민논설 13조목

요사스런 저 왜놈들이 들어와 개화를 읊조리고 조정의 간신들과 붙어서 함께 대궐을 범하고 난동을 일으키는데도 사직을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랴. 무릇 사방의 오랑캐들과 국교를 맺은 이래로 도시와 항구의 중요 이권은 거의 다 저들이 약탈하는 바가 되고 거기에 백 가지 폐단이 들고 일어나 삼천리 강산의 수많은 백성이 흩어지고 원성이 잇따라 들리니 이보다 더 큰 원한이 없도다.
활빈당이 제시한 '대한의 선비와 민중이 고쳐달라고 내건 논설'이라는 뜻의 호소문(1900)

6. 같이 보기



[1] 전라도 지역은 동학농민군 잔당에 대한 색출로 인해 남아있는 세력이 미미하였다.[2] 몰락한 양반[3] 말 그대로 떠돌이 의사라는 의미이다.[4] 활빈당원은 아니었지만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용될 당시 활빈당원[5]을 만나 조직원을 만드는 방법과 조직을 운영하는 방법, 그리고 무술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