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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bbf15><colcolor=#4d2004> 호손 풋볼 클럽 | |||||
Hawthorn Football Club | |||||
창단 | 1902년([age(1902-07-01)]주년) | ||||
정식 명칭 | Hawthorn Football Club | ||||
별칭 | 매(Hawks) | ||||
모토 | () | ||||
연고지 | 빅토리아 주 멜버른 호손 | ||||
홈 구장 |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 유니버서티 오브 태즈메이니아 스타디움 [1] | ||||
연습 구장 | 웨이벌리 파크(Waverley Park) [2] | ||||
라이벌 | 에센던 질롱 노스 멜버른 | ||||
경영진 | |||||
감독 | 샘 미첼(Sam Mitchell) | ||||
주장 | 밴 맥에보이(Ben McEvo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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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기록 | |||||
VFL/AFL 우승 (13회) | 1961, 1971, 1976, 1978, 1983, 1986, 1988, 1989, 1991, 2008, 2013, 2014, 2015 | ||||
정규 시즌 우승 (9회) | 1961, 1963, 1971, 1975, 1986, 1988, 1989, 2012, 2013 | ||||
클럽 기록 | |||||
최다 출전 | 마이클 턱(Michael Tuck) - 426 경기 | ||||
최다 득점 | 제이슨 던스털(Jason Dunstall) - 1254 골 | ||||
브라운로 메달(시즌 최우수) (회) | |||||
놈 스미스 메달 (그랜드 파이널 최우수) (회) | |||||
콜먼 메달(득점왕) (회) | |||||
팀 컬러 / 유니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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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갈색■ |
We're a happy team at Hawthorn
We're the Mighty Fighting Hawks.
We love our Club, and we play to win,
Riding the bumps with a grin (at Hawthorn).
Come what may, you'll find us striving
Team work is the thing that talks,
One for all and all for one
Is the way we play at Hawthorn.
We are the Mighty Fighting Hawks.
We're the Mighty Fighting Hawks.
We love our Club, and we play to win,
Riding the bumps with a grin (at Hawthorn).
Come what may, you'll find us striving
Team work is the thing that talks,
One for all and all for one
Is the way we play at Hawthorn.
We are the Mighty Fighting Hawks.
1. 개요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의 AFL 팀. 멜버른 시 동부근교 호손에 위치한 클럽. 별명인 매는 로이 카잘리(Roy Cazaly) 감독의 연설로 부터 가져왔다. 전통 강호들을 가리키는 빅4와 달리 지난 50여년간 최소한 한번씩은 우승하였다.빅토리아 클럽 중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5만, 7만명의 회원을 돌파한 클럽이기도 한다.
2. 역사
2.1. 창단
"호손"이라는 명칭을 쓰던 클럽은 이미 전부터 존재했지만, 현재의 호손은 알프 코스키(Alf Kosky)라는 자 아래 주변에 있던 여러가지 클럽들을 통합시키면서 1902년에 창단되었으며, 1914년에 VFA 가입하면서 활동하게 된다.다만 1914년까지 여러가지 색을 썼는데, 창단시 푸른 바탕에 흰빨 줄무니를 쓰는 유니폼이였다. 다음 근처의 부룬다라와 결합하면서 검은 바탕에 빨간띠, 그 다음 호손 로버스의 황청을 쓰면서 VFA에 가입했으나, 이미 윌리암스타운이 쓰던 색깔이여서 지금의 갈색-금색으로 바꾸어 쓰게 된다. 그저 그랬던 성적에 불구하고도, 1925년 VFL 가입이 허가되면서 호손은 풋스크레이와 노스 멜버른와 함께 VFL로 이적한다.
2.2. VFL 동네북 시절
VFL로 이적한 호손이였으나 첫 30여년동안 호손은 리그의 동네북이였다. 같이 가입한 풋스크레이는 VFA 최고의 팀이였고 노스 멜버른도 실력은 있던 팀이였다. 하지만 호손은 실력도 역사도 그렇게 길지 않은 팀이여서 실력은 되는 선수들은 있었으나, 첫 17시즌동안 7경기 이상을 낸 시즌이 없었으며, 5위 기록한것 빼고는 보여줄수 있는게 없는 팀이였다.첫 별명은 메이블룸(Mayblooms). 호손이 의미하는 산사나무 꽃이 5월에 펴서 유래한 별명. 하지만 1942년 부임한 로이 카잘리 감독[4]이 "매처럼 싸우라는" 연설로 나온, 강인한 이미지를 위해 매를 클럽 상징으로 선정한다.
2.3. 케네디 왕조
1955년 존 케네디 1세(John Kennedy Snr.)는 클럽 주장으로 임명, 3년 후 감독으로 오른다. 선수로서는 체력, 감독으로서 연설력을 가진 케네디는 열정적인 연설로 선수단을 자극하는데 뛰어났으며 부임한지 2년만에 클럽을 처음으로 시즌 1위로 마감하는 데 성공, 사상 처음으로 그랜드 파이널에 진출.
상대는 풋스크레이. Mr. Football이라는 별명을 지닌 테트 위튼(Ted Whitten) 지휘 아래 7년 전 우승했지만 두번째로 정상에 오르려던 팀이였다. 호손은 전반까지는 풋스크레이에게 밀리다가 후반전에 활약으로 우승을 확인시켜 사상 처음으로 우승하게 된다. 지긋한 30여년을 못에 박았다.
다음해 4강에서 탈락하지만 그 다음해 1963년, 훗날 최고의 라이벌이 될 질롱이랑 맞붙는다. 폴리 파머("Polly" Farmer) 아래 활약하던 질롱에게 밀려서 준우승. 케네디는 감독자리를 주장 그레이엄 아서(Graham Arthur)한테 물려주지만 영 좋지 않은 성적으로 인해 케네디가 다시 감독좌에 않고 파킨, 스콧, 앵거스, 브래머, 허드슨, 매튜스와 나이츠등 선수단을 이끌면서 1971년 24경기중 21경기를 승리하면서 4강 재진출, 세인트 킬다를 상대.
나이츠가 없던 호손은 3쿼터까지 밀리고 있지만 마지막 쿼터에서 10골 중 7골을 넣으면서 역전에 성공. 다시 정점에 서게 된다. 또한 피터 허드슨(Peter Hudson)은 그 해 150골을 넣으면서 밥 프랫(Bob Pratt)이 세운 기록을 동일시키면서 최고의 공격수로서 활약.
세인트 킬다를 이끈 앨런 진스(Allan Jeans)는 몇년후 호손으로 이적하면서 제2왕조를 이끄는 수장이 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젊은 마이클 턱(Michael Tuck)이 데뷔하면서 그는 다음 왕조를 이끄는 선수가 되었다.
다음 2시즌동안 다시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지만, 1975년에는 시즌 1위로 마감, 결승에 다시 진출하면서 상대는 론 바라시(Ron Barassi) 아래 첫 우승을 노리던 노스 멜버른. 하지만 주장 크리민스의 고환암으로 인한 부재 등으로 인해 패배하면서 준우승.
다음해 케네디가 물러선후 몇년전 주장이였던 데이비드 파킨(David Parkin)이 부임. 노스 멜버른에게 준결승에서 패하며 결승에 실패하나 다음해 1978년 다시 노스 멜버른과 붙는다. 막상막하적인 경기속에서 호손은 노스 멜버른 상대로 다시 우승하지만 다음 3시즌동안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한다.
왕조라고 불리지만 결승 진출 이외에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파이널 연속 진출을 1974년에 가서야 가능했기 때문. 게다가 진스 시절 연속 결승 진출과 클라크슨의 3연패라는 업적에 밀리지만, 케네디같은 강인한 지도 아래 스타 선수도 배출했고 현재의 호손의 기반을 둔 시대라고 볼수 있다.
2.4. 진스 왕조
호손의 전설적인 선수단. 왼쪽으로 부터 존 플래튼(John Platten), 제이슨 던스털(Jason Dunstall), 게리 에어스(Gary Ayres), 더멋 브리어턴(Dermott Brereton)과 존 케네디 2세(John Kennedy Jnr.) |
성적 부진으로 인해 파킨은 칼튼으로 넘어가고[5] 호손은 세인트 킬다의 전 감독 앨런 진스(Allan Jeans)를 불러오게 된다. 하지만 그는 5년동안 감독직으로 부터 쉬고 있었다. 1982년 파이널 진출 이후로 그 자리를 잃지 않았고, 13년, 15년중 14년동안 파이널 진출이라는 기록의 기반을 마련해놨다.
1983년에는 1위로 끝내지 않았지만 그랜드 파이널 진출에 성공하고 상대는 에센던. 치열할 라이벌이 될 에센던과의 3연속 결승의 첫 경기. 케빈 시디(Kevin Sheedy) 아래 도약하던, 15년 만에 결승에 진출한 폭격기군단이였지만 가볍게 바르면서 진스 아래 첫 우승을 가져오게 된다.
1984년에 에센던과 다시 붙는다. 에센던은 시즌 1위로 마감했지만 시즌 두 번과 직전 파이널 경기에서 호손 상대로 승리를 내지 못하였고, 경기 3쿼터까지로 호손을 에센던 상대로 5골만 실점하는데 성공한다...하지만 시디는 공격진과 수비진를 바꾸는 전술로 인해 분위기를 못읽은 호손은 9골이나 먹히게 되면서 역전패 준우승을 당하게 된다.1985년에도 풋스크레이 사대로 겨우 결승에 진출하여 에센던을 다시 붙지만 초반부 난투 이후 에센던 위주로 경기가 흘러가 처발리면서 다시 준우승. 브리어턴은 처발린 경기에서도 7골을 득점, 매튜스는 이 경기 이후로 은퇴.
다음해에는 칼튼을 상대. 칼튼과의 2시즌 결승의 첫 경기. 호손은 시즌 1위로 마감했지만 파이널 2번째 경기에서 칼튼한테 결승행을 내주고 피츠로이를 상대로 준결승에서 승리하면서 칼튼을 다시 붙는다. 경기 전 월요일 로버트 디퍼도메니코(Robert DiPerdomenico)는 브라운도 메달을 수상. 칼튼은 지난번 붙었을때와 달리 상대가 안되었고, 그때 활약한 리스존스는 짜이면서 호손은 42점으로 우승. 그 경기 이후 은퇴한 칼튼의 브루스 둘(Bruce Doull)한테 아쉬움을 남겼다.
1986년 VFL 결승전 시상식으로 나온 밥 호크 수상 |
1987년에는 2위로 마감하면서 시드니와, 다음 멜버른을
1988년에는 진스가 병으로 인해 앨런 조이스(Allan Joyce) 지휘 아래, 멜버른을 상대. 작년 통한의 패배를 당한 멜버른은 복수심이 타오랐으나 상대가 안돼 호손은 당시 96점이라는 최고의 점수차로 승라하면서 또 다시 우승.
1989년에 진스는 복귀, 맬컴 블라이트(Malcolm Blight) 지휘 아래 있던 질롱를 상대. VFL/AFL 사상 최고의 결승중 하나라고 불리는 1989년 그랜드 파이널.
하지만 경기가 시작하자 마자 브레르턴은 신장을 부상당하는 등 위협받을수 알았지만 경기 초반은 호손의 우세. 하지만 질롱의 과격함으로 인해 플래튼과 디퍼도메니코 등 중요 선수등이 부상을 지니고 뛰면서 호식축구의 과격함과 용기의 중요성을 보여준 경기. 다만 3쿼터까지 호손은 6골차 리드로 우세를 같고 있고 있었다.
그러나 질롱이 반격을 시작. 마지막 쿼터에 11골중 8을 넣어 골차이로 리드를 줄어놓게 된다. 특히나 신이라고 불리운 사나이 게리 애블릿(Gary Ablett)이 9골을 넣으면서 역전이 가능했나 싶었지만 사이렌은 울리면서 호손은 겨우 명경기 속에서 승리하는게, 처음으로 2연패하는 데 성공한다.
경기 직후 절망하는 애블렛과 환호하는 크리스 랭퍼드(Chris Langford) |
2.5. 추락, 위기와 재활
2.5.1. 1990년대
하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5번의 우승을 기록한 호손도 문제가 생겼다. 우승하면서도 적자가 생겼고, 제대로 된 스폰서를 구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런 적자에 불구하고도 돈을 쓰는든 영광의 추락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만 좋은 시절과 선수단을 보유하고 있어서 다음 3시즌동안 파이널 시리즈 진출은 난무했으나 세번 다 일찍히 탈락하였다. 우선 살살히 세대교체를 시작. 1993년에 조이스는 감독직을 내려놓고, 이후 에어스와 브리어턴은 클럽을 떠난다. 차기 감독은 전 선수이자 주장, 브리즈번 베어즈의 감독이였던 피터 나이츠.다음 해 1995년은 악몽. 시전 중반까지 잘하다가 마지막 7경기[6]를 패배하면서 1981년 이후 파이널 시리즈를 진출 못하게 되고 나이츠는 경질당한다.
후임 켄 저지(Ken Judge)는 7자리 수 적자라는 위기가 있었지만 마지막 경기를 겨우 이기면서 8위로 마감하여 8강내 다시 들어가지만 1위[7] 시드니한테 한골차로 패하면서 탈락. 다음 3시즌동안 파이널 진출에 실패하면서 90년대는 아쉬움의 마크를 냉기고 저지는 그의 고향인 서쪽으로 날라가게 된다. 그리고 1999년 시즌 이후 주 경기장을 웨이벌리에서 MCG로 이적, 같은 해 셰인 크로퍼드(Shane Crawford)는 브라운도 메달을 수상.
다만 더욱더 큰 위기는 멜버른과의 결합이였다. 일명 멜버른 호크스. 두 중산층, 부유층으로 찬 호손과 멜버른은, 재정난에 시달리던 호손과 일치적이지 못한 결과와 시설 문제에 시달리던 멜버른과의 결합은 AFL한테는 좋은 아이디어인가 싶었다.
하지만 결합 추진이 남긴 불안증은 나비효과를 남겼는데, 먼저 그 이후 호손은 적자를 남긴적을 없는데가가 1997년 회원수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리고...훗날 80년대 버금갈 거라는 전성기로 가게 된다
2.5.2. 슈워브 시절
1999년 시즌 끝나고 저지를 대체한 감독은 전 선수 피터 슈워브(Peter Schwab). 일단 첫 부임한해 8강 진출에 그 다음해에는 4위밖에서 준결승까지 가는중 미래는 밝게 보였다. 특히나 2001년 드래프트에서 프리맨틀과 거래와의 결과로 1번선택으로 루크 호지라는 소년과 샘 미첼이라는 청년을 영입. 그 둘은 몇년후 호손의 3전성기를 이끄게 되는 두 기둥이 된다.하지만 2년동안 좋은 결과에 비해 다음 두 시즌은 겨우 8강내 들어가는데 실패. 하지만 실력이 꽤 되는 선수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슈워브는 다음 해 우승할꺼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2004년에는 뒤에서 2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그는 경질, 에센던전 악명적인 난투가 유일한 하이라이트일 정도로 답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2.5.3. 클라크슨 시절
호손은 그 해 말 포트 애들레이드에서 활약하던 앨러스터 클라크슨(Alastair Clarkson)를 부임한다. 먼저 클라크슨은 노장들을 방출시키고 팀의 개혁을 시작, 다음 드래프트에서 재리드 러프헤드, 랜스 프랭클린과 조던 루이스를 선택한다.이듬해 호손은 경기력에는 개선된 모습을 보여줬으나 결과로는 뒤에서 3위로 마감. 그 해 말 호손은 팀 팬이자 빅토리아 주 총리 제프 케넷(Jeff Kennett)을 회장으로 부임. 케넷은 5년내 우승과 5만 회원수 돌파할꺼라는 약속을 하고 태즈메이니아주와 협상에서 일정된 경기 수를 태즈메이니아 론세스턴으로 옮기는 것은 허락하는 등 새로운 스폰서쉽을 받아온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06년 호손은 11위로 시즌을 마감, 다음해에는 8강에 들어가면서, 애들레이드를 극적인 프랭클린 골로 넘고 캥거루즈를 상대하나 논란적인 판정 속에서 패배하면서 마감. 클라크슨의 개혁은 성공적이였으나, 아무도 그들이 우승까지 할꺼라는 생각은 없었다.
2.5.4. 2008년 시즌 - 매의 부활
"내가 말하는 건 이거라고!(That's what I'm talking about!)" 시상식에서 셰인 크로퍼드가 남긴 말. 그는 이 경기 이후 은퇴했으며 이 한마디는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
2008년 AFL 그랜드 파이널 우승팀 호손 호크스 |
먼저 2008년 호손은 초반에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9라운드에 1위로 오르면서 클라크슨과 케넷의 개혁은 성공했다는 증거를 보여줬다. 하지만 후반에는 최고의 포즈의 기록을 보여준 질롱한테 밀렸지만 정규시즌 최종순위 2위라는 기염을 보여준다.
먼저 첫 상대인 웨스턴 불독스를 넘고 준결승에서 세인트 킬다를 이기면서 17년만에 그랜드 파이널로 진출. 상대는 정규시즌 1패밖에 안올린 질롱. 작년 우승팀이였고 깡패적인 선수단을 보유하였으며 모두 질롱의 우승이라는 예상을 남겼다...
...하지만 VFL/AFL 사상 최고의 업셋을 시전한다. 우선 질롱의 공격을 마비시켰고, 호손의 공격진들은 틈을 타 3쿼터에 3골차 리드를 기록, 특히 무게가 많이 나던 듀의 활약으로 리드를 만든다. 마지막 쿼터 호손은 질롱을 제지하면서 10번째 우승을 기록한다. 클라크슨의 개혁은 성공적이였다.
호손은 다음 시즌 거짓스럽게 부진했으며 부상과 출장정지로 인해, 마지막 경기에서 에센던한테 역전패를 내주면서 8강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
2.6. 클라크손 왕조
2.6.1. 3연패
[1] The University of Tasmania Stadium. 태즈메이니아주 론세스턴에 소재한 관중석 규모 21,000명의 노천 경기장으로써 태즈메이니아 대학교 풋볼팀(호주식 풋볼)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원래 이름은 요크 파크(York Park)이다.[2] 원래는 경기를 진행하던, 7만석여 대규모 경기장였다. 그러나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도클랜드 스타디움 건설로 인해 한 스탠드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을 철거. 호손이 여기서 추억이 많은 만큼 지금은 연습구장으로 쓰인다.[3] AFL의 원조 클럽들의 테마송은 자작이 아니기 때문에 원곡이 있다. 원곡은 Yankee Doodle Boy. 유명곡 Yankee Doodle Dandy와 꽤 헷갈리는 편.[4] 선수로서 유명하지만 Up there Cazaly 라는 노래로 더 유명하다.[5] 다만 당시 호손의 홈구장은 칼튼의 프린세스 파크였었다.[6] 특히 브리즈번 원정에서 3쿼터 브레이크에 48점의 리드를 날리고 역전패당한 기점으로 추락. 그 브리즈번은 나머지 한 경기 빼고 다 이기면서 극적으로 첫 파이널 진출.[7] 1994년~99년까지 8강 시스템은 1위 8위등 반대쪽으로 부터 상대하는 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