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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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1543 ~ 1611
1. 개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서 도요토미 정권, 에도 막부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이자 다이묘. 흔히 도요토미 정권의 삼중로(三中老)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2. 생애
2.1. 오다 노부나가 가신 시절
덴분 12년(1543년), 오와리국 니와군의 토호 호리오 야스하루(요시히사 또는 야스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와리 상사군(上四郡)의 슈고다이였던 이와쿠라 오다 가문(오다 이세노카미 가문) 오다 노부야스의 중신이었다.그 무렵 이와쿠라 오다 가문은 분가였던 오다 단조노츄 가문(노부히데, 노부나가)에게 압박을 받고 있었고, 요시하루는 에이로쿠 2년(1559년) 이와쿠라 성 전투에 첫 출진하여 전공을 세웠으나, 이와쿠라 오다 가문이 멸망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낭인이 되었다. 이후 오와리를 통일한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고, 곧 그의 가신이었던 기노시타 히데요시의 휘하에 들었다.
2.2. 하시바·도요토미 가신 시절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각지에서 전투에 참가했으며, 특히 에이로쿠 10년(1567년)의 이나바야마 성 공격에서는 성으로 통하는 비밀 경로의 안내 역할을 맡아 오다군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아사이 가문이 멸망한 후, 덴쇼 원년(1573년)에는 오미국 나가하마 지역에서 100석을 받았다. 이후에도 무공을 세워 하리마국 히메지에서 1,500석, 이후에는 단바국 구로에에서 3,500석으로 증가했다.덴쇼 10년(1582년)의 빗추 다카마쓰 성 공략전과, 혼노지의 변 이후 벌어진 야마자키 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단바국 히카미군 내에서 6,284석을 받았다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가 벌어질 때,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오가키 성에 남아 우지이에 나오미치를 설득해 히데요시를 따라 시즈가타케로 출진하게 했다. 히데요시 본진의 후방 안전을 책임진 요시하루의 역할은 매우 중대했으며, 나오미치를 시즈가타케 출진에 참여하도록 설득한 공적은 크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공적으로 와카사국 다카하마에서 17,000석을 하사받았고, 덴쇼 12년(1584년)에는 20,000석으로 증가했다.
덴쇼 13년(1585년)에는 삿사 나리마사 토벌에 참가했다. 그는 다나카 요시마사, 나카무라 카즈우지, 야마우치 카즈토요, 이치야나기 나오마스 등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로(宿老)로 임명되었다. 또한 와카사국 사가키(현재의 후쿠이현 미카타군 미하마정) 20,000석으로 영지가 옮겨졌고, 불과 60일 만에 다시 오미국 사와야마(현재의 시가현 히코네시 주변)로 40,000석을 받고 이전했다.
덴쇼 15년(1587년)의 규슈 정벌에서도 참전하여 정5위하 타이다이노초(帯刀長) 관직에 올랐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도 참전하였으며, 히데츠구의 지휘 아래 야마나카 성 공략에 참여했다. 이 전투 중 함께 출진했던 장남 가네스케가 전사했다. 오다와라 성이 개성된 이후, 이 전공을 인정받아 관동으로 이봉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영지인 도토미국 하마마쓰 성주로 120,000석을 받았고, 이 무렵부터 히데츠구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이후 히데츠구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 이 외에도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에도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히데요시의 만년에 나카무라 카즈우지, 이코마 치카마사와 함께 이른바 "삼중로(三中老)"로 임명되었다고 그간 널리 알려져 왔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실이었는지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2.3.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요시 사후, 요시하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이시다 미츠나리와 마에다 토시이에 등 反이에야스파와의 조정과 주선을 담당했다.게이초 4년(1599년) 10월 1일, 노령을 이유로 가독을 차남 타다우지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때 이에야스로부터 에치젠 후츄에서 50,000석을 은거료로 받았다. 이는 이에야스가 영지를 하사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했다.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을 위해 출진했을 때 하마마쓰에서 타다우지와 함께 환대하며 스스로 참전하겠다고 요청했지만, 이에야스는 타다우지만 참전하도록 하고 요시하루는 에치젠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같은 해 9월 본 전투에 대신 참전한 타다우지가 전공을 인정받아 이즈모국 도미타에서 24만 석으로 가증 이봉되었다. 요시하루는 비밀리에 오미 및 북국(北国)의 정세를 이에야스에게 보고했다고도 전해진다.
2.4. 에도 시대
게이초 9년(1604년), 아들 타다우지가 요절했다. 가독은 손자 호리오 타다하루가 이어받았으나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요시하루가 후견인을 맡았다. 또한 이 해 인근국 호키국 요나고의 나카무라 가문에서 벌어진 가문 내분(요코타 소동 또는 요나고 소동)에서 나카무라 이타다다의 요청을 받아 병력을 파견, 소동을 진압했다.게이초 16년(1611년), 마쓰에 성을 건설하고 본거지를 이전했으나 곧 6월 17일 사망했다. 향년 6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