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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7:56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

Jorge Eliécer Gaitán
파일:1000007065.png
출생1903년 1월 23일
콜롬비아 보고타
사망1948년 4월 9일 (향년 45세)
콜롬비아 보고타
국적콜롬비아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직업정치인

1. 개요2. 생애3. 사후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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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콜롬비아의 정치인.

2. 생애

노동변호사 출신으로 당시 여당인 콜롬비아 자유당에 입당한 뒤 보고타 시장, 교육부 장관, 노동사회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토지개혁과 주택보급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서 빈민층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자유당 내에서도 비주류에 속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견제를 받았다.

결국 1946년 대선에서 따로 출마했다가 패배하였으나 와중에 보수당 정부가 삽질을 벌이면서 그 반작용으로 가이탄의 지지도가 폭발하여 1위 대권주자로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1948년 미주기구 회의기간 중에 암살을 당했고, 이로 인해 민심이 폭발하면서 보고타에서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3. 사후 여파

이 사건으로 콜롬비아는 자유당 지지자들과 보수당 지지자들간의 내전 상태에 빠졌다. 가이탄 암살범은 사건 직후 분노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전직 CIA 요원 2명이 연루되어 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당시 미국은 중남미에서 좌익 세력이 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견 좌파적으로 보이는 토지개혁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다. 게다가 소작농과 도시빈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토지개혁은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던 중남미의 (친미 성향의) 기득권 대지주들과 해외(주로 미국) 대기업들에게 큰 타격이 될게 뻔했으니.

이런 정황을 감안해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미국 정부, 정확히는 CIA가 개입했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만약 가이탄이 이때 죽지 않고 대통령이 되었다면 개혁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콜롬비아가 장기간 내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콜롬비아 내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 중 하나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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