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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7-02 23:42:22

헬무트 그로스쿠르트

1. 개요2. 생애
2.1. 홀로코스트에 대한 항명
3. 참고 문헌4. 참고 링크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97-017-20,_Helmuth_Groscurth.jpg

Helmuth Groscurth

1. 개요

나치 독일의 군인. 최종 계급은 대령이다.

2. 생애

1898년 12월 16일 뤼덴샤이트(Lüdenscheid)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라인하르트 그로스크루트는 복음주의 교회인 브레멘 성모 교회목사였다. 1942년 2월 18일에 제6군 제11군단의 참모총장이 되었고 그 해 3월 1일에 대령으로 진급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도중 11월 20일에 금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3년 2월 2일에 소련군에 포로로 잡혔으며, 그 해 4월 7일 프롤로보의 임시 수용소에서 병사했다. 그의 아버지 라인하르트는 먼저 죽은 아들의 장례 예배를 집전했다.

그가 남긴 일기는 소련군이 입수하였고 1970년대에 공개하였다. 이 일기는 나치 독일의 만행을 고발하는 증거 중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

2.1. 홀로코스트에 대한 항명

1941년 8월 빌라체르크바 교외에서 일어난 유대인 영유아 학살사건이 있었는데, 1941년 8월 2일~19일 사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아인자츠그루펜 분견대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8-900명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전원에 대한 총살을 집행하면서 임무 편의를 위해 6세까지의 영유아를 부모로부터 격리시켰고, 이들은 부모들이 모두 처형된 후에 똑같이 처형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동안 아이들은 아무것도 못 먹고 있었고 그 괴로움에 울부짖었는데 인근에 주둔하던 독일군들은 이 비명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소속 사단의 군종 목사군종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보고를 받은 사단 지휘부는 상황 확인을 위해 당시 중령이었고 사단 참모장교였던 헬무트 그로스크루트를 현장에 파견했다.

그는 아인자츠그루펜과의 충돌을 각오하고 아이들이 감금된 건물 주위에 병사들을 배치해 아이들의 처형장 이송을 막고 상급부대인 제6군 사령부에 이 사건을 보고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독일 남부집단군 6군 사령관이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는 해당 영유아들에 대한 처우가 부적절하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모든 유대인들의 처형은 필수불가결한 조치이므로 처형 집행 후 이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8월 22일에 나치에 협조하던 해당 지역 우크라이나 민병대에 의해 결국 전원 처형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의 처형을 막지는 못 했고 그는 이 일로 징계를 받게 되었다.

그는 두 번 다시 이런 용기를 내지 못하고 포로로써 사망했지만, 동부전선 독일군 전체를 통틀어서 나치 독일 군인이 홀로코스트에 반대하며 공개적으로 항명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3. 참고 문헌

4. 참고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