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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5-13 20:36:00

헨리 퍼시(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성명 헨리 퍼시
Henry Percy
출생 1449년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레콘필드
사망 1489년 4월 28일 (향년 39~40세)
잉글랜드 왕국 노스요크셔 헴블턴 사우스 칼빙턴
아버지 제3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어머니 엘레노어 포이닝스
형제 앤, 마거릿, 엘리자베스
배우자 모드 허버트
자녀 헨리, 엘레노어, 윌리엄, 앨런, 조셀린, 앤
직위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장미 전쟁 시기 요크 왕조의 편에 섰다가 보스워스 전투에 참여한 뒤 헨리 7세에게 귀순했다. 이후 요크셔에서 일어난 반란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2. 생애

1449년경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레콘필드에서 제3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포이닝스 남작 리처드 포이닝스의 딸인 엘레노어 포이닝스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앤[1], 마거릿[2], 엘리자베스[3]가 있었다. 1461년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서 아버지가 전사한 뒤, 퍼시 가문의 영지와 작위는 에드워드 4세의 명령으로 몰수되었다. 그리고 어린 헨리 퍼시는 체포되어 런던의 플릿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464년부터 런던 탑에 갇혔으며, 1464년 3월 노섬벌랜드 백작의 직함과 땅이 퍼시 가문의 오랜 원수인 네빌 가문의 일원 존 네빌에게 부여되었다.

1469년, 헨리 퍼시는 에드워드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런던 탑에서 풀려났다. 그는 왕에게 아버지의 직위와 영지를 돌려달라고 청했다. 같은 해 북부에서 홀더니스의 로빈이 헨리 퍼시의 권리를 회복할 것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존 네빌에게 패배한 뒤 생포된 후 요크 성벽에서 참수되었다. 1470년, 에드워드 4세는 존 네빌에게 압력을 행사해 노섬벌랜드 백작위를 헨리 퍼시에게 넘기게 했고, 그 대신 몬터규 후작 작위를 수여했다. 헨리 퍼시는 그 외에도 잉글랜드 북부의 많은 중요한 직책도 맡았다. 1473년, 의회는 헨리 퍼시에게 노섬벌랜드 백작령에 대한 권리를 회복해 주었다. 1474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후로 12년간 스코틀랜드 국경의 보안관을 포함한 많은 중요한 공직을 역임했다.

1485년 리처드 3세의 소집령에 응해 군대를 이끌고 온 헨리 퍼시는 그 해 8월 28일 보스워스 전투에 참여했다. 당시 헨리 퍼시는 후방 부대를 지휘했는데, 리처드 3세가 지원 신호를 보냈음에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많은 역사가들은 노섬벌랜드 백작이 리처드 3세를 배신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능선이 비좁아서 그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을 거라고 본다. 즉, 옥스퍼드 백작의 군대와 교전하려면 아군을 뚫고 나아가거나, 측면으로 넓게 돌아가서 공격해야 했는데,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해서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리처드 3세가 전사하자, 헨리 퍼시는 영지로 철수했다.

그 후 헨리 퍼시는 제3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서리 백작 토머스 하워드와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몇 달 만에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풀려났으며, 이전의 작위와 영지를 회복했다. 그러나 1489년 4월 초대 에그리몬트 남작 토머스 퍼시사생아인 존 에그리몬트가 에그리몬트 남작령을 돌려받지 못한 것에 반감을 품고, 무거운 세금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4월 28일, 에이튼 출신의 로버트 챔버라는 자작농이 이끄는 반군이 노스요크셔 햄블턴의 사우스 칼빙턴에서 헨리 퍼시를 사살했다. 그의 유해는 요크셔의 베벌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1444~1522, 로든의 토머스 헝거퍼드 경과 초혼, 로렌스 레인스퍼드 경과 재혼, 토머스 본 경과 삼혼.[2] 1447~?, 윌리엄 기스코인의 부인[3] 1460~1512, 볼튼의 제6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스크루프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