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한장호(韓章鎬) |
생몰 | 1893년 5월 1일 ~ 1994년 2월 6일 |
출생지 |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 |
사망지 | 미국 시카고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장호는 1893년 5월 1일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에서 부친 한창정(韓昌禎)과 모친 창덕(昌德)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3년 조선을 탈출하여 상하이로 망명했고, 1916년 3월 미국행을 결심하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으며, 1917년 2월 5일 흥사단에 입단했다. 이후 8월 29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와 함께 다뉴바에서 열린 국치기념일에서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였다.1919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곽용주·김도준·김영·이상기·이용근·이용선·김정진·김창만·이근영·이초·변준호·신윤국·최능진·최응선·장병훈 등 23명과 함께 <취지서>를 발표하고 대한인국민회 청년혈성단 결성에 참여하였다. 청년혈성단의 결성 목적은 3·1 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고, 한국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상·학술상의 기예를 배워 기여하며, 한국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모든 해독물을 박멸하는 데 있었다.
이후 1919년 6월 10일부터 청년혈성단에 참여할 한인 청년 모집을 위해 새크라멘토, 윌로우스, 맥스웰, 스톡턴 등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을 순회하였으며, 독립을 위해서는 비행 기술을 익혀야겠다고 판단하고 1919년 12월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수업료 600달러는 쌀 농사를 경영하던 김종림이 후원했다.
1920년 6월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한장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윌로우스에 설립한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에 부교관으로 합류했으며, 비행 훈련을 수행하는 한편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 학생 16명과 함께 대한인비행가구락부를 결성해 장차 도래할 항공전을 준비하려 했다.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는 대한인비행가양성소로 변경되었으나, 1920년 7월 노백린이 상하이로 떠난 후 지도력의 부재와 1920년 11월 대홍수로 인해 지원이 끊어지면서 1921년 4월 문을 닫았다.
1924년, 한장호는 캔자스시티에서 한인 친목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933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1935년, 1939~1942년 시카고지방회의 집행위원장, 1938년, 1943년 구제위원, 1944년 대표원, 1945년 집행위원장 겸 서기로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를 이끌었다. 또한 1935년 3월 20일 시카고지방회 주최로 이동휘 선생 추도회를 개최하였고 매년 5월 1일 순국선현추도회를 개최하며 민족 독립을 위한 일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리고 1916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 독립금 등의 면목으로 독립운동 지원을 수차례 수행했다.
8.15 광복 후, 그는 1948년 10월 6일 미주흥사단위원부 초대 의사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후 시카고에서 조용히 지내다 1994년 2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한장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