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청주 한씨[1] |
출생 | 1895년 |
함경도 정평군 중주이사 신성리[2] (현 함경남도 함주군 운봉리) | |
사망 | 1921년 11월 |
러시아 연해주 칼리닌그라드 이만 | |
묘소 | 러시아 연해주 칼리닌그라드 이만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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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운용은 1895년 함경도 정평군 중주이사 신성리(현 함주군 운봉리)에서 아버지 한석봉(韓錫琫, 1860 ~ ?)과 어머니 정선 전씨 전봉국(全鳳國)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중국 저장성 항저우에서 체육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입대하여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19년 난징에서 이용(李鏞), 채영 등과 협의 끝에 일제에 맞서 무장 투쟁을 벌이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했다. 1921년 1월 러시아 치타시 극동국 한인부가 한인 무장 부대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설립한 전한임시군사위원회의 군사전문단에 선출되어 전한의병대회를 준비했다.
1921년 3월 중순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개최된 전한의병대회에서 전한군사위원회 군사위원에 선임되었고,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주도로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와 대립했다. 한운용은 고려혁명군정의회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1921년 5월경에 일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이후 연해주 이만시로 이동한 그는 이만시에 근거지를 둔 군비단과 협의하여 1921년 9월 고려의용군사의회에 참여했다. 한운용은 고려의용군사의회 참모부원이자 사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했고, 고려의용군사의회 산하 부대로 이용이 사령관을 역임한 대한의용군의 2중대장을 맡았다.
1921년 11월 일본군과 러시아 백위군이 하바롭스크를 향해 진군하자,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함께 이만을 방어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했다. 일본군과 러시아 백위군의 공세를 피해 후퇴하는 과정에서 한운용 중대는 고립되었고, 본대를 향해 이동하던 중 이만역에 주둔한 적 부대와 마주쳤다. 한운용 중대는 일시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곧이어 증원된 적군과 재차 전투를 벌이다 한운용을 포함한 50여 명의 부대원 중 마춘걸 등 3명을 제외한 47명이 전사했다.
한운용 선생 장례식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한운용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