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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2:00:09

한귀재

파일:한귀재.png[1]
성명 한귀재(韓貴才)
이명 한재진(韓在珍)
생몰 1911년 2월 2일 ~ 1980년 12월 2일
출생지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장룡리
사망지 전라남도 완도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귀재는 1911년 2월 2일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장룡리에서 태어났으며, 1930년 무렵 경성부 창신동에 거주했다. 그는 1931녀 1월 서울 종로에서 김기범(金基範), 진옥진(陳玉振) 등과 함께 일전에 일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던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을 재조직하고 조직부를 담당하여 고학당 및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산학교에서 독서회를 조직한 후 이를 통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 경찰이 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일으켜 검거 선풍을 일으킬 때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완도군으로 귀향하여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후 고금면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여 좌익 활동을 전개하다 1946년 미군정 포고령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남로당에 가담했다가 탄압당했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조선인민군에 의해 감금된 우익 인사들의 석방에 앞장섰으며, 이후에는 완도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0년 12월 2일에 사망했다.

한귀재는 공산주의계 인사였고 남로당에서 활동한 경력 때문에 2005년, 2006년, 2015년에 걸친 3차례 서훈 심사에서 탈락되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그가 일시적으로 좌익 활동을 했지만 6.25 전쟁 때 우익 인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한국에 정착한 것으로 파악하고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931년,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