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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14 21:51:23

하인츠 크뤼겔

독일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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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하인츠 크뤼겔
Heinz Krügel
출생 1921년 4월 13일
바이마르 공화국 오버플라니츠[1]
사망 2008년 10월 27일 (향년 87세)
독일 마그데부르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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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SG 플라니츠 (1948~1949)
BSG 포르트슈리트 크리미차우 (1949~1950)
감독 포어베르츠 라이프치히 (1951~1953)
SC 로타치온 라이프치히 (1954~1956)
SC 엠포어 로스토크 (1957~1959)
동독 대표팀 (1959~1961)
SC 헤미 할레 (1961~1966)
1. FC 마그데부르크 (1966~1976)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4. 은퇴후5. 여담

1. 개요

독일의 前 축구선수이자 감독이다. 1. FC 마그데부르크의 레전드이자 동독 축구클럽의 유일한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이끈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바이마르 공화국 오버플라니츠에서 태어나 6살의 나이에 지역 축구팀 플라니처 SC[2]에 입단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선수 경력은 제대로 쌓지 못했다.

1940년 무장친위대에 입대해 5 SS기갑사단에서 1944년까지 발칸반도의 대공포 부대에서 복무했다. 이후 소련의 포로로 잡혀있다 1946년에야 독일로 돌아올수 있었다.

1951년 무릎부상으로 인해 29살의 젊은 나이에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3. 감독 경력

1951년 새로 창단된 SV 포어베르츠 라이프치히의 새로운 감독직에 선임되었다. 1953년 팀의 연고지가 강제로 동베를린으로 이전되자 그대로 라이프치히에 남았고, SC 로타치온 라이프치히의 감독직에 부임했다. 1955년 DDR 오버리가 3위를 차지했으나 그 다음시즌 부진하며 팀을 떠났다.

1957년 갓 오버리가에서 강등된 SC 엠포어 로스토크 감독직에 부임했다. 2부리그 DDR-리가에서 디나모 베를린에 이은 2위를 차지하며 팀을 승격시켰고, 이후 2시즌간 팀을 오버리가 중위권에 안착시켰다. 이를 눈여겨본 동독의 높으신 분들은 크뤼겔을 동독 대표팀 감독직에 선임했다.

동독 대표팀에서 8경기를 지도한 끝에 카롤리 쇼시에게 감독직을 넘겨줬다.

1961년 SC 헤미 할레 감독직을 맡았고, 1962년 FDGB-포칼에서 우승하며 감독경력 첫 타이틀을 따냈다. 1964-65시즌 2부리그로 강등되었지만 팀에 남아 다시 1부리그로 승격시켰고, 1965-66시즌이 끝나고 팀을 떠났다.

3.1. 1. FC 마그데부르크

1966년 2부리그로 강등되어있던 1. FC 마그데부르크 감독직에 선임되었다. 부임하자마자 팀을 오버리가로 승격시켰고, 이후 감독직 경력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승격직후시즌 리가 3위를 달성하더니 이듬해인 1969년 FDGB-포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대에만 리가우승을 3회 차지했고(1972, 1974, 1975) 1973년에 포칼우승도 1회 더 차지했다. 그리고 1974년 UEFA 컵위너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마그데부르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감독이 되었다.

이 기간동안 총 7명이 동독 국가대표팀 승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1976년 갑작스럽게 동독 축구 협회로부터 평생 코치활동 금지라는 중징계를 받게 된다. 이유는 마그데부르크 올림픽 대표팀의 부진이었다. 당연히 이는 명목상의 이유이고, 실제 이유는 당시 크뤼겔이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지도부가 자신의 업무에 간섭하는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또 1974년 유러피언 컵 16강 FC 바이에른 뮌헨전 하프타임에 당시 뮌헨 감독 우도 라테크와 대화를 나눈것이 슈타지에게 도청되었고, 여기서 협회 관계자들에게 '동서 화해자' 라는 누명이 씌워졌다고 한다.

결국 동독 정권에 의해 동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감독은 1976년 감독생활을 은퇴하게 된다.

4. 은퇴후

은퇴후에도 마그데부르크에서 임시 단장, 조언가 등의 직책을 맡으며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2008년 10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5. 여담

2009년 1. FC 마그데부르크의 홈구장인 슈타디온 마그데부르크 앞의 광장이 하인츠 크뤼겔 플라츠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21년 과거에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단 자체적으로 나치 독일에서 크뤼겔이 한 전쟁범죄가 있는지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1] 츠비카우시의 행정구역이다.[2] 이후 동독 치하에서 FSV 츠비카우에 합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