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슈툴파우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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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축구감독 | ||
<colbgcolor=#eee,#191919> 이름 | 하인리히 슈툴파우트 Heinrich Stuhlfauth | |
출생 | 1896년 1월 11일 독일국 바이에른 왕국 뉘른베르크 | |
사망 | 1966년 9월 12일 (향년 70세) 독일 바이에른 주 뉘른베르크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84cm 85kg | |
직업 | 축구선수(골키퍼, 하프백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191919> 선수 | 1. FC 뉘른베르크 (1916~1933) |
감독 | 뷔르츠부르거 키커스 (1932~1933) TSV 1861 스트라우빙 (1932~1933) | |
국가대표 | 21경기(독일 / 1920~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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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선수.2. 생애[1]
2.1. 어린 시절
슈툴파우트는 금속 공장 노동자인 아버지 카를과 어머니 바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뉘른베르크 남부에서 살았으며 처음에는 사이클 선수가 되려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2.2. 선수 생활
슈툴파우트는 FC 프랑켄 뉘른베르크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공격수였다. 그러다 나중에 키가 크다는 이유로 골키퍼로 포지션을 바꾸었다.[2] 1911년에 FC 애로우 뉘른베르크에서 뛸 때는 하프백이었고, 1916년 애로우 뉘른베르크가 해체되면서 자동차 공장에 일자리를 얻음과 동시에 모든 선수 시절을 보낼 1. FC 뉘른베르크로 팀을 옮기게 된다.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슈툴파우트는 뉘른베르크 최고의 스타로 성장했고, 1920년 최초로 A매치에 소집되었을 때는 뉘른베르크 최초로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였다. 그의 활약은 리그에서도 뛰어나서 뉘른베르크에 5회 독일 챔피언을 안겨주었다. 이 당시 뉘른베르크는 말 그대로 깡패팀이었는데 1918년부터 1922년까지 104경기에서 무패 행진을 달리는 동안 480득점을 올리면서 47골만 실점하는 현재 축구계에서는 절대 불가능할 기록을 썼다. 물론 경기당 0.5가 안되는 실점율의 바탕에는 슈툴파우트의 활약이 있었다. 그리고 1922년의 끝나지 않는 결승전[3]에도 참가한 이력이 있다.
1929년에는 19번째 A매치에 출전하면서 오이겐 키프의 독일 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을 갈아치웠고 6경기에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2.3. 이후
은퇴한 이후 슈툴파우트는 뉘른베르크의 올드 멤버 협회에 가입했고, 2차 대전 초기에는 잠시 병사로 폴란드 침공에 참가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 세발두스클라우스에 있던 슈툴파우트의 펍이 파괴되었고 전후에는 학교 체육 교사로, 로열 더치 쉘의 축구 교육 영화에 참여하기도 했다.1953년에는 뉘른베르크 클럽의 미국 투어에 참여하여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는 이 순간이 생의 정점이었다고 회고했다. 1956년에는 키커에서 선정한 가장 인기 있는 축구 선수에 뽑히기도 했다. 1960년에는 뉘른베르크 시로부터 메달을, 1966년에는 서독 정부로부터 명예 작위를 수여받았다.
슈툴파우트는 196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슈툴파우트는 현역 시절 스페인의 명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와 비교되었다. 1929년에는 이탈리아 신문으로부터 마치 '신이 골문 앞에 서 있는 듯하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듣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엄청난 반사 신경으로 독일의 승리를 이끌어냈다.또한 그는 발 기술이 뛰어나고 모험적인 플레이도 즐겨서 종종 제3의 수비수[4]라는 평가를 들었다. 20미터 정도를 달려와서 공격수보다 앞서 공을 처리하는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홈구장의 18 블록, 클럽하우스, 거리에 그의 이름이 명명되어있고, 2010년의 인터넷 투표에서는 안드레아스 쾨프케에 이어 뉘른베르크의 20세기 올스타 골키퍼 부문 2위에 올랐다.
4. 뒷이야기
- 슈툴파우트가 2차 대전 이전에 운영했던 바는 뉘른베르크의 명소였다. 이 곳에서 그는 딕시 딘, 키커의 창업자 발터 벤스만을 비롯하여 많은 배우, 축구 선수, 정치인들을 만났다.
- 슈툴파우트는 뉘른베르크 클럽의 큰 팬이어서 뉘른베르크가 친선 경기에서 지는 것조차 수치로 생각했다.
- 리카르도 사모라가 그랬던 것처럼 슈툴파우트도 경기를 뛸 때 회색 터틀넥과 플랫 캡을 주로 착용했다.
5. 어록
이 도시, 이 클럽에서 플레이하는 것 그리고 뉘른베르크에서 사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은 길이 남고 위대한 뉘른베르크는 절대 침몰하지 않으리.[5]
Es ist eine Ehre, für diese Stadt, diesen Verein und die Bewohner Nürnbergs zu spielen. Möge all dies immer bewahrt werden und der großartige FC Nürnberg niemals untergehen.
Es ist eine Ehre, für diese Stadt, diesen Verein und die Bewohner Nürnbergs zu spielen. Möge all dies immer bewahrt werden und der großartige FC Nürnberg niemals untergehen.
6. 수상
6.1. 클럽[6]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5회: 1919–20, 1920–21, 1923–24, 1924–25, 1926–27
- 남부 독일 리그 우승 7회: 1916, 1918, 1920, 1921, 1924, 1927, 1929
- 오스트크레이스리가 우승 2회: 1916, 1918
- 북부 바이에른 크라이스리가 우승 2회: 1920, 1921
- 베르치르크스리가 바이에른 우승 3회: 1924, 1925, 1927
- 북부 바이에른 베르치르크스리가 우승 3회: 1929, 1932, 1933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3회: 1933, 1938, 1941
6.2. 개인
-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08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동시대 메이저리그 레전드들인 월터 존슨과 베이브 루스도 기량뿐만 아니라 큰 키로 유명했다. 그들의 키는 186, 188cm었고 슈툴파우트도 당시로서는 드문 184cm의 장신이었다.[3] 당시 뉘른베르크의 상대는 함부르크 SV였는데 189분간의 혈투에도 2대2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건 날이 어두워져서 시합이 더 이상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한달 후 재경기에서도 1대1로 승부가 나지 않았고, 뉘른베르크 선수 4명이 부상과 퇴장으로 경기를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처음에는 함부르크의 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심한 반발에 부딪혔고 함부르크가 타이틀을 반납하여 지금도 우승자는 공석으로 남아있다.[4] 슈툴파우트가 뛰던 때에는 골키퍼 앞에 2명의 풀백진이 수비라인을 구성했다.[5] 이 문구는 뉘른베르크 팬들에게 매우 유명한 어록으로 매 홈경기마다 막스 몰록 슈타디온의 전광판에 비춰지며 많은 팬들이 이 문구가 새겨진 티를 입고 다닌다. 2009-10 시즌에는 아예 저지에 이 문구를 새기려 했으나 독일 축구 연맹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다.[6] 슈툴파우트는 1. FC 뉘른베르크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클럽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