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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5:07:30

하를렘 공방전

파일:하를렘 공방전.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스페인군3.2. 네덜란드 반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72년 12월 11일 ~ 1573년 7월 12일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의 스페인군과 리페르다 남작 위그볼트가 이끄는 네덜란드 반군이 하를렘의 지배권을 놓고 맞붙은 공성전. 스페인군이 7개월이 넘는 공성전 끝에 가까스로 승리했지만,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2. 배경

1572년 9월 19일, 알바 공이 이끄는 스페인군은 3개월간의 몽스 공방전을 치른 끝에 몽스 시를 공략했다. 빌럼 판 오라녀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스페인에게 반기를 들었던 네덜란드 남부 도시들은 재빨리 태도를 바꿔 알바 공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알바 공은 빌럼을 지원했던 도시들에 무거운 벌금을 매기고 빌럼이 수비대를 남겨둔 도시인 메헬렌을 철저히 약탈하여 병사들에게 밀린 봉급을 지급했다. 그 후 알바 공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베르헨, 쥐트펀, 나르덴에 별다른 저항 없이 입성한 뒤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그는 다음 목표로 하를렘을 선정했다.

하를렘은 암스테르담에서 10마일 떨어진 도시로, 무거운 과세에 시달리고 농민 폭동이 빗발쳐서 식량이 부족해져 갈수록 쇠락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기들을 수탈하기만 하지 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스페인과 가톨릭 교회를 불신했다. 1566년 성상 파괴 운동이 네덜란드 전역을 휩쓸 때 하를렘은 동참하지 않았지만, 주민 대다수는 1572년 무렵 칼뱅파로 개종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이 가까이 이르자, 그들은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 하를렘은 성벽이 낡고 방어력이 떨어져서 막강한 스페인군을 막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에 하를렘 치안 판사 3명이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알바 공과 만나 항복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그 사이 수비대 지휘관인 리페르다 남작 위그볼트는 저항 의지를 불살렸다. 그는 시민과 군인들을 시장에 불러모아서 "우리가 항복한다면, 베르헨, 쥐트펀, 그리고 나르덴과 같은 운명에 처할 거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빌럼에게 맹세했던 충성을 절대로 저버리지 말자고 호소했다. 군인과 시민들은 그의 호소에 응했고, 만장일치로 끝까지 도시를 사수하기로 맹세했다. 암스테르담으로 갔던 치안 판사들 중 한 명은 낌새를 채고 암스테르담에 머물렀지만, 나머지 2명은 하를렘으로 돌아오다가 체포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암스테르담에 남은 치안판사는 도시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종용하는 편지를 전했지만, 편지를 전한 이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를렘 시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자, 알바 공은 아들인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게 도시 공략을 명령했다. 이리하여 파드리케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1572년 12월 11일 하를렘 시 인근에 도착하면서, 하를렘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스페인군

3.2. 네덜란드 반군

4. 전투 경과

하를렘 시 포위가 벌어지기 전, 주민들은 빌럼의 지시에 따라 도시 성벽 바로 앞의 얼어붙은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 소규모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스페인군이 도시의 낡은 성벽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시민들은 12월의 짧은 낮과 긴 밤 내내 썰매를 타고 얼어붙은 호수를 왕래하며 식량을 확보했다. 도시 수비대는 약 1,000명의 선원 또는 개척민, 그리고 3,000명의 전투원으로 구성되었다.

이중에는 칼, 머스킷 총, 단검으로 무장한 300명의 여군이 있었다. 이들의 지휘관은 케누 시몬스도흐터 하셀라에르(Kenau Simonsdochter Hasselaer)였다. 그녀는 47세의 미망인으로, 전쟁 전에는 일찍 죽은 남편을 대신해 조선소를 운영했다. 그녀는 300명의 여인을 이끌고 성벽 위에서 남자들과 함께 싸웠다. 특히 스페인군이 쏜 대포로 인해 성벽이 무너질 때마다 밤낮으로 성벽을 재건하고 흙을 옮겼다고 한다. [1]

스페인군이 하를렘 시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하자, 빌럼은 구원 작전에 착수했다. 12월 중순 레이던에 약 4000명의 병력을 집결한 빌럼은 하를렘을 향해 진격했지만 폭설이 쏟아져서 앞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 스페인 분견대의 역습을 받고 패퇴했다. 천여 명의 네덜란드 병사가 전사했고, 수백명은 포로로 끌려가 하를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리 설치된 교수대에서 목이 졸려 죽었다. 하지만 수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항전 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스페인군이 매일 포격을 퍼부었지만, 시민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틈새를 수리했다. 그들은 모래자루, 돌덩이, 흙수레, 심지어 성인들을 묘사한 조각상까지 손에 잡히는 거라면 모조리 틈새에 내던졌다.

12월 21일, 파드리케는 병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스페인 장교 로메로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함성을 지르며 성벽으로 달려들었다. 수비대는 즉시 머스킷총을 발사하고 검을 휘둘렀으며, 무거운 돌멩이와 끓는 기름, 횃불 등을 퍼부었다. 로메로는 이 공격에서 한쪽 눈을 잃는 중상을 입었고, 스페인 병사 300 내지 400명이 피살되어 무너진 성벽 틈새를 메꾸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결국 스페인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그들은 그제서야 도시를 공략하는 게 예상처럼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 빌럼은 하를렘 시를 구원하기 위한 또다른 구원군을 소집하여 부관 바텐베르크 지휘하에 7개의 대포와 수레를 갖춘 2천 명의 병사들을 조직했다. 그들은 하를렘 시 인근까지 진군했지만, 안개가 짙게 깔리고 성읍이 완전히 어둠에 싸여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그때 스페인군이 역습을 가했고, 구원군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오직 수백 명만이 가까스로 하를렘 시에 들어올 수 있었다. 스페인군은 구원군 부지휘관이었던 데 코닝 대위를 사로잡은 뒤 그의 머리를 베고 입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은 서신을 물게 한 뒤 하를렘 성벽으로 쏘아 보냈다.
"이것은 하를렘 시를 위해 지원군을 이끌고 가는 데 코닝 대위의 머리다."

그러자 수비대는 11명의 스페인 포로들의 머리를 잘라서 통에 넣은 뒤, 통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은 후 스페인군 진영에 던졌다.
"이 10개 머리는 알바 공이 매긴 10페니 세금 지불용이다. 이자로 1 페니 추가했다."

파드리케는 일단 성벽 앞에 설치된 작은 요새부터 공략하기로 하고, 그곳에 공격을 집중했다. 그러나 수비대는 스페인군의 공세를 모조리 막아냈다. 이에 땅굴을 파서 도시 밑에 들어가려 했지만, 시민들이 이를 눈치채고 땅굴을 파묻어버리면서 무산되었다. 그러던 1573년 1월 28일, 빌럼이 파견한 400명의 베테랑 군인들이 얼어붙은 호수를 통해 하를렘 시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들은 썰매를 타고 건너갔는데, 많은 양의 밀가루와 빵을 가지고 왔다.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빌럼에게 했던 충성 맹세를 재차 다짐했다.

파드리케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재차 총공세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흘간 포격을 가하게 한 뒤, 1월 31일 자정에 작은 요새를 총공격했다. 보초병들은 경보를 울리며 성벽을 용감하게 방어했고, 수비대와 시민들은 곧바로 일어나 온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악착같이 공격한 끝에 마침내 작은 요새를 장악하였고, 뒤이어 성벽을 기어올라갔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대포로 가득찬 견고한 석조 벽이 서 있었다. 스페인군이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머뭇거리는 사이, 수비대는 방금 빼앗긴 요새를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요새는 곧 굉음과 함께 파괴되었고, 수많은 장병들이 죽어나갔다. 결국 스페인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패주했다.

두 번째 총공세 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파드리케는 도시를 포위하여 굶겨죽이기로 결정했다. 스페인군은 그의 지시에 따라 도시를 에워싸는 참호를 파며 조금씩 좁혀 들어갔다. 그러나 극심한 추위와 식량 부족, 전염병으로 인해 수많은 장병이 죽어나가, 겨울 동안 절반 이상이 죽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파드리케는 이 상태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부친 알바 공에게 전령을 보내 하를렘 시 포위를 풀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알바 공은 전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 파드리케에게 전하여라. 그가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포위 공격을 지속하기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더이상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그가 포위전을 치르다 죽으면, 내가 대신 할 것이다. 우리 둘다 죽으면, 내 아내, 공작 부인이 스페인에서 와서 포위전을 지속할 것이다."

1573년 2월 말 해빙이 시작되자, 암스테르담에서 조직된 스페인 함선들이 도시 봉쇄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바다의 거지들'이 그들을 막아서며 보급망을 지켰고, 하를렘 시는 꿋꿋이 버텼다. 3월 25일, 수비대는 적의 전초기지를 습격하여 300개의 장막을 불태우고 800명의 스페인군을 죽였으며, 7문의 대포와 많은 식량을 실은 수레를 노획했다. 습격대는 위풍당당하게 귀환하였고, 시민들은 스페인군을 향해 "하를렘은 스페인 사람들의 묘지다!"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를렘 시의 숨통이 더욱 좁혀졌다. 알바 공이 파견한 3개의 베테랑 연대가 스페인 진영에 도착했고, 스페인 함대의 숫자도 증폭되었다. 이후 양측 함대는 하를렘 호수에서 수 차례 교전하였고, 1573년 5월 28일 결정적인 해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완승을 거두어 적선 22척을 포획하고 나머지 함대를 완전히 격파했다. 스페인 해군은 여세를 몰아 시민들이 호수 가장자리에 세워뒀던 요새까지 공략하였다. 이리하여 하를렘 시는 호수를 통해 보급을 받을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윽고 식량이 바닥나자, 하를렘 시민들은 고양이, 개, 쥐, 말, 소를 모조리 잡어먹었고, 가죽 신발, 잡초, 쐐기풀 등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모조리 먹어치웠다. 하루에 수십명씩 굶어죽었고, 많은 이가 굶주림에 지쳐 움직이기도 힘들어 했다. 하지만 그들은 빌럼이 반드시 구원해주리라 믿고 계속 버텼다. 7월 3일 스페인군이 재차 포격을 가했고, 성벽이 심하게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스페인군은 성안에 진입하지 않았고, 시민들은 힘겹게 성벽을 재건했다. 시민 한 명이 야음을 틈타 포위망을 탈출하여 빌럼에게 도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다.

빌럼은 어떻게든 하를렘 시를 구하기 위해 사방을 돌아다녔다. 용병대는 승산이 없는 전투에 응하지 않았지만, 약 4천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호응했다. 그는 직접 이들을 이끌고 하를렘 시로 가려 했지만, 주민들은 네덜란드 시민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그가 목숨을 내던져서는 곤란하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결국 빌럼은 부관 바텐베르크에게 지휘권을 양도하였고, 바텐베르크는 7월 8일 해질녁에 출발하여 자정이 될 무렵에 하를렘 시 남쪽의 숲에 도착했다. 빌럼은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비둘기를 통해 하를렘 시에 전했다.

그러나 빌럼이 날린 비둘기 중 두 마리가 스페인 병사가 쏜 총에 맞아 떨어지면서, 모든 계획이 탄로나고 말았다. 스페인군은 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바텐베르크의 무리가 조심스럽게 숲을 빠져나오려 할 때 급습했다. 바텐베르크는 전사하였고, 4천 시민들은 패주했다. 이 소식을 접한 빌럼은 하를렘 시를 구할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주민들에게 최선의 방식으로 적에게 투항하라고 권고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수비대는 파드리케에게 사절을 보내 도시를 약탈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청했고, 파드리케는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다. 이리하여 1573년 7월 12일, 하를렘 시 성문이 개방되고 스페인군이 입성하면서, 7개월간의 공성전은 막을 내렸다.

5. 결과

파드리케는 도시에 입성한 뒤 약속대로 약탈하지 않았지만, 그 대가로 거액의 몸값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오래도록 곤경에 빠뜨렸던 도시를 철저히 응징했다. 모든 수비대는 독일인 600명을 제외하고 처형되었고, 400명의 주요 시민도 처형되었다. 수비대 지휘관 리페르다 남작은 부관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고, 여러 귀족 및 치안판사 300명이 손과 발이 묶인 채 호수에 내던져졌다.

이리하여 파드리케는 하를렘 시를 손에 넣었지만, 그 대가는 컸다. 이 공성전에서 스페인군은 10,000명이 넘는 병사를 잃었다. 게다가 7개월이 넘는 시간을 잡아먹으면서, 아직 공략되지 않은 도시들이 방어 준비를 완료하였다. 또한 그가 하를렘 주민과 수비대에게 학살을 자행했다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도시들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설상가상으로, 펠리페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군자금을 지중해로 전용하면서, 용병들에게 지급할 급료가 바닥났다.

이에 용병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파드리케는 이들을 진압하느라 공세를 단시일에 재개할 여력이 없었다.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한 뒤, 파드리케는 공세를 재개하여 8월 21일 알크마르 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10월 8일까지 이어진 알크마르 공방전은 스페인군의 패배로 끝났고, 빌럼은 적이 쇠약해진 틈을 타 대반격에 착수한다.


[1] 현재 그녀의 이름인 '케누(Kenau)'는 여장부라는 뜻의 네덜란드 단어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