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숙형(叔亨) |
호 | 회봉(晦峯), 외재(畏齋) |
본관 | 진주 하씨[1] |
출생 | 1870년 1월 28일 |
경상도 진주목 대각면 사곡동 (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2] | |
사망 | 1946년 8월 7일 |
경상남도 진주군 | |
묘소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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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하겸진은 1870년 1월 28일 경상도 진주목(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서 부친 하재익(河載翼)과 모친 김해 허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11대조는 남명(南冥) 조식의 문인이며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된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이며, 조부는 만취헌(晩翠軒) 하학운(河學運)이다. 하겸진은 어려서부터 자질과 성품이 남달라 5살 때 조부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다. 그가 6살이던 때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이 두류산에 왔다가 하학운을 찾아뵈었는데, 이때 어린 하겸진을 한번 보고 그가 어린 나이에도 조숙하고 학문에 밝은 걸 보고 기특하게 여겨 두류산이란 제목으로 시를 읊게 했다. 그러자 하겸진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왕봉을 우러러 보니(仰看天王峯)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것 같구나(疑是撑天柱)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것 같구나(疑是撑天柱)
박치복은 이 시를 보고 매우 놀라며 "이 아이는 장대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고 칭찬했다. 이후 13살 때에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널리 학습하고 글쓰는 데에도 재주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유림들 사이에 오르내렸다. 27살 때 거창의 다전으로 나아가 곽종석을 배알하고 자신이 집필한 <도문작해(陶文酌海)>의 서문을 써줄 것을 부탁한 뒤 곽종석을 스승으로 섬겼다. 또한 그는 후산(后山) 허유(許愈)를 스승으로 삼고 심학(心學) 연구에 매진했다. 한편, 그는 박치복, 김도화, 이만도, 이승희(李承熙), 김진호(金鎭祜), 윤주하(尹胄夏), 하용제, 박규호(朴圭浩), 이수안((李壽安) 등과 널리 교유하면서 학문을 강론했다.
하겸진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안동, 선산, 성주 등지를 유림했고, 뒤이어 명산대천과 동서남 해안 일대, 명승고적을 유람했다. 그는 나중엔 공자, 맹자, 주자의 묘까지 순례하려 했지만 만주까지 갔다가 정세가 어지럽자 조선으로 되돌아왔다.
2.2. 저술 활동
하겸진은 의병 활동에 부정적인 스승 곽종석의 뜻에 따라 의병 제의를 모두 뿌리치고 산야에 은거했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망하더라도 학통 만은 보전해야 한다고 생각해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주어절요(朱語節要)> 10권을 편찬했고, <도문작해(陶文酌海)> 6권을 집필했으며, <명사강목(明史綱目)> 18권에 주석을 달았다.41세 때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대성통곡한 뒤 문을 닫아걸고 일체의 왕래를 끊었으며, 48살 때 간재(艮齋) 전우가 곽종석이 양명학과 비슷한 학설을 설파한다며 비판한 것에 대응하고자 <성사심제론(性師心弟論)>을 저술해 심성설에 대한 논쟁을 정리했다. 그리고 한국의 유현들의 학문과 연원을 체계있게 정리한 <동유학안(東儒學案)> 30권을 저술했으며, 곽종석의 심성론을 정리한 <심위자모설(心爲字母說)> 5편을 지었고, 만년에는 <동시화(東詩話)>를 출간했다.
한편, 하겸진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기의 한민족의 얼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해동명장열전(海東名將列傳)>을 집필해 한국사의 명장들을 서술함으로서 한국인들이 자긍심을 가지도록 유도했고, 한국인의 정신 계발을 위한 <국성론(國性論)> 3편을 편찬했다.
2.3. 독립운동
1919년, 스승 곽종석이 전국유림대표로 137인의 서명을 받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게 되자, 그는 기꺼이 독립청원서에 서명했다. 이일로 진주경찰서 순사들에게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3일부터 7월 10일까지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57세 때이던 1925년, 곽종석의 제자 김창숙이 이회영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여 만주-몽고 접경지에 황무지를 구입하기로 하고 유림들을 상대로 모금활동을 벌인 제2차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에서 9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하겸진은 거듭된 옥고로 몸이 쇠약해져 집안에 틀어박혀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제자들을 불러 자신에게 세 가지 한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일생동안 주공, 공자, 자사, 맹자, 정자(程子), 주자를 숭모하였음에도 그 성현의 유적을 살피지 못하고 죽음에 임한 것이다.
둘째, 선배들의 분분한 성리설(性理說)을 통일하여 불멸의 진전(眞詮)을 후생들에게 명시하지 못한 것이다.
셋째, 이 나라가 왜로(倭虜)의 학정에 시달린지 30년이 넘었건만 생전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으려 하는 것이다.
둘째, 선배들의 분분한 성리설(性理說)을 통일하여 불멸의 진전(眞詮)을 후생들에게 명시하지 못한 것이다.
셋째, 이 나라가 왜로(倭虜)의 학정에 시달린지 30년이 넘었건만 생전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으려 하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고 8.15 광복을 맞이해 한스러움을 풀게 되었다. 광복 후 백범 김구가 귀국하고 얼마 안 있어 하겸진을 찾아와 인사를 드렸고 하겸진이 세운 덕곡서당의 편액을 직접 써주기도 했다.[3]
그 뒤 1946년 8월 7일에 별세했다. 사후 유해는 덕곡서당(德谷書堂)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하겸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