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1:42:40

필리프 다르투아

파일:Philippe D'artois_Comte d'eu.jpg
이름 필리프 다르투아
Philippe d'Artois
출생 1358년
프랑스 왕국 아르투아
사망 1397년 6월 16일
오스만 술탄국 미할리치크
아버지 장 다르투아
어머니 이자벨 드 멜룬
형제 잔, 장, 로베르, 샤를, 이자부
아내 마리 드 베리
자녀 샤를, 필리프, 본, 카트린
직위 외 백작, 프랑스 무관장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외 백작, 프랑스 무관장.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으며, 아프리카 원정에도 참여했다. 1396년 헝가리 십자군에 가담했으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생포된 뒤 아나톨리아로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병사했다.

2. 생애

1358년경 외 백작 장 다르투아와 멜룬 자작 장 1세 드 멜룬의 딸인 이자벨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잔[1], 장[2], 로베르 4세, 샤를[3], 이자부[4]가 있었다. 1383년 프랑스군이 헨리 르 디스펜서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플란데런 원정에 착수할 때 참여해 베르그와 부르부르를 공략할 때 공적을 세웠다.

1386년, 알랑송 공국의 시종인 장 드 카루주와 종자인 자크 르 그리가 서로 분쟁을 벌인 끝에 결투 재판을 벌였다.[5] 그는 자크 르 그리의 증인을 맡았고, 생폴과 리니 백작 발레랑 3세 드 뤽상부르리니는 장 드 카루주의 증인을 맡았다. 결투 재판 결과, 장 드 카루주가 자크 르 그리를 처단했다.

1387년 4월 6일, 아버지 장 다르투아가 사망했다. 당시 두라초 공작 카를로의 딸인 두라초의 조안나와 결혼한 뒤 두라초 공작을 맡고 있던 형 로베르 4세가 외 백작이 되었지만, 그해 7월 20일에 중독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6] 그 후 필리프가 외 백작이 되었다.

1388년 장 2세 르 맹그르예루살렘 순례에 참여해 1389년 1월 다마스쿠스에 도착했다가 그들을 첩자로 의심한 맘루크 왕조에 의해 의해 체포되어 카이로로 끌려가 4개월간 복역했다.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뒤 시나이 반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수개월간 지냈지만, 베이루트에서 또다시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가까스로 풀려난 그들은 10월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1390년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과 함께 튀니지를 거점으로 삼고 지중해 각지를 약탈하는 무어인 해적을 토벌하기 위한 제노바 공화국십자군에 가담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했다. 1392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 의해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1396년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의 호소에 따라 오스만 술탄국을 상대하는 십자군에 여러 프랑스 기사들과 함께 참가했다. 십자군은 남하하면서 라호브에 거주하던 무슬림을 학살하는 등 기세 등등했다.

그러나 군주와 귀족들이 한데 섞인 십자군은 불분명한 지휘체계로 인해 작전 진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지기스문트와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미르체아 1세 등은 튀르크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낸 뒤 그동안 그들과 수많은 격전을 치러봤던 왈라키아 보병대가 전방에서 적을 묶어두는 동안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의 기사단이 출격해 적의 측면과 후방을 강타하는 전술을 제시했다. 그러나 필리프 등 프랑스 기사들은 자기들이 먼저 튀르크군의 정면으로 돌격하겠다고 고집했다. 급기야 미르체아 1세와 지기스문트가 공적을 빼돌리려 든다는 비난마저 일었고, 결국 두 사람은 기사단의 뜻대로 하게 했다.

이후 1396년 9월 25일부터 28일까지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는 십자군의 재앙이었다. 기사단은 무작정 돌격했다가 압도적인 수의 적군에게 포위되어 궤멸되었고, 후방에 남겨진 십자군 역시 승기를 탄 튀르크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때 생포된 필리프는 아나톨리아의 미할리치크로 끌려갔다가 중병에 걸려 1397년 6월 16일에 사망했다. 사후 프랑스로 이송되어 외에 있는 노트르담에생로랑 대성당 지하실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1353 ~ 1420년 이후, 드뢰 백작 시몽 드 투아르의 부인[2] 1355 ~ 1363, 요절[3] 1359 ~ 1368, 요절[4] 1361 ~ 1379, 미혼으로 사망[5] 두 사람의 분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피에르 2세 달랑송 항목 참조.[6] 당대 기록에 따르면, 나폴리와 헝가리 국왕 카를로 3세의 왕비였던 마르게리타의 사주로 독살당했다고 한다.[7]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다르마냐크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