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필리포 인자기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2. 클럽 경력
2.1. 피아첸차 칼초
인자기는 동료 축구 선수이자 친동생인 시모네 인자기와 함께 고향 클럽 피아첸차 칼초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10대였던 1991년, 세리에 C1에 속해있던 알비노레페로 임대 이적하며, 21경기에서 13골을 넣었다. 1993년, 세리에 B의 엘라스 베로나에서 뛰며 36경기에서 13골을 넣었다. 피아첸차로 돌아온 후, 37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넣으며 팀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2.2. 파르마 AC
1995년 파르마 AC로 이적하여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으나, 파르마에서 뛴 15경기 동안 단 2골만을 득점하였다. 이후 그는 아탈란타로 이적한다.1995-96 시즌: 22경기(선발 9경기) 4골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15 | 7 | 8 | 2 | 0 |
컵위너스컵 | 6 | 2 | 4 | 2 | 0 |
코파 이탈리아 | 1 | 0 | 1 | 0 | 0 |
합계 | 22 | 9 | 13 | 4 | 0 |
2.2.1. 아탈란타 BC
비록 1년이라는 잠깐의 시절을 보냈지만 당시 아탈란타가 세리에 A 34경기 11승 11무 12패 44득점 46실점으로 리그 10위를 기록했는데 인자기 혼자서 33경기 24골. 코파 이탈리아까지 합산하여 계산하면 34경기 25골이라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을 보여준 덕분에 아탈란타는 꼴찌를 면했고 인자기는 생애 처음이자 유일하게 카포칸노니에레[1]를 차지했다.
참고로 아탈란타가 세리에 A에 있었을 때 단일 시즌 팀 최고 득점자가 인자기였다.[2] 한동안 이 기록을 경신한 사람이 나오지 않다가 2018-19 시즌 두반 사파타가 28골을 넣어 경신하고 2020-21 시즌 루이스 무리엘이 26골을 넣어 인자기의 기록은 3위로 내려갔다.
1996-97 시즌: 34경기(선발 33경기) 25골 3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3 | 32 | 1 | 24 | 3 |
코파 이탈리아 | 1 | 1 | 0 | 1 | 0 |
합계 | 34 | 33 | 1 | 25 | 3 |
2.2.2. 유벤투스 FC
이 때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로 이적하였다. 그는 델 피에로, 지단과 함께 환상적인 공격진을 구축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는 1997-98 시즌 스쿠데토를 차지하였으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0-1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1997-98 시즌: 46경기(선발 41경기) 27골 9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1 | 29 | 2 | 18 | 6 |
챔피언스 리그 | 10 | 10 | 0 | 6 | 1 |
코파 이탈리아 | 4 | 1 | 3 | 1 | 1 |
수페르코파 | 1 | 1 | 0 | 2 | 1 |
합계 | 46 | 41 | 5 | 27 | 9 |
1998-99 시즌에는 인자기 본인은 총 20골을 득점하며 여전히 세리에 정상급 스트라이커로서 존재감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나, 정작 팀은 리그 개막을 앞두고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라치오에게 패하며 좋지 않은 시작을 보이더니, 최종적으로 리그 7위에 그쳐 디펜딩 챔피언답지 않은 행보로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1998-99 시즌: 42경기(선발 39경기) 20골 2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8 | 25 | 3 | 13 | 1 |
챔피언스 리그 | 10 | 10 | 0 | 6 | 1 |
코파 이탈리아 | 1 | 1 | 0 | 0 | 0 |
수페르코파 | 1 | 1 | 0 | 0 | 0 |
플레이 아웃 세리에 A | 2 | 2 | 0 | 1 | 0 |
합계 | 42 | 39 | 3 | 20 | 2 |
이후 2시즌 동안 준수한 활약으로 팀의 UEFA 인터토토컵 우승과 2년 연속 리그 2위 달성을 도왔다.
1999-00 시즌: 43경기(선발 40경기) 26골 7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3 | 32 | 1 | 15 | 4 |
유로파 리그 | 4 | 2 | 2 | 3 | 1 |
코파 이탈리아 | 2 | 2 | 0 | 1 | 1 |
인터토토컵 | 4 | 4 | 0 | 7 | 1 |
합계 | 43 | 40 | 3 | 26 | 7 |
2000-01 시즌: 34경기(선발 30경기) 16골 4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8 | 24 | 4 | 11 | 4 |
챔피언스 리그 | 6 | 6 | 0 | 5 | 0 |
합계 | 34 | 30 | 4 | 16 | 4 |
유벤투스에서의 통산 기록은 165경기 89골.
2.2.3. AC 밀란
유벤투스에서 122경기 동안 58골을 넣었음에도 2001-02 시즌, 새로 영입된 트레제게에게 밀려 팀을 떠나게 된다. 2001-02 시즌 리피의 개혁의 일환으로 내쳐진 유벤투스의 필리포 인자기를 밀란 구단주인 베를루스코니가 사재 7,000만 유로를 풀어 AC 밀란으로 영입하나, 인자기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시즌의 절반 동안 뛰지 못하였다. 하지만 부상에서 복귀한 뒤 부터는 4-1-2-1-2 포메이션에서 셰브첸코와 함께 투톱으로 뛰며 밀란의 공격진을 이끌었고, 2002-03 시즌 코파 이탈리아와 챔피언스 리그 우승, 2003-04 시즌 스쿠데토를 차지하였다.
2001-02 시즌: 28경기(선발 26경기) 16골 5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0 | 19 | 1 | 10 | 4 |
유로파 리그 | 7 | 6 | 1 | 4 | 1 |
코파 이탈리아 | 1 | 1 | 0 | 2 | 0 |
합계 | 28 | 26 | 2 | 16 | 5 |
2002-03 시즌: 49경기(선발 43경기) 30골 10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0 | 27 | 3 | 17 | 6 |
챔피언스 리그 | 14 | 12 | 2 | 10 | 4 |
코파 이탈리아 | 3 | 2 | 1 | 1 | 0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2 | 2 | 0 | 2 | 0 |
합계 | 49 | 43 | 6 | 30 | 10 |
2003-04 시즌: 28경기(선발 21경기) 7골 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14 | 11 | 3 | 3 | 1 |
챔피언스 리그 | 8 | 6 | 2 | 2 | 0 |
코파 이탈리아 | 3 | 2 | 1 | 2 | 0 |
UEFA 슈퍼컵 | 1 | 1 | 0 | 0 | 0 |
인터컨티넨탈컵 | 1 | 0 | 1 | 0 | 0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 1 | 1 | 0 | 0 | 0 |
합계 | 28 | 21 | 7 | 7 | 1 |
2004-05 시즌: 15경기(선발 5경기) 1골 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11 | 4 | 7 | 0 | 1 |
챔피언스 리그 | 2 | 1 | 1 | 1 | 0 |
코파 이탈리아 | 2 | 0 | 2 | 0 | 0 |
합계 | 15 | 5 | 10 | 1 | 1 |
|
2년 전 패배를 설욕하다. |
2005-06 시즌: 31경기(선발 21경기) 17골 7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3 | 16 | 7 | 12 | 6 |
챔피언스 리그 | 6 | 4 | 2 | 4 | 0 |
코파 이탈리아 | 2 | 1 | 1 | 1 | 1 |
합계 | 31 | 21 | 10 | 17 | 7 |
2006-07 시즌: 37경기(선발 23경기) 11골 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0 | 11 | 9 | 2 | 0 |
챔피언스 리그 | 10 | 8 | 2 | 4 | 1 |
코파 이탈리아 | 5 | 2 | 3 | 3 | 0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2 | 2 | 0 | 2 | 0 |
합계 | 37 | 23 | 14 | 11 | 1 |
2008년 2월 24일 인자기는 팔레르모와의 경기에서 득점하였는데, 이는 리그에서 1년 만에 기록한 것이다.
2007-08 시즌: 29경기(선발 20경기) 18골 4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1 | 14 | 7 | 11 | 3 |
챔피언스 리그 | 5 | 4 | 1 | 4 | 1 |
FIFA 클럽 월드컵 | 2 | 1 | 1 | 2 | 0 |
UEFA 슈퍼컵 | 1 | 1 | 0 | 1 | 0 |
합계 | 29 | 20 | 9 | 18 | 4 |
2008-09 시즌: 32경기(선발 21경기) 16골 3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6 | 15 | 11 | 13 | 3 |
유로파 리그 | 6 | 6 | 0 | 3 | 0 |
합계 | 32 | 21 | 11 | 16 | 3 |
2009-10 시즌에는 노쇠화와 전술 변화로 인해[3] 거의 경기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적 루머가 간간히 나오기도 하는데 루머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현실. 맨체스터 시티에서 링크가 있다는 루머였다. 이에 인자기 본인은 밀란에서 은퇴한다고 못박았다.
2009-10 시즌: 33경기(선발 9경기) 5골 2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4 | 4 | 20 | 2 | 2 |
챔피언스 리그 | 7 | 3 | 4 | 2 | 0 |
코파 이탈리아 | 2 | 2 | 0 | 1 | 0 |
합계 | 33 | 9 | 24 | 5 | 2 |
2010-11 시즌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 4차전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2골을 몰아치며 역시 수페르 피포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첫 번째 골은 역시 인자기스러운 골이 터졌다. 게다가 두 번째 골은 혼자만 잔디색이 다른 곳에 앞서 있었던 대놓고 오프사이드였는데 오심으로 득점 인정되었으나 레알 선수들에게조차 별로 항의를 안 받았다. 워낙 스타일이 오프사이드 라인과 함께 살아온 양반이라 현역 시절 오프사이드에 관해선 '인자기가 곧 오프사이드고 오프사이드가 곧 인자기다', '인자기가 오프사이드 아니라 하면 아닌거다'라는 시쳇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2010-11 시즌: 9경기(선발 1경기) 4골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6 | 1 | 5 | 2 | 0 |
챔피언스 리그 | 3 | 0 | 3 | 2 | 0 |
합계 | 9 | 1 | 8 | 4 | 0 |
어쨌든 이후 주로 백업 멤버로 활약하였지만, 2010년 5월 21일 2011년 6월 30일까지의 1년 연장 계약을 하였지만 팔레르모전에서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사실상 시즌 아웃. 그리고 결국 5월 11일, 편지를 남겨 AC 밀란과의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다음은 그 편지.
- [ 펼치기 · 접기 ]
- >지금 이 편지에서 여러분이 읽으시게 될 여러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여러분이 꼭 알아주셨으면 하는 내용은 단 하나입니다. 저는 "우리"를 위해 뛰었고, 또 뛰었다는 것. 감정을 공유하지 않은 채로 경기하고 승리를 거두는 데에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이루었습니다. 함께 소망하고, 고통받고,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한 마음으로 각종 우승 트로피며 스쿠데토를 여러 번 들어 올렸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렸고,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밀라니스타 여러분, 기억하시겠지요. 제가 밀라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여러분은 제 이적을 몰랐습니다.
저는 호텔방에 몸을 숨긴 채 되도록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제 모습이 보이면 유벤투스와 밀란 간의 거래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적이 성사된 후 첫 몇 주, 첫 몇 달간 여러분은 저라는 사람에 대해 점차 알아나갔고, 우리는 함께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에 빠졌지요. 토리노전, 그 날 밤. 여러분들은 화가 나 있었습니다.
피치 위에서는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여러분들은 침묵에 잠겨 있었습니다. 저는 조끼를 벗고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절 향해 보내주신 함성이 그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고, 챔피언스리그를 향한 길을 틔워 주었으며
결국 이는 맨체스터에서의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2004~5년간 부상 문제로 앤트워프에서 재활할 때 저에게 격려를 보내 준 모든 분들,
그리고 제 생일날이기도 했던 2006년 8월 9일,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를 상대로 챔피언스 리그 본선 진출권을 땄던 그 날 우리 모두가 함께 겪었던 가슴 떨림.
이 모든 기억들은 제 마음속 한 구석에 늘 간직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테네, 축구가 저에게 준 최고의 선물.
이는 저와 여러분이, 즉 우리가 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우리를 막을 수 없는 건 단 하나도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꾸었던 가장 아름다운 꿈보다도 더 멋진 현실이었습니다.
리버풀을 상대로 이스탄불에서의 패배 후 단 2년 만에 두 골을 넣으면서 일곱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룬다는 것.
운명은 우리 자신이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오늘 저는 진심을 다해 베를루스코니 회장님과 갈리아니 단장님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준 자극을 통해 저는 한계를 넘어서 더 강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가 뛰었던 모든 팀의 모든 선수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저는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밀란에게 감사합니다. 축구에게 감사합니다. 모두 내 사람들이고 내 것이라고 감히 불러봐도 될까요.
밀란이라는 팀. 보드진 직원들, 밀라넬로의 직원들, 의료팀, 스타디움, 라커룸,
이적이 발표되었던 일요일 유니폼을 흔드는 제 모습을 지켜보며 제가 넣을 골들을 생각하며 몸이 떨렸던 모든 서포터 여러분.
안첼로티 감독님, 안녕히. 그와 함께 저는 모든 대회를 우승했습니다.
저를 따라 전세계를 누볐던 저의 팬들께도, 안녕히. 과거와 현재에 저와 함께했던 제 멋진 동료들도 모두, 안녕히.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저의 가족에게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 시모네와 조카 토마소. 가족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절대로 올 수 없었을 겁니다. 언제나 저의 힘인 사람들.
사랑하는 저의 팀 밀란을 떠납니다.
여러분도 아시듯,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까. 이제 때가 왔으니까.
필리포 인자기.
그리고 5월 13일(한국시간) 세리에 A 38R 노바라와의 은퇴 경기[4]에서 후반 22분 교체 투입되어 15분 만인 후반 37분에 오프사이드 트랩을 절묘하게 돌파하며 자신의 마지막 경기를 지극히 인자기스러운(...) 골로 장식하였다.#[5] 그야말로 전설의 전설다운 마무리.
AC 밀란에서의 통산 기록은 300경기 126골.
2011-12 시즌: 9경기(선발 1경기) 1골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7 | 0 | 7 | 1 | 0 |
코파 이탈리아 | 2 | 1 | 1 | 0 | 0 |
합계 | 9 | 1 | 8 | 1 | 0 |
위는 경기 관련 영상. 1분 3초부터 국내 팬들에게는 일명 밀란 할아버지로 유명한 해설자가 다른 선수들의 골에는 평범하게 반응하다가 인자기의 골이 터지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감격하다 못해 오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밀란 팬들에게 인자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2.2.4. 유럽 클럽 대항전
인자기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해트트릭을 두 번 기록[6]한 첫 번째 선수이다. 첫 번째 해트트릭은 디나모 키이우와의 1997-98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서였고, 두 번째 해트트릭은 2000년 9월 13일에 있었던 함부르크와의 1차 조별 리그 경기에서였다. 또한 밀란에 가서는 2002-03 챔피언스 리그에서 10골을 기록해 득점 2위에 오르기도 했다.2007년 11월 6일에 벌어진 샤흐타르 도네츠크와의 경기에서 챔피언스 리그 개인 통산 62호골, AC 밀란에서의 33호 골을 기록하였다. 2007년 12월 4일에 셀틱과의 경기에서 또 득점하여 63골을 기록하였다. 이 골로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적인 선수 게르트 뮐러를 제치고 유럽 클럽 대항전 통산 골 기록 선두에 올라섰다.
2010년 시점에서 유럽 클럽 대항전 통산 70골로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였던 라울 곤살레스와 유럽 클럽 대항전[7] 최다 득점 기록을 두고 경쟁했었다.[8][9]
밀란 자체가 그런 것도 있지만 인자기가 현역일 때 바이에른 뮌헨을 무척이나 잘 잡았다.(4승 2무, 5경기 출전 6골)
3. 국가대표 경력
인자기는 1997년 6월 8일,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그 후 그는 1998 프랑스 월드컵, 유로 2000, 2002 한일 월드컵, 2006 독일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특히 유로 2000에서는 조별 리그 터키전과 8강 루마니아전에서 골을 넣어 조국의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속적인 무릎 부상은 선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유로 2004에서는 부상으로 출전이 좌절된다. 그럼에도 그는 부상을 딛고 2006 독일 월드컵 최종 명단에 당당히 포함되는데 성공했고, 본선 조별 리그 E조 3차전 체코과의 경기에 교체 출전하여 체흐 골키퍼를 농락하며 쐐기골을 기록, 조국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하였다.[10] 이후 2007년 8월 22일, 헝가리와의 친선 경기[11]를 끝으로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감했다.인자기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57경기 25골을 기록해 아돌포 발론체리,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와 함께 통산 득점 공동 6위에 올랐다.
[1] 세리에 A 득점왕.[2] 세리에 B 시절을 계산하면 26골을 기록한 지오바니 가도니가 있다.[3] 2006 독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공격적인 축구를 유도하기 위해 오프사이드 규칙을 완화했다. 그런데 수비하는 입장에선 라인을 올려 오프사이드 트랩을 쓰는 이점이 사라졌기 때문에 라인을 깊숙히 뒤로 물리고 안전하게 지키는 형태가 대세가 되었고, 이는 고전적인 '득점 기계'들이 몰락하고 대신 제로톱이 대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4] 네스타와 가투소도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밀란을 떠났다.[5] 3분 16초부터 보면 된다.[6] 모두 유벤투스 소속이었을 때 세운 것이다.[7]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인터토토컵 + UEFA 슈퍼컵[8] 다만 불행하게도 인자기는 시즌 중반을 넘기기 전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 라울은 챔스에서 날아다니다 보니 현재는 라울에게 많이 추월당한 상태다. 인자기 70골, 라울 76골. 지금은 둘 다 유럽 대항전 무대에서는 빠져 있기 때문에, 한동안 저 기록이 계속될 것이다. 2024년 현재 챔피언스 리그 최다 득점자와 유럽 클럽 대항전 최다 득점자 타이틀은 모두 호날두가 가지고 있다.[9] 하지만 챔피언스 리그 득점만 치면 둘의 격차는 꽤 벌어지게 된다. 라울은 챔스로 한정해도 71골로 여전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카림 벤제마에 이어 5위에 랭크되어 있지만 인자기는 챔스 기록만 치면 46골로 에우제비우와 함께 공동 13위까지 밀려나버린다. 그래도 인자기는 모든 유럽 클럽 대항전 통산 득점 순위 6위를 기록하고 있고, 이탈리아 국적 선수들로 한정하면 1위에 해당된다.[10] 다만 이 경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벤치를 지켰다.[11] 전반전 45분 동안 뛰었으며 경기는 1-3으로 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