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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13:50:01

프레스티-라고야


1. 개요2. 이다 프레스티3. 알렉산드르 라고야4. 여담

1. 개요



프레스티-라고야(Presti-Lagoya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디스코그스 아이콘.svg)는 이다 프레스티(Ida Presti, 1924. 05. 31 - 1967. 04. 24, 42세 파일:스포티파이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디스코그스 아이콘.svg 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 알렉산드르 라고야(Alexandre Lagoya, 1929. 07. 29 - 1999. 08. 24, 70세 파일:스포티파이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디스코그스 아이콘.svg 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 부부가 1952년에 결성한 프랑스의 클래식 기타 이중주다. 이다 프레스티가 1967년에 북미 순회공연 도중 갑작스레 사망하여 해체되었다. 프레스티, 라고야는 엄지쪽 살로 탄현하는 대다수의 클래식 기타 연주자와는 달리 새끼쪽 살로 탄현했다. 둘은 결혼으로 이어진 만남 전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었지만 우연히 연주 기법, 스타일이 비슷했다. 결혼 이후에도 이중주로 활동하며 교차현 트릴(Cross-string trill) 주법을 창안하는 등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켜나갔다.[1]

2. 이다 프레스티

이다 프레스티는 음악가, 교사로 활동한 프랑스인 부친 클로드 몽타뇽(Claude Montagnon, ???? ~ 1939), 이탈리아인 모친 올가 로-프레스티(Olga Lo-Presti) 아래 프랑스 쉬렌(Suresnes)에서 태어났으며 이베트 이다 몬타뇽(Yvette Ida Montagnon)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부친은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연주회에서 깊게 감동하여 딸을 훌륭한 기타리스트로 키우기로 결심했다. 부친은 악기를 연주하지 않았으나 딸을 가르치기 위해 기타를 공부했으며 프레스티는 부친 외에 스승을 두지 않았다. 부친의 교육은 강도가 높았고 프레스티는 “나는 어린시절이 없었다(I never had a childhood)”며 당시를 회상했다. 재능은 빠르게 만개하여 여덟 살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했으며, 열 살에 처음으로 파리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열세 살에는 안드레스 세고비아 앞에서 연주했는데, 세고비아는 “다른 어떤 기타 연주자의 조언도 듣지 마라(never listen to the advice of any other guitarist)”는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이 사망하여 소녀 가장이 되었고, 졸지에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혹독한 공연 일정을 감당해야 했다. 열아홉 살에 헨리 리가우드(Henry Rigaud)와 결혼하였고 딸 엘리자베스 프레스티(Elisabeth Presti)를 낳았으며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 이혼했다. 알렉산드르 라고야와 재혼하여 1967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중주로 활동했으며 실베인 라고야(Sylvain Lagoya)를 낳았다. 남편과 함께 연주뿐만 아니라 기타 교육 활동 또한 병행하였으며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죽기 전날 오후에 세인트루이스 교향악단과 공연한 이후 밤에 병증을 보여 진찰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심각한 증상이 없었다. 다음날 비행기 안에서 증상이 재발해 응급실로 실려갔으며 수술 도중 폐에서 종양을 발견했다. 하지만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고 수술대 위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줄리안 고메즈 라미레즈(Julián Gómez Ramírez), 로베르 부셰의 악기를 사옹했다. 장고 라인하르트와 친분이 있었다.[2]

3. 알렉산드르 라고야

알렉산드르 라고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 부친, 이탈리아인 모친 아래 이집트에서 나고자랐다. 여덟 살부터 음악을 공부했으며 열세 살에 첫 공연을 가졌고, 열다섯 살에는 기타와 음악이론을 가르쳤다. 독주자로서 경력을 쌓다 1947년에 파리로 이주하여 파리 에콜노르말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50년에 이다 프레스티를 만나 1952년에 결혼한 이후 아내가 사망한 1967년까지 이중주로 활동했다. 아내가 사망한 이후에도 기타 교육을 계속하였으나 5년 동안 혼자서 연주하지 못했다. 1972년부터 독주자로서의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플루트 연주자 장 피에르 랑팔과 자주 합주했다. 1967년부터 1994년까지 파리국립고등음악무용원에서 기타를 가르쳤다. 사별 이후 모넬레 라고야(Monelle Lagoya)와 재혼하였으며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3]

4. 여담


[1] IDA PRESTI, 42, DEAD; CONCERT GUITARIST RECITAL OFFERED BY GUITAR TEAM; Alexandre Lagoya and His Wife, Ida Presti, Heard in Town Hall Program Music: For Two Guitars; Ida Presti and Alexandre Lagoya Play Wide-Ranging Program in Town Hall Alexandre Lagoya Dies at 70; Innovative Classical Guitarist[2] Presti, Ida (1924–1967)|The life of Ida Presti[3] Alexandre Lagoya One half of a guitar duo that set new standards[4] Nice는 영어 어휘 나이스가 아니라 프랑스의 지명 니스를 의미한다.[5] Isabelle Pres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