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 Frederick Townsend Ward | 華飛烈 | |
출생 | 1831년 11월 29일 |
미합중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 |
사망 | 1862년 9월 22일 (향년 30세) |
대청국 절강성 자계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고등학교 퇴학 |
직업 | 용병 |
소속 | 프랑스 제2제국, 청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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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Frederick Townsend Ward)는 미국의 군인이자 태평천국 운동 당시 청조가 설립한 상승군의 전신이자 서양 용병단 양창대에서 복무한 것으로 유명한 용병이자 지휘관이다.2. 유년기와 교육
1831년 11월 29일 매사추세츠 세일럼에서 태어났다. 워드는 어렸을 때 반항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1847년 그를 학교에서 자퇴시키고 자신의 친구가 운용하는 상선 해밀턴 호에서 2등 항해사로 일하게 했다. 워드는 고참들보다 윗자리에 있었던 대다 그의 성격이 무모하고 대담했기 때문에 고참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았지만 선장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1847년 워드는 해밀턴 호를 타고 홍콩에 입항하여 그의 인생 최초로 중국 대륙에 오게 되었다.
1849년 워드는 버몬트의 미국문학과학군사학원[1]에 입학하고 군사 전술, 전략, 훈련과 행사에 대해 배웠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학교를 다니지 않게 되었고, 1850년 아버지가 선장으로 있는 상선 러셀 클로버호의 1등 항해사가 된다.
3. 필리버스터링
1850년대 선원으로 일하던 워드는 필리버스터[2]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 유명한 멕시코의 윌리엄 워커 밑에서 일했고 그에게서 용병의 충원, 훈련, 지휘에 대해 배웠다.1854년 프랑스군 대위로 크림 전쟁에 참전하여 실전 전술도 배웠고, 1857년에는 정식 용병이 되지만 한동안 증기선에서 일했다.
4. 상하이 입성
1860년 워드와 그의 형제는 상해에 아버지의 뉴욕 사무실을 보좌하러 입국한다. 그러나 명분만 아버지를 보좌하는 것이었지 실제로는 1850년대에 윌리엄 워커가 했던 것처럼 불순한 목적을 갖고 중국에 입국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워드의 형제가 상하이에서 평범하게 사업을 개척하는 동안 워드는 포함 공자[3]호의 선장을 맡아 장강에 들끓었던 수적을 토벌했다[4].그렇게 공자호를 이끌며 뛰어난 지휘력과 중국인에 대한 친화력으로 명성을 쌓게 된 워드는 상하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태평천국 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는데, 상해의 서양인과 청 상인들은 태평군의 상하이 침공에 대비하여 용병을 조직하는 것에 착수했는데 수적 토벌 뿐만 아니라 중남미에서의 육상전 경험도 풍부했던 워드는 가장 강력한 용병대장 후보였다.
워드도 이런 분위기를 알아내고는 열심히 상해 기득권과 연줄을 형성했고, 1860년 봄 드디어 상하이의 호상들이 워드를 용병대장으로 하는 용병대를 창립했다. 워드는 상하이 항만을 돌아다니며 인력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아 양창대(洋槍隊)를 결성하였다.
5. 양창대
그렇게 도무지 청병만으로 상해의 방어를 장담할 수 없던 상해에 서양인 용병대가 만들어졌으나, 그 실상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인력은 제명된 선원, 탈영병, 노숙자, 뜨내기, 실업자 등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서양 열강의 지원도 예상만큼 크지 않았는데,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대항하기 위해 지나치게 서양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서양 열강 또한 만약 상해가 태평천국에 함락될 경우 중립을 지키지 않은 댓가로 열강의 이권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다.이렇게 시작부터 삐걱거렸지만 워드는 무기와 인력을 어떻게든 준비시켜 1860년 6월 100여명의 용병단을 육성하지만, 질이 낮은 인력을 훈련시킬 시간도 없이 상해 측의 조급한 요구로 전투에 참전해야 했다.
첫 전투는 송강(松江) 전투였다. 양창대는 포격 지원조차 없이 태평군이 철저하게 방어하던 송강을 공격해야 했고, 역시 참패하여 상해로 돌아가야 했다. 워드는 마닐라인을 주축으로 한 추가 인력과 대포 여러 문을 구입해 7월 중순 다시 송강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양창대 또한 250명의 병력 중 62명이 전사하고 워드를 포함한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5]. 그러나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은 뒤에도 워드는 높은 봉급을 제시하며 어떻게든 부족한 머릿수를 채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양창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괴멸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1860년 8월 2일 양창대는 상해를 향한 길목인 청포(靑浦)에 위치한 태평군의 진지를 격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청포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인근에 매복한 태평군의 기습 공격으로 양창대는 10분도 되지 않아 절반을 손실했고 워드 자신도 총탄에 왼쪽 턱부터 오른쪽 뺨까지를 뚫리는 중상을 입었으며, 양창대는 겨우 후퇴할 수 있었다. 워드는 이 부상으로 인해 하관이 기울어지고 언어장애까지 생기게 되었다. 워드는 부대를 버리고 전력 보충을 위해 상해로 이탈했고 양창대는 부대장인 헨리 안드레스 버제빈의 지휘 아래 송강에 주둔하며 어떠한 전투도 치르지 않았다.
상해로 돌아간 워드는 아예 중국으로 귀화하기 위해 중국인과 결혼한 것으로 서류를 위장하고 이것을 이용해 여러 가지 문제[6]로 인한 미국 총영사관의 기소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해에 주둔했던 영국 해군 제독 제임스 호프는 양창대에 영국인 병사들이 탈영 후 가입하는 상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워드를 영국 군함에 감금하였다. 그러나 워드는 한밤중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군함을 탈출하여 다시 양창대에 합류했다.
해를 념겨 1861년 5월, 워드는 다시 청포를 공격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양창대는 참패하고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워드는 양창대를 효과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5.1. 왜 양창대는 졸전하였는가?
양창대는 태평천국의 상해 진군을 전혀 저지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금과 무기, 인력을 처참하게 낭비하였다. 역사학자 리처드 스미스는 양창대의 졸전의 원인은 조급한 고용주의 전투 명령[7], 심각한 수준의 군기문란[8], 근본적으로 태평군에 비해 매우 부족한 인력[9]을 꼽았다. 양창대가 가끔 태평군에 승리한 요인은 고작 서양 무기의 우월성 뿐이었다.[1] 현 노리치 대학교[2] 흔히 아는 필리버스터와는 의미가 다른 것으로, 여기서는 용병대를 육성하고 다른 국가에서 싸우도록 지도하는 일로 오늘날의 민간군사기업과 비슷한 직업을 뜻한다.[3] Confucius. 그 공자 맞다.[4] 이 수적 토벌은 무역업 행수인 양방에 의해 지원을 받았다.[5] 사상자가 병력의 2/3에 가까운 수준으로, 시시때때로 병력 충원이 가능했던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말 그대로 전멸했을 인명 피해다.[6] 상해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이 높은 봉급에 혹해서 탈영한 뒤 양창대에 입대한 일이 대표적이었다.[7] 앞에서 보듯 훈련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상해 함락을 두려워한 호상들이 출전을 무리하게 명령했다.[8] 무질서함은 기본이었고 술에 취한 채로 전투를 하는 용병도 많았을 정도로 군기가 형편없었다.[9] 수백 명에 불과한 양창대에 비해 상해 공격의 주력이었던 이수성의 병력은 2만 명에 이르렀다. 고작 몇백 명의 용병이 잘 싸워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