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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9:02:57

프랭크 코스텔로

<colbgcolor=#000><colcolor=#fff> 프랭크 코스텔로
Frank Costello
파일:프랭크 코스텔로 2.jpg
본명 프란체스코 카스틸리아
Francesco Castiglia
출생 1891년 1월 26일
이탈리아 왕국 칼라브리아 카사노올리오니오
사망 1973년 2월 18일 (향년 82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국적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직업 마피아
신체 173cm

1. 개요2. 생애3. 여담4. 어록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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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

일명 암흑가의 수상(Prime Minister of the Underworld)

러키 루치아노의 후계자다.

2. 생애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태어나 4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프랭크 코스텔로는 13살 때 형의 권유로 갱스터가 되었다.

프랭크 코스텔로는 자연스레 같은 이탈리아 출신 갱스터 러키 루치아노와 친구가 되었다. 루치아노의 지인들은 시칠리아 출신이 아닌 사람과 일하는 것에 회의적인 구식 마피아들이었다. 그들은 루치아노에게 더러운 칼라브리아인(Dirty Calabrian) 코스텔로와 함께 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프랭크 코스텔로는 금주법을 거치며 승승장구했고 1925년엔 미국 시민이 되었다. 코스텔로는 카스텔람마레 항쟁을 전후로 자신의 친구 러키 루치아노가 암흑가의 패권을 쥐는 순간을 함께했다.

러키 루치아노는 비토 제노비스(사진)를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코스텔로를 3인자 직책인 상담역(Consigliere)[1]으로 지명했다. 코스텔로는 이윽고 루치아노 패밀리의 최고 소득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36년 러키 루치아노가 30~50년의 부정기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자 비토 제노비스가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지만 1년 만에 살인죄 기소를 피해 이탈리아로 도피하면서 프랭크 코스텔로가 두목 대행이 되었다.

1946년 가석방된 러키 루치아노가 이탈리아로 추방되면서 프랭크 코스텔로가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Boss)으로 추대되었다. 코스텔로는 마피아계 최고 선임자인 루치아노를 변함없이 존중했고 그의 의견과 지시를 잘 수행했다.

이 시기 프랭크 코스텔로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일화로 당대 암흑가에선 "코스텔로의 승인 없이는 뉴욕 시의 어느 누구도 판사가 될 수 없다.(Nobody in New York City can be made a judge without Costello's consent.)"라는 말이 있었다.

1951년 미국 내 조직범죄에 대한 의회 차원의 청문회이자 영화 대부 2편 케스타트 청문회의 모티브가 되는 키포버 청문회에 프랭크 코스텔로가 출석했다. 그의 등장은 청문회의 하이라이트로, 그는 언론에 의해 미국 제1의 조직폭력배(America's #1 gangster)이자 태머니 홀의 실질적 지도자(de facto leader of Tammany Hall)[2]로 선전되며 전미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청문회에 출석했던 다른 마피아 두목(Boss)들과 달리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고 연방상원의원들의 질문에 답변을 했지만 신경질적인 태도와 목소리를 유지했다. 그는 청문회 도중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의회모독죄로 14개월을 복역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소득세 7만 3417달러를 탈루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5년과 벌금 2만 달러를 선고받지만, 항소하는 과정에서 6개의 연방 교도소와 주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제대로 된 형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7년 어느덧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비토 제노비스는 과거 자신의 하급자였던 프랭크 코스텔로가 두목(Boss) 노릇을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부하에게 코스텔로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코스텔로는 얼마 안 있어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머리에 총격을 당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이때 코스텔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젊은 총잡이가 미래의 마피아 두목 빈센트 지간테다.

총격 사건으로 프랭크 코스텔로는 비토 제노비스에게 패밀리를 넘겨주고 은퇴했다. 이탈리아에 있던 러키 루치아노는 이러한 하극상에 격분했다. 얼마 안 있어 제노비스는 마약사범으로 몰려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하지만 패밀리를 완전히 장악한 뒤였기에 교도소에서 대리인을 통해 조직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프랭크 코스텔로는 여전히 마피아 세계에서 영향력을 유지했고 말년을 바쁘게 보냈다. 카를로 감비노나 토마스 루케시(사진) 같은 후배 마피아 두목(Boss)들이 그를 찾아와 중요한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오랜 친구인 유대인 조직폭력배 마이어 랜스키(사진)와도 계속 연락했다. 코스텔로는 정원 가꾸기에 몰두했고 지역 원예 전시회에 자신의 꽃 일부를 전시하기도 했다.

1973년 프랭크 코스텔로는 자신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여담

프랭크 코스텔로 청문회

4. 어록

세금을 냈지요!
Paid my tax!
"코스텔로 씨가 국가를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라는 연방상원의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

5. 관련 문서


[1] 콘실리에리. 영화 대부에서 젠코 아반단도톰 헤이건이 맡았던 직책이다.[2] 태머니 홀이란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뉴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부정한 정치 조직을 말한다.[3] 모레티와 시나트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4] 일본 같은 장수 국가 몇몇을 제외하면 남성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긴 것은 2020년대에 들어선 최근의 일이며 이 당시에는 70세만 넘겨도 상당한 장수였다.[5] 메일러의 소설 'Tough Guys Don't Dance'는 1987년에 영화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