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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17:28:11

1832년 6월 봉기

프랑스 6월 봉기에서 넘어옴
1. 개요2. 원인3. 39인 보고서4. 전개5. 피해6. 이후7.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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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insurrection républicaine à Paris en juin 1832

파일:June_Rebellion.jpg

1832년 6월 5~6일 양일간 프랑스 왕국 파리에서 군주제 폐지를 기치로 발생한 봉기.

2. 원인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샤를 10세가 타도된 후 보다 자유주의적인 루이필리프하원 의회에서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7월 혁명의 주요 원동력이었던 공화주의자들의 눈에는 왕이 다른 왕으로 바뀌었을 뿐으로 보였기 때문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때문에 피는 자신들이 흘렸으나 루이필리프를 옹립한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혁명을 '탈취당했다'고 생각하는 공화주의자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이들은 매우 배타적인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입헌군주제나 그 어떠한 협상도 수용하지 않았고 군주제 자체의 폐지를 원했다.

마침 국왕의 유력한 조력자이자 추밀원 의장인 카지미르피에르 페리에[1]가 5월 16일에 사망하고 뒤이어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자 하층민에게 온건했던 자유주의 정치가인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가 6월 1일에 사망한 것을 계기로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3. 39인 보고서

공화주의자 몇몇과 많은 반(反)오를레앙파로 구성된 39명의 야당 의원들이 5월 22일에 자크 라피트의 집에서 회동하여 자신들의 선거구 유권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활동을 결산하고 자신들의 행동과 표결활동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알리는 한 보고서를 발간하기로[2] 결심하였는데 그 보고서는 1831년 3월 13일 라피트 내각을 대신하여 세워진 페리에 내각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6명[3]으로 구성된 소위원회에 의해 기안된 초안이 5월 28일 39명의 위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 보고서가 1789년의 프랑스가 그랬듯이 1830년의 프랑스(7월 왕정)도 "인민을[4] 위한 제도를 갖췄으므로 자유의 제원칙과 양립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되던 왕정을 규탄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보고서는 '3월 13일 정권'을 잡은 사람들[5]이 내세웠으나 '준-적통적 체계'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열거했다.

보고서는 정부가 자유를 반복하여 유린하였고 소요를 부채질하고 무질서 상태를 방치하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국제사회의 차원에서는 (폴란드인들을 위시하여) 억압받는 민중들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것이 <왕들의 유럽>, 그리고 신성동맹이 지향하는 유럽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규탄하였다. 부정적인 상황을 잔뜩 열거한 후 그 보고서는 반혁명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고 그 움직임이 승리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왕정복고와 대혁명이 대치하고 있는데 우리가 끝났다고 믿고 있던 싸움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요약하자면 비록 '공화국'이나 '공화주의자' 라는 용어를 한 번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보고서는 7월 왕정을 세운 사람들을 공격함으로써 7월 왕정에 대해 가장 신랄한 규탄을 하였고 "프랑스가 40년 동안이나 지키기 위해 싸워 온 위대하고 숭고한 대의에 대한 한결같은 충정으로 뭉쳐진 우리에게 있어서, (...) 우리는 그 대의에 우리의 목숨을 걸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그 대의가 승리할 것임을 믿는다."고 적힌 보고서의 결론은 체제를 전복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암시된 호소라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 선언문이 발표되자마자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반응이 촉발되었는데 공화파 야당을 열광시켰다. 공화파 야당은 7월 왕정 시대에 종종 그랬듯이 혼란을 이용하여 득을 얻을 수 있기를 항상 노리던 법통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양쪽 모두 아주 작은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그걸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예를 들면 <라 골루아즈>란 공화파 모임의 의장이자 폭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데샤펠은 샤를 10세 망명 정부의 오에게르티 조신들과 동서지간이기도 하면서 숙부였다.

4. 전개

6월 2일 공화파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의 장례식이 공화파에게는 워밍업의 구실을 했는데 야당 지도자들은 공화파 거두들 중의 한명이면서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여 6월 5일 치러질 예정이던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은 엄청난 민중이 몰려들 것이 틀림없었는데 그것은 공화파 비밀조직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던 봉기를 촉발시키는데 절호의 상황이었다.

장례 행렬은 아우스터리츠 다리에서 붉은 기를 앞세운 시위대와 뒤섞였다. 국가경비대는 용기병을 앞세워 다리에서 시위대를 저지하려 했으나 이 충돌을 시작으로 봉기는 파리 곳곳으로 번져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일부 군인들은 시위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한편 벨기에 왕 레오폴드 1세를 만난 후 6월 1일 샤토 드 생클루 성으로 출발했던 루이필리프는 6월 5일 에이메스 장군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았다. 왕은 즉시 마차에 올라 왕후 마리아 아말리아와 아델라이드 부인을 대동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튈르리 궁의 카루젤 안뜰에서 왕은 자신의 결의를 보이기 위해 전선부대와 국가경비대의 사열을 받았다. 밤이 되자 무통 원수가 지휘하는 정규군 부대들이 파리 외곽을 소탕하고 시위대를 파리 중심지로 몰아 넣었다.

한편 5일 저녁 야당 국회의원들은 보고서에 서명을 하고 라피트의 집에 다시 모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다가 결국 6일 아침 왕에게 특사를 보내 정책을 바꿈으로써 유혈사태를 종식시키라는 요구를 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6일 오전 왕은 샹젤리제 거리와 콩코르드 광장에서 군대를 사열한 다음 파리 북쪽 구역에 있는 군인들과 국가경비대원들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왕은 "대왕님 만세!", "공화파들을 처단하자!", "샤를 왕당파를 타도하자!"는 함성과 함께 환영을 받았다. 오후 세시 반에 튈르리 궁에서 라피트, 오딜롱 바로, 아라고를 접견하면서, 왕은 그들에게 마지막 저항 거점이 방금 무력화되었으며 따라서 협상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통고할 수가 있었다.

혼란의 원인은 정부가 7월 혁명의 결과로 사람들이 당연히 기대할 수 있게 된 것들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 그 혼란의 원인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바로에게 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7월 혁명의 목적은 1830년 헌장을 위반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는데, 헌장은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되기까지 했었다. 따라서 1830년 헌장은 이제 나를 안내하는 지침이 되어 있는 바,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에게 약속했고, 내가 유지하겠다고 맹세했고, 또 앞으로도 내가 피를 흘리더라도 언제까지나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 헌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약속을 공시했고 또 나의 그 약속을 엄수하여 지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위 "시청 계획"이라는 것에 대해 지어낸 그 모든 황당한 이야기들을 내가 들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라피트 경은 나와 함께 시청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비앙네 경이 읽은 선언서 외에 다른 계획은 없었다. 나는 그렇다는 사실을 라파예트 경에게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 여러분에게 그런 계획은 완전히 지어낸 것이고 황당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다시 확실히 말하게 되어서 기쁘다.

6월 6일 아침 전열을 재정비한 정규군과 국가경비대는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했고 시위대는 생-메리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곳에서 봉기의 절정이자 약 8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치명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이른 저녁까지 계속된 전투 끝에 봉기는 진압되었다.

5. 피해

역사학계의 정설은 다음과 같다.

정규군 및 경찰: 55명 전사, 240명 부상
국가경비대: 18명 전사, 104명 부상
반란군: 93명 전사, 291명 부상

당시 파리 경찰청장 앙리 지스케는 정규군 32명 전사에 170명 부상, 국가경비대 18명 전사에 104명 부상, 파리 경찰대는 20명 순직에 부상자가 52명인데 이 세 부대에 소속되지 않은 사상자는 집계되지 않았다고 보고하면서 반란군은 최소 80명 이상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1500여 명이 체포되었다고 기록했다.

6. 이후

내각회의는 승리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왕으로 하여금 파리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칙령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당시 소요는 끝난 상태였으나 내각은 중죄재판소의 배심원들이 1830년 이래 공화파 선동자들이 관련된 소송에서 종종 그래왔듯이 권한을 남용하여 무죄석방을 평결할까 봐 두려워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정상적으로는 문민 권력자에 의해 행사되던 권력이 군부 권력자들에게 이양되기 때문에, 피의자들을 훨씬 더 엄격한 군법회의에 불러 세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6월 18일에 언도된 첫 번째 사형 판결은 항고되었으며 최고파기법원은 6월 29일의 결정판결에서 군법회의의 판결을 파기하고, 특별법정의 설치를 금지하고 배심원단의 판결을 보장하는 1830년 헌장의 53, 54 및 56조에 위반된다는 이유를 달아 소추사건을 보통법 재판소로 되돌려 보냈다.

최고파기법원의 결정판결이 내려지던 날 루이필리프는 자신이 내린 6월 6일 칙령을 폐기했다. 공화주의자들은 크게 기뻐하였고 이후 오랫동안 그 1832년 6월 쿠데타를 비난하였다. 빅토르 위고는 '헌장의 제14조[6]를 사라지게 하고 자신들을 위해 계엄령 설치를 술잔의 이중바닥 안에 숨겨 남겨 둔 정치적 야바위꾼들'을 규탄하였다. 만평 화가들도 이런 현실을 비평하였다.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민중 배심원들은 82명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7명에게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루이필리프는 사형수 전원을 유배형으로 감형했다.

루이필리프 측은 이 봉기를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으로 규정하였다. 선량왕이라고도 불리며 프랑스의 다른 왕들에 비해 친자유주의 성향이 있던 루이필리프였지만 봉기를 시도한 공화주의자들은 왕이 없는 공화국 외엔 어떠한 협상도 불가능한 강경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루이필리프와 이들은 절대 양립할 수 없었고 루이필리프 입장에선 본인이 내려오지 않는 한 별 수 없이 전부 진압해야만 했다. 당시 벌어진 일화로, 봉기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은 환자들을 치료하던 의사들에게 파리 경찰청장 앙리 지스케는 치료를 받으러 온 자들을 당장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루이필리프는 "살려고 의사들을 찾아간 환자들을 의사 손으로 단두대에 보내는 그따위 비인도적인 처사가 어디 있느냐"며 오히려 보호해 주었다고.

진압 후 시민들 앞에 나타난 루이필리프는 환영받았다. 조사와 연구 결과 당시 봉기 참가자들 중 2/3은 노동자, 특히 건설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었고 나머지 1/3은 자영업자, 점원 등이었다고 한다. 같은 사태를 우려한 루이필리프 정부는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관람을 금지했다.

사족으로, 7월 왕정은 결국 이때로부터 16년이 지난 1848년 2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제2공화정이 수립되었으나 이는 나폴레옹 3세친위 쿠데타로 인해 붕괴되고 한동안 프랑스 제2제국이 지속되다 나폴레옹 3세도 몰락하면서 제3공화정부터 오늘날 프랑스 공화국의 체제가 제대로 시작된다.

7. 창작물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생-드니 거리에 설치된 봉기 참가자들의 바리케이드 장면에 소설의 주요 인물들의 대부분이 등장하며 상당수가 그곳에서 죽는다. 앙졸라와 그 일당처럼 혁명을 위해서 모였든, 마리우스 퐁메르시와 마뵈프 교구원처럼 잃을 것이 없어서 모였든 이들은 모두 긍정적인 모습으로, 어떤 경우에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빅토르 위고가 현장을 체험했고 공화주의자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는 데 기인한다. 봉기 당시 위고는 튈르리 공원에서 희곡을 집필하다가 총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미 파리 중앙부 대부분이 봉기 참가자들에게 장악당했다는 사실을 모른채 거리로 향했다가 바리케이드에 갇혔고 봉기 현장을 목격했다.

원전 소설에서 라마르크 장군의 죽음 전날 봉기를 계획하는 장면에 나오는 가상의 결사 단체 'ABC의 벗들'은 앙졸라의 카리스마적 지도로 이끌어지고 있었는데 프랑스어로 abaissé는 억압받는 자라는 뜻으로, 그 발음이 알파벳 ABC의 프랑스어 발음과 같아 만들어진 언어유희적 단어다. 이 결사체는 실제로 있었던 '인권을 위한 모임'의 하부 그룹을 묘사한 것이다.

레 미제라블은 상대적으로 관심과 논의가 적었던 6월 봉기와 그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다룬 몇 안 되는 문학작품이며 이 소설 덕분에 6월 봉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7]

뮤지컬과 영화 레미제라블의 클라이막스에서 묘사된다. 당시 봉기가 시작되는 장면에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합창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1] 훗날 프랑스 제3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장 카지미르페리에가 그의 손자다.[2]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자크 네케르의 '왕에게 드리는 보고서'를 연상하게 한다. 라피트는 그의 직업, 그의 막대한 부, 인기를 얻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리고 변덕스러움으로 왕을 연상하게 한다.[3] 샤를 백작, 라파예트, 라피트, 오딜롱 바로, 모귄, 코르므냉[4] 1830년, 라파예트는 공화주의적 법에 보호받는 시민에게 사랑받는 왕좌를 바랬다.[5] 페리에 장관은 1831년 3월 13일에 취임했다.[6] 임시 법정 금지령에 관한 헌장 54조에 대한 것이다.[7]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 국민들조차 레 미제라블의 원전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줄어들고 6월 봉기의 과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2%밖에 되지 않는다는 1991년 기사가 있다. 다만 2012년 영화 레미제라블로 인해 이 사건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