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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텐차 Potenza | |||
행정 | |||
국가 | 이탈리아[1] | ||
지역 | 바실리카타 | ||
인구 | 64,406명 | ||
면적 | 173km2 | ||
시간대 | UTC+1 |
1. 개요
이탈리아의 도시로 바실리카타의 중심 도시다. 살레르노 동쪽 루카니아의 아펜니노 산맥에 있는 바센토 강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주 주도 중 하나이다. 해발 819m의 고지대에 위치한다. 특별한 도시 구조로 인해 수직 도시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고차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큰 대중교통용 에스컬레이터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2. 역사
도시의 기원은 확실히 고대이지만 불확실하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기원전 4~5세기에 루카니아인들이 이 일대에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기원 전 4세기 로마와 삼니움 사이에 전쟁이 났을 때 루카니아인들은 로마편을 들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왕인 피로스 1세가 로마를 침공하였을 때는 피로스의 편을 들었다.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로마 공화국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으며, 그 대가로 그들의 제도와 관습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루카니아인들은 로마가 칸나이 전투에서 패하자 바로 카르타고 편을 들었다. 그러나 메타우루스 전투 이후 카르타고군이 아프리카로 후퇴하자 루키니아인들은 로마에 항복하였다. 그 이후 포텐차의 로마화를 가속되었고 대부분 시민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신 메피테스[2]의 신앙을 유지하였다. 로마 제국 말기 포텐차는 고트족에 의해 약탈당하였고 5~10세기 까지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노르만인의 남부 이탈리아 정복으로 인해 시칠리아 왕국의 차지가 되었다.르네상스 시기 포덴차는 이 도시를 지배하던 스페인 바스크계 가문인 데 게바라 가문은 이 지역에 산타 마리아 델 세폴크로 수도원과 교회, 산 프란체스코 회랑, 세지오 궁전, 수로 등 포텐차의 현재 모습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지중해 무역이 쇠퇴되면서 포텐차도 쇠락하였다. 특히 스페인인이 주류인 나폴리 왕국의 반봉건적 태도와 이탈리아인에 대한 불관용은 포텐차 시민들의 불만을 야기하였고, 이는 이 지역을 다스리던 백작의 궁전이 불타는 원인이 되었다. 그 와중에 대지진이 발생해 도시의 쇠락을 가속화시켰다. 이는 나폴리 왕국의 왕가가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로 넘어가도 마찬가지 였다. 연이은 전염병과 식량위기, 자연재해는 행정부의 수입을 감소시켰고 이는 세금 증대로 이어져 부르주아의 불만을 샀다.
결국 나폴레옹 휘하 장수 장 에티엔 샹피오네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포텐차에 입성하는 걸 환영하였고 나폴리 다음으로 자코뱅 세력이 강한 이탈리아 남부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포텐차는 다시 양시칠리아 왕국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1857년의 대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이에 대한 사태 수습이 미흡하여 이는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붉은 셔츠단이 도시에 입성할 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직후 남부에 퍼진 통일 이후 약탈은 왕정복고를 희망하는 친부르봉 세력에 힘입어 사회적 불균형, 빈곤, 빈곤,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무능력이라는 전통적인 이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지배자들은 남부의 억압받는 계급의 실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배후지의 많은 중심지에 영향을 미쳤지만 억압에 대한 대부분의 작전 및 전략 지침이 조정되고 지방의 수도에서 바로 시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 중심의 이탈리아 왕국과 공화국 정부는 남부를 홀대하였고, 이는 포텐차의 쇠락의 가속화 시켰다. 그건 1980년 11월 23일 발생한 진도 규모 6.9의 대지진으로 사망자 12명, 부상자 50명, 이재민 4,000명 등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더더욱 말이다.
3. 경제
포텐차는 전통적으로 공예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주방용품, 대문, 난간 및 장식용 물건을 생산하였다. 또한 교외에는 파스타와 제과 공장이 존재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관광 산업을 육성했고, 지역 허브로서의 위치덕분인지 관광객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4. 요리
포텐차 요리는 이탈리아 남부 농민들이 주로 먹었던 요리로 구성되어있다. 스트라시타니, 페레티, 오레키에테, 마카로니, 라비올리 파스타가 유명하다.또한 포카치아가 유명하며 고기나 채소가 중심인 북부와 다르게 생선인 대구기본으로 한 요리로 건포도로 맛을 낸다.
5. 랜드마크
- 포텐차 대성당 (Cattedrale di San Gerardo) : 포텐차 역사 중심지에 있는 가톨릭 성당으로 포텐차의 성자이자 주교인 산 제라르도 델라 포르타에 헌정되었다.
- 산 프란체스코 교회 (Chiesa e convento di San Francesco) : 1274년 건축된 교회로 옆에는 수녀원이 있다.
- 무스메치 다리 (Ponte Musmeci) : 포텐차 도심 출구와 도시 남부의 주요 도로를 연결하는 다리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가인 세르지오 무스메치가 만들었다.
- 마리오 파가노 광장 (Piazza Mario Pagano) : 포텐자 역사적인 중심부에 있는 광장으로 이탈리아의 법학자이자 나폴리 공화국의 순교자인 마리오 파가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현궁(Palazzo della Prefettura) : 포텐차 시청으로 마리오 파가노 광장에 위치해있다.
- 바실리카타 국립 고고학 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ella Basilicata) : 이 지역을 다스리던 지배자의 궁전인 팔로초 로프레도에 위치한 고고학 박물관. 박물관은 바실리카타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