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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4 12:55:51

포르투갈 구국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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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공화국
República Portuguesa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파일:포르투갈 국장.svg
국기 국장
상징
국가 A Portuguesa
파일:포르투갈 위치.png
1974년 ~ 1975년
카네이션 혁명 이전 성립 이후
포르투갈 제2공화국 포르투갈 제3공화국
수도 리스본
정치체제 임시정부, 군사정권
국가원수 대통령
언어 포르투갈어
종교 가톨릭
민족 포르투갈인
통화 포르투갈 에스쿠도

1. 개요2. 상세
2.1. 9월 28일 위기(Crise de 28 de Setembro)2.2. 1975년 3월 11일 쿠데타 시도(Tentativa de Golpe de 11 de Março de 1975)2.3. 신헌법 제정과 군정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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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국군정은 카네이션 혁명 이후 이스타두 노부 정권이 붕괴하고 포르투갈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정권(Junta)이었다.

카네이션 혁명 발발 직후인 1974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위원장의 공식 발표와 함께 포르투갈 제2공화국을 대체해 공식 정부 기구로서의 활동했다.

2. 상세

카네이션 혁명을 주도한 군부는 즉각 구국군정위원회(Junta de Salvação Nacional)를 수립하고 아메리쿠 토마스 대통령의 해임과 제2공화국 국회 및 국무회의 해산을 선언한 뒤, 신헌법(Lei Constitucional n.º 1/74)을 공포했다.

이후 신헌법에 따라 구국군정위원회 위원장인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를 신임 대통령으로 지명하고, 스피놀라 대통령이 직접 리버럴 성향의 법조인 아델리누 다 팔마 카를루스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군부는 여기까지의 역할을 마무리한 뒤 정치 일선에서 후퇴했으나, 상황은 기대처럼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2.1. 9월 28일 위기(Crise de 28 de Setembro)

임시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혁명 세력 내에서는 좌익과 우익 간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었다. 특히 우익 성향이 강했던 스피놀라 대통령은 군부 및 임시 정부 내에서 좌익 세력이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7월에는 스피놀라가 국민투표를 통한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주장했으나 군부 소장파(무장군 운동, Movimento das Forças Armadas)가 이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에 스피놀라와 보수 세력은 좌익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규모 반정부-반혁명 시위를 계획했으나, 이를 사전에 저지하려는 군부 소장파와 충돌했다. 군부 소장파는 경찰을 동원해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과 반혁명 인사들을 체포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피놀라는 1974년 9월 30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후임 대통령으로는 구국군정위원회의 신임 위원장 프란시스쿠 다 코스타 고메스가 취임했으며, 군부 소장파가 구국군정위원회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로써 긴급한 사태가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무혈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2.2. 1975년 3월 11일 쿠데타 시도(Tentativa de Golpe de 11 de Março de 1975)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난 것으로 보였던 스피놀라 전 대통령은 반격을 시도했다. 공수부대와 일부 보수 성향 군 장교들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감행하며 구국군정의 지원 아래 수립된 임시정부와 구국군정을 장악한 군부 소장파들을 축출하려 한 것.

그러나 구국군정과 임시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빠르게 감지했고, 쿠데타 시도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진압되면서 완전히 무산되었다. 쿠데타 실패 후, 스피놀라 전 대통령은 아직 프랑코 정권이 유지되고 있던 스페인으로 망명했으며, 스페인이 민주화된 뒤에는 브라질로 이동해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스피놀라의 쿠데타 시도는 결국 혁명 세력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포르투갈 정국은 본격적으로 좌익 주도의 개혁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2.3. 신헌법 제정과 군정종료

1975년 4월 25일, 임시정부 주도로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됐는데 스피놀라의 쿠데타 시도 이후 우익 세력이 크게 약화된 덕분에, 사회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등 좌익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었다. 특히 사회당은 무려 38%를 득표하며 압도적인 제1당에 올랐다.

이후 제헌의회는 군부 통치를 종식할 신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으며, 그 과정에서 은행 및 주요 기업 국유화, 농지 개혁 등의 급진적 경제 개혁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급격한 개혁 정책은 자연스럽게 경제 불안정을 초래했고, 특히 온건 개혁을 주장하던 사회당과 급진 개혁을 추진하던 공산당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좌파 정당들 간의 이념적 대립이 격화되며 내분의 조짐이 더욱 뚜렷해졌다.

결국 1975년 9월부터 '뜨거운 여름(Verão Quente de 1975)'이라 불리는 정치 투쟁기에 다시 접어들었는데, 이 시기에는 좌익과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 내부에서도 심각한 분열과 갈등이 표출됐다. 특히 시장경제의 틀을 유지하려는 사회당과 급진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공산당의 갈등이 심각했고 각 지역에서 지지 세력 간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더니 심지어 군부 내에서 공산당을 지지하는 일부 강경파 그룹이 좌익 쿠데타를 시도했다.

1975년 11월 25일, 군부 내 우익과 온건파가 급진좌파의 쿠데타 시도를 저지하면서 권력 균형이 크게 흔들렸고 급진파 군부 장교들이 체포되거나 숙청되면서 공산당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덕분에 사회당이 사회민주당의 협조와 지원 아래 안정적으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포르투갈은 급진 사회주의 개혁에서 점진적인 민주주의 체제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1976년 4월 2일, 제헌의회가 새로운 헌법을 공식 채택하면서 포르투갈 제3공화국이 공식 출범했고, 군정은 드디어 역할을 마무리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었다. 이후 국유화된 기업과 금융 기관 운영 방식이 자율화되기 시작했으며, 시장경제와 사회주의적 개혁이 공존하는 형태로 방향이 수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