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페르난두 후벤스 파시 주디첼리 (Fernando Rubens Pasi Giudicelli) |
생년월일 | 1906년 3월 1일 |
사망년월일 | 1968년 12월 28일 |
국적 | 브라질 |
출신지 | 히우지자네이루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조건 | 불명 |
등번호 | -[1] |
소속팀 | 아메리카-RJ (1924-1927) 플루미넨시 FC (1927-1931) 토리노 FC (1931-1933) YF 취리히 (1933) 아메리카-RJ (1934) 보르도 (1934-1935) 스포르팅 (1935) 레알 마드리드 CF (1935) FC 앙티브 (1936-1937) |
국가대표 | 3경기 / 0골 (1930) |
[clearfix]
1. 개요
에이전트 겸 하프백으로 알려져 있다.2. 생애
2.1. 클럽
주디첼리는 이탈리아계 혈통으로 알려져 있다.그는 그 당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 잘 나가던 클럽인 아메리카-RJ에서 데뷔했고, 1927년에 플루미넨시 FC로 이적하였다. 주디첼리는 4시즌 동안 81경기라는 다소 적은 경기에 출전했지만 출전 경기에서는 57승을 거둘 정도로 승률이 좋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머지 경기에서 잘 풀리지 않으니 플루미넨시 팀 자체는 좋은 성적을 거둘 리 만무했다.
1931년, 주디첼리는 닐루, 카르발류 레이치 등과 CR 바스쿠 다 가마의 유럽 투어에 참가하였다. 바스쿠 다 가마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를 돌며 바르셀로나, 포르투, 벤피카, 스포르팅 리스본 등과 12차례 시합을 가졌고, 그 중 8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투어가 그렇게 끝날 무렵, 주디첼리는 유럽에 남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당시 브라질은 프로화가 되어있지 않았던 관계로 그것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고 오리운디임을 이용하여 토리노 FC로 이적하였다.
그는 첫 시즌에 28경기의 출전 기록을 남기는 등 토리노에서의 생활에 나름 만족했지만 거칠었던 축구계에는 다소 플레이 스타일이 맞지 않는 선수였다. 당시 세계 최고의 하프백으로 평가받던 몬티나 안드라데는 엄청난 운동량은 기본에 몬티는 그에 더해 승부욕과 거친 수비로 명성을 떨치던 선수였고 감독들 대부분이 그런 선수를 선호했다. 그 때문에 다음 시즌에는 12경기로 출전 횟수가 줄었고 2년만에 토리노 생활을 정리하게 된다.
1933년에는 스위스의 영 보이스로 이적했고 겨울 휴식기에는 잠시 아메리카-RJ에서 뛰기도 했다. 1934년부터는 보르도에서 보냈고 휴식기 동안에는 계속 유럽으로 이적을 원하는 남미 선수들에게 다리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계획했던 선수 수급을 마치지 못하게 되었으며 스포르팅 리스본으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팀에서는 단 한 경기 밖에 뛰지 못했고,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였다. 여기서도 그는 라싱 산탄데르를 상대로 단 한 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던 프란시스코 브루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디첼리는 프랑스의 앙티브로 팀을 옮기게 되었고 2년간 29경기에 출전, 8골을 기록하면서 나름 좋은 활약을 펼치며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2. 국가대표
주디첼리의 국가대표 데뷔 무대는 월드컵이었다. 그는 하프백으로 두 경기에 모두 출전하였고, 같은 해 8월 10일에 열린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가 그의 마지막 A매치였다. 여기에서 브라질은 유고슬라비아를 4대1로 대파하여 월드컵에서의 복수에 성공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뛰어난 축구 지능과 기술적인 장점이 있던 하프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상술했듯 당시 축구계에 좀 맞지 않게 투쟁심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었다.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