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이 라이온스 No.18 | |
판웨이룬 潘威倫 / Pan Wei-Lun | |
<colcolor=#000000><colbgcolor=#FFA500> 생년월일 | 1982년 3월 5일 ([age(1982-03-05)]세) |
출신지 | 핑둥현 |
국적 | [[대만|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2cm, 98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2003년 CPBL 프리시즌 드래프트[1] 1라운드 (퉁이 라이온즈) |
병역 | 병역면제[2] |
소속팀 | 퉁이 세븐일레븐-퉁이 라이온즈 (2003~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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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판웨이룬은 대만의 프로야구 선수이다. 과거 국가대항전에도 여러 차례 선발되고 SK 와이번스에서 영입설이 돌기도 해서 국내 팬들에게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선수.전성기는 20대 후반에 끝나버려서 어마어마한 데뷔 초 성적에 비해서는 누적 성적이 아쉽지만 전성기의 활약 덕에 통산 149승으로 CPBL 통산 승리 1위기록을 갖고 있다.[3]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1982년생으로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야구를 시작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이 투수였고 역시 학교에서도 투수를 맡았다. 고교 성적이 특출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계청소년야구 국가대표로도 뽑혔다.고등학교 졸업 이후 고교 선배 션위지에[4]의 뒤를 따라 일본 벳푸대학에 진학하였으나 해당 학교는 야구부가 강한 곳이 아니라 그냥 동아리 야구부 느낌이었기 때문에 한 학기만에 중퇴. 이후 대만으로 돌아가 야구부가 유명한 학교 중 한 곳인 푸런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학교 역시 학업 비중이 높아 얼마 안 돼 자퇴하고 실업야구로 갔다.
실업야구에서 1년간 뛴 후 지병인 신장질환 덕분에 병역면제를 받아 바로 드래프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 프리시즌 드래프트 전체 1순위 픽을 가진 퉁이는 전 오릭스 블루웨이브 소속이었던 위원빈[5]과 고민하다 판웨이룬을 뽑아 전체 1픽으로 프로에 입단하게 되었다.
2.2. 프로 경력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규정이닝 2점대에 13승을 거둔 판웨이룬은 데뷔 이래 1년차부터 8년 연속 10승을 거두며 대만 최고의 선발투수로 거듭났고[6] 2010년 시즌 후에는 한국 진출을 시도하였다.그러나 CPBL 선수가 한국에 진출할 시 CPBL 구단에 줘야 하는 보상금이 너무 많아 한국 진출에는 실패했고 퉁이와 3년 1944만 대만달러[7]라는 대형 계약을 맺으며 잔류하였다.
그러나 이 계약을 시작으로 판웨이룬은 다시는 규정이닝 3점대도, 선발 10승도 하지 못하며 빠르게 내리막을 탔다. 2011년부터 갑자기 내리막을 타 74.1이닝에 그치며 부진하였고, 2012년은 아예 3경기 등판에 그쳤다. 2013년부터 다시 선발 로테이션을 자리잡았지만 105.1이닝 ERA 5점대를 기록하며 부진에 빠졌고 이후로 판웨이룬은 여러 번의 부상을 겪으며 스팟선발로만 간간히 나오는 데 그쳤다. 2011년 이후 규정이닝을 먹은 시즌이 2시즌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간신히 부상을 피해가며 규정이닝을 달성한 2015년, 2019년의 경우 ERA 4점대 후반~5점대 초반으로 그냥 그랬다.
결국 2021년에는 불펜으로 전환하였으나 22경기에서 1승 1패 3홀드(1블론) ERA 5.81로 부진하여 2022년에는 선발 재전향을 시도했다. 그러나 선발로 재전향한 2022년에도 11경기(10선발) 2승 7패(1블론) ERA 4.77로 살아나지 못했다.
2023년 현재도 현역으로 뛰고 있기는 한데, 주로 2군에 있다가 8월 12일 땜빵선발로 나와 3이닝 5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고 바로 2군으로 돌아갔다. 이후 9월 하순에 1군에 복귀하여 불펜으로 3이닝 무실점, 1.1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3경기(1선발) 7.1이닝 0승 1패 ERA 11.05를 기록중이다.
놀랍게도 2024년에도 현역으로 더 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본인은 150승을 기록하고 은퇴하고 싶어하나 2023년 보여준 퍼포먼스를 보면 사실상 1군에서 뛰기에는 무리인 수준이라 가능할 지는 미지수. 물론 땜빵선발 정도는 가능했던 2022년 정도로만 해 준다면 150승 정도는 노려볼만은 하다.
2024년에는 1군 롱릴리프와 2군을 오가는 중. 4월에 149승째를 드디어 기록하며 1승만 남았으나 5월 중순 다시 2군으로 갔다. 이후 어떻게든 150승을 시켜주려는 구단 덕분에 8월 18일 기준 9경기에 등판했으나 1승 5패 ERA 7.17로 최악이다. 8월 15일에 2군에 갔으니 8월 25일부터 다시 1군 등판이 가능한데, 9월 28일 은퇴경기를 한다고 선언까지 해 버려서[8] 한 달 안에 1승을 추가로 올려야 하는 상황이다. 일단 판웨이룬과 동갑인 린웨핑 감독은 선발등판의 기회를 더 줄 것이라 밝혔다.
끝내 150을 달성하지 못하는 바람에 최후의 방법으로 본인 은퇴경기에서(…) 150승을 노린다고 한다. 보통 야수의 경우 은퇴경기에서 풀 출장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투수의 경우 형식적으로 1타자만 상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150승을 위해 은퇴경기에서도 전력투구를 시키겠다는 것. 대만 언론에서는 가장 긴장되는 은퇴경기라고 표현했다.
타이페이돔에서 열린 은퇴경기에서 6.2이닝 4실점으로 분투했으나 한점도 내지 못하는 타자들 덕에 결국 실패하고 통산 149승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이 다음날에는 타이난으로 내려가 연고지 팬들 앞에서 은퇴식을 또 치르며 완전히 은퇴하게 되었다.
[1] 당시 CPBL은 시즌을 앞두고, 시즌 중, 시즌 직후 3번의 드래프트를 실시했다. 이 중 시즌후에 하는 드래프트는 대체선수 드래프트라고 야구선수 신분으로 병역을 마친(구단 대체훈련선수 혹은 국훈중심 야구단) 선수들 전용이었다.[2] 신장질환이 지병으로 있다고 한다.[3] 선수생활을 2003년부터 21년째 해 오는데 첫 8년간 98승을 찍고 이후 14년간 51승에 그쳤다. 마지막 선발 10승을 달성한 2010년 기준으로 28살이었다. 2024년 8월 기준으로 은퇴까지 약 한 달 남았는데 이 사이에 승리를 올릴 수만 있다면 150승을 달성하게 된다. 사실 첫 8년간의 퍼포먼스를 30대 중반까지만 유지했어도 200승이 가능했을 선수였지만 너무 빠르게 폼이 무너져버렸다.[4] 1981년생으로 2004년 청타이 선스(2004년을 끝내고 팀은 해체되었다.)의 2라운드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하였다. 하지만 드래프트에 지명받은 그 해 팀이 해체되면서 분배 드래프트로 중신 웨일스에 갔고, 이후 중신 웨일스도 해체되면서 또 분배 드래프트로 싱농 불스에 갔다. 프로 생활 내내 무난한 중간계투로 뛰었다. 2016년 은퇴.[5] 1978년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직행하였으나 부상 문제로 입단 1년만에 방출당했다. 이후 대만에 돌아와 싱농 불스의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대만에서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특출나지는 않지만 1군에선 자주 나온 투수로 커리어를 마쳤다.[6] 이 시즌들 중 2008년을 제외한 7시즌에 규정이닝을 채웠고 그 중 5시즌은 2점대, 2시즌은 3점대 ERA를 기록했다.[7] 약 8억 천만원. 당시 대만에서는 연봉 1억만 찍어도 팀내 최고 연봉자의 자리를 다퉜다. 사실 지금도 연봉 1억을 못 넘기는 1군 선수가 꽤 있는 곳이 대만이다.[8] 9월 28일 타이베이돔에서 은퇴경기를 하고, 9월 29일 홈인 타이난으로 이동하여 홈에서 은퇴 세레모니를 별도로 진행한다고 한다.[9] 실제로 ptt 야구게시판 같은 대만 커뮤니티에 가면 진짜 이런 댓글이 많이 달렸다(…). 다만 이런 식으로 150승을 안겨주면 졸렬하게 얻은 150승이라고 까일 게 뻔하니 린웨핑 감독은 이런 방법은 시도조차 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