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나무위키:프로젝트/중국 근현대사에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
이름 |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ф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미프 |
본명 |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ортус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포르투스 |
국적 | 러시아 제국 → 러시아 공화국 → 소련 |
출생 | 1901년 8월 3일 러시아 제국, 헤르손 구베르니야 |
사망 | 1938년 9월 10일 (37세) 소련 |
학력 | 스베르들롭스크 공산주의 대학 졸업 |
직업 | 정치인, 작가 |
정당 | 소련 공산당 |
종교 | 국가 무신론 |
1. 개요
소련의 정치가이자 작가. 1925년 이후 모스크바 손중산 대학 부총장 겸 코민테른 중국 부처 차관을 역임하면서 중국의 공산혁명을 지도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왕밍 등 28인의 볼셰비키를 후원하여 중국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대장정 이후 잘못된 군사 교리로 당에 막심한 피해를 안겼다는 비판을 받았고 1938년에 대숙청 도중에 처형되었다.2. 생애
2.1. 초기 경력
파벨 미프는 1901년 8월 3일 러시아 제국 헤르손 구베르니야의 지역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살 때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비밀 혁명조직에 참가했다. 1917년 5월에 러시아 볼셰비키당에 가입했으며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 내전에 참가해 폴란드 전선에 투입되었다. 미프는 전쟁이 어느정도 마무리될 무렵인 1920년에 스베르들롭스크 공산주의 대학에 입학해 1921년까지 부르주아 혁명과 국가 식민지 혁명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이때 그는 극동 공산혁명 문제를 자신의 연구 방향으로 정했다. 이후 미프는 1923년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당원이 되어 1925년까지 활동했다.2.2. 손중산 대학의 부총장
1925년 3월 12일,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쑨원이 사망했다. 이에 소련 정부는 국민당과 협의하에 모스크바에 손중산대학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때 극동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하던 미프가 대학 부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 혁명을 연구하고 지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손중산대학 학생들의 출신 성분은 매우 다양했다. 중국 국민당 및 공산당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중국 청년단체에서 유학온 이들도 있었고 펑위샹 등 일부 군벌의 자제들도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미프는 이중 일부 학생을 포섭해 교장 카를 라데크와의 학권 투쟁을 전개했다.이 시기 미프는 왕밍을 주목했다. 왕밍은 마르크스 레닌 이론 수업에 임할 때마다 앞장서서 미프를 찬양했다. 당시 왕밍과 같은반 학생이었던 장샤오둥(庄晓东)은 "왕밍은 미프 부총장이 레닌주의 이론수업을 할때마다 열렬하게 발언했다. 왕밍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왕밍의 침이 내 얼굴에 튀는 걸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얼굴을 한쪽으로 돌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수업을 듣게 됐을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미프는 자신의 수업에 열렬히 참여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왕밍을 주목하고 그야말로 중국의 공산혁명을 이끌어낼 지도자감이라고 확신했다.
1926년 여름, 손중산대학의 당 조직을 누가 지도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학생들 간의 대립이 불거졌다. 런줘쉬안(任卓宣) 등 일부 학생들은 '중국공산중산대학 모스크바지부'라는 단체를 조직해 손중산대학에서 단순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러시아를 배우는 데서 그치지 말고 중국으로 돌아가 혁명 활동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르자는 이들과 맞섰다. 이때 왕밍은 런쥐쉬안 등의 주장에 불만을 품은 미프의 의중을 꿰뚫어보고 런줘쉬안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왕밍은 승리를 거뒀고 손중산대학 당 지부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간부가 맡았다. 이후 왕밍은 손중산대학 학생공사 주석이 되어 미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927년 1월, 코민테른은 미프를 소련공산당 중국대표단장으로 임명하고 중국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대표단의 임무는 중국 공산당 중앙의 위탁을 받아 대중 선전과 당의 건설 사업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미프는 즉시 왕밍을 통역관으로 삼아 중국으로 데려갔다. 미프 일행은 3월에 광저우에 도착했고 상하이, 우한 등을 연이어 방문했다. 이때 미프는 상하이 노동자들이 무장봉기를 개시한 것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감행한 직후, 중국 공산당은 우한에서 제5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했다. 미프는 코민테른 대표로서 회의에 출석했고 왕밍은 미프의 통역으로서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7차 공산당 국제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제출한 중국 혁명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받아들여 천두슈가 '우경주의'의 과오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영도권을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제적이고 실행 가능한 방법이 제시되지 못했고, 천두슈는 여전히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회의 직후, 미프는 왕밍으로 하여금 중앙 선전 업무를 주관하게 하려 했고, 천두슈는 미프의 압력을 받고 왕밍을 중앙선전부 비서로 임명했다.
이무렵, 스탈린과 의견 충돌을 벌이던 카를 라데크가 모스크바 손중산대학교 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에 미프는 왕밍을 데리고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으로 돌아갔다. 학교로 돌아간 미프는 교무파와 지부파의 대립이 극렬하게 벌어지고 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교무파는 학교의 당무가 지부파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고 주장헀고 지부파는 교무파 때문에 학교의 교무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반박했다. 쌍방은 서로 양보하지 않아, 7일간 논쟁을 벌였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일부 학생들은 이 대립에 참가하기 싫어해 '제 3세력'으로 불렸다. 이때 왕밍은 제 3세력을 굳건히 장악하고 이를 이용해 지부파와 연합하여 교무파를 공격해 손중산대학 권력을 전면 장악하는 작전을 구사해 학권 장악에 성공했고, 미프는 만 26세에 손중산대학 총장에 정식으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왕밍은 미프의 심복으로서 손중산대학 당지부를 장악했고, 반대파들은 왕밍의 추종자들을 28인의 볼셰비키라고 불렀다.
2.3. 코민테른 중국지부 책임자
1928년 6월 18일, 모스크바 외곽의 '은색 별장'에서 중국 공산당 제6차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미프는 이 회의에 참석해 토지 문제, 농민, 그리고 다른 조직의 문제 해결안의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이때 왕밍은 미프에 의해 번역과 주임으로 추천되었다. 미프는 왕밍이 중앙 지도부에 발탁되기를 희망했으며 샹중파에게 당 총비서를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다른 중국 대표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더이상 중국 주재대표를 파견하지 않고 취추바이, 장궈타오, 덩중샤(邓中夏), 왕뤄페이(王若飞) 등으로 대표단을 구성해 중국 혁명을 지도하게 했다.1929년, 코민테른은 '청당운동'을 전개했다. 왕밍은 미프의 지시에 따라 취추바이를 비롯한 중국 대표단을 "손중산대학의 파벌 투쟁에서 '반당 소조직'의 배후"라고 비난했다. 코민테른은 미프의 진언에 따라 중국 대표단 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대표단의 각종 오류로 대다수 중국 학생들에게 명성을 잃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결의안이 발표된 후 취추바이는 해직되어 중국으로 돌아갔고 왕밍이 중국 공산당의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1929년 4월, 왕밍은 귀국했다. 이후 그는 상하이에 파견되어 당 중앙 선전부에서 일했다. 그런데 1930년 1월 상하이 노동조합 연맹에 참석한 왕밍은 영국 순찰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때 왕밍은 자신의 신변을 두려워한 나머지 당 중앙에 편지를 보냈고, 그 바람에 영국 순찰관들이 당 중앙의 위치를 인지하게 하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하지만 영국 순찰대는 왕밍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고 왕밍이 편지를 보낸 곳이 공산당의 비밀기관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후 왕밍은 적색구난회 상하이 주재대표단이 3000위안의 보석금을 지불함으로서 풀려났고 당의 비밀 기관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리리싼이 주재한 중국 공산당 중앙은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왕밍이 당의 기관을 폭로한 과오를 범했다고 주장하며 그의 실권을 박탈했다.
1930년 12월, 미프는 코민테른 대표로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왕밍을 따로 불러서 현지 상황에 대한 보고를 듣고 그를 복권시키기로 결심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은 미프의 압력을 받고 어쩔 수 없이 6기 4중전회를 개최했다. 1931년 1월 7일, 6기 4중전회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다. 명목상으로는 공산당 주석 샹중파가 회의를 주최했지만 실제로는 미프가 회의를 이끌었다. 미프는 회의 전에 중국 공산당 4중전회 결의안의 초안을 직접 작성했고 코민테른 극동국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과 후부위원 명단을 임의로 작성했다. 이후 미프는 회의에서 리리싼과 취추바이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왕밍을 지원했고, 결국 회의는 왕밍의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위원 선출에 동의하고 왕밍의 노선을 따르는 결의안을 체택했다. 이로써 왕밍 등의 소련 유학파가 현지 중국 공산당원들을 제치고 당의 실권을 장악했다.
미프는 목적이 달성되자 8월에 소련으로 돌아갔다. 코민테른은 미프의 보고서에 따라 <중국 공산당의 임무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고 4중전회와 왕밍의 집권에 대해 완전한 지지를 표명했다. 미프는 소련에서 중국 혁명에 관한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그는 연이어 코민테른 제12, 13차 회의에 참석했으며 동방공산주의 노동대학 총장과 민족 식민지 문제과 학원장을 역임했으며 1935년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