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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케이힐/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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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밀월 FC 1기(1998.5~2004.6)1.2. 에버튼 FC(2004.7~2012.6)1.3. 뉴욕 레드불스(2012.7~2015.1)1.4. 상하이 선화(2015.2~2016.2)1.5. 항저우 뤼청(2016.2~6)1.6. 멜버른 시티 FC(2016.8~2017.12)1.7. 밀월 FC 2기(2018.1~6)1.8. 잠셰드푸르 FC(2018.7~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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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케이힐은 유소년 클럽 시드니 올림픽에서 5년을 보낸 뒤 그리스 문화를 배우고 심지어 그리스어까지 배웠던 케이힐은 코치가 자신이 너무 작고 느리다고 여겨져 방출되었으며 좌절에 낙담한 그는 속도와 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시드니 근교의 리드콤에 있는 뉴사우스웨일스 스포츠 연구소에 합류했다. 같은 해, 그는 시드니 올림픽에서 18세 이하 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 결과 1군으로 승격되었고 15세의 나이로 클럽에서 뛰는 최연소 선수가 되었으며, 교체 선수로 데뷔를 하고 헤딩으로 첫 골을 넣었다.

시즌이 끝날 무렵, 그는 18세 이하, 21세 이하, 성인팀을 통틀어 총 30골을 기록하며 클럽의 최고 득점자로 부상했다. 그 후 시드니 유나이티드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21세 이하 팀의 일원이 되었고, 그곳에서 필 파벨라 감독 밑에서 상당한 출전 시간을 받았고 결국 1997년 3월 22일 세인트 조지 스타디움에서 세인트 조지와의 0-0 리그 무승부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시니어 데뷔를 했다.

케이힐이 영국에 앨런 뱃스포드에게 재능을 시험받을 기회가 생겼는데 그에게 여행 비용을 대느라 1만 달러를 대출 받았고 가족들은 파산하고 빚을 지게 되었는데, 형은 빚을 갚고자 축구와 학업을 그만두고 기계공으로 하루종일 일했다고 전해진다.

1.1. 밀월 FC 1기(1998.5~2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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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의 시드니 유나이티드 유스팀을 거쳐 밀월 유스 팀에서 1년을 보낸 뒤, 1998년 5월 2일 AFC 본머스전에 출전하며 프로 데뷔를 한 케이힐은 다음 시즌부터 1군 레귤러 멤버로 활약하며 1998-98 시즌에 풋볼 리그 컵 결승 진출을 이끌었고, 2000-01 시즌에는 3부리그에서 구단 역사상 최다 승점인 93점을 기록하며 2부리그 승격을 확정짓는데 견인했다.

밀월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냈던 2003-04 시즌에는 선덜랜드 AFC와의 FA컵 준결승전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결승 진출시켰고, UEFA 컵 진출권까지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결승에서는 아쉽게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만나 전력 차를 실감하며 0:3으로 패하면서 아쉽게 우승컵을 안기지는 못했지만, 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하며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케이힐은 밀월에서 6시즌동안 249경기에 출전하여 56골을 기록했다.

1.2. 에버튼 FC(2004.7~2012.6)

파일:external/i3.liverpoolecho.co.uk/Tim-Cahill.jpg
프리미어 리그에서 기록한 골들

2004-05 시즌을 앞두고, 크리스탈 팰리스의 관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150만 파운드에 에버튼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에버튼에서 케이힐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첫 시즌부터 최상위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에서 주전으로 맹활약 했다. 커리어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하여 구단 최다 득점자였으며[1], 팀을 4위로 이끌어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으로 보내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2]

이후에도 케이힐은 미켈 아르테타, 리온 오스만, 마루앙 펠라이니 등 훌륭한 미드필더들과 함께 에버튼의 강력한 미드필더 진을 형성하여 에버튼을 중상위권 팀으로 유지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고 2006년 10월, 케이힐은 발롱도르 50인 후보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는 무릎과 발 부상으로 2006-07 시즌의 대부분을 결장했지만 시즌이 끝날 무렵 5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케이힐은 2007-08 시즌 도중 부상에서 복귀하여 2007년 10월 25일 수페르리가 엘라다라리사 FC 와의 홈 경기인 클럽의 첫 번째 UEFA 컵 조별리그 경기에서 14분 만에 다이빙 헤딩슛으로 득점하여 3-1 승리를 거두었고 10월 31일 리그 컵에서 루턴 타운을 상대로 연장전 승리를 거두며 에버턴을 5년여 만에 첫 리그 컵 8강에 진출시켰다. 그의 에버턴 소속 100번째 프리미어 리그 출전 경기는 선더랜드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고 야쿠부 등 공격수들이 줄부상을 당한 2008-09 시즌에는 사실상의 공격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 역할에서 1월 19일 그는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후반 동점골을 기록하여 딕시 딘 이후 안필드에서 통산 세번의 득점을 올린 첫 번째 에버튼 선수가 되었다. 그의 통산 100번째 골은 2009년 1월 28일 구디슨에서 열린 아스널과의 경기에서 기록하였는데 리버풀에 이어서 2경기 연속골이다.

2009-10 시즌 후반에 FA컵 3라운드에서 칼라일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며 에버턴 소속으로 50번째 골을 기록했으며 2010년 4월 25일, 풀럼과의 경기에서는 에버튼 소속으로 200번째 출전을 달성했다.
에버튼 팬들은 그가 약간 키가 작고 날씬하기 때문에 찰스 디킨스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Tiny Tim"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2010년 4월 14일 아스톤 빌라 FC를 상대로 두 골을 기록했는데, 두 골 모두 헤딩으로 득점하여 시즌 골 기록을 9골로 늘렸으며 3일 후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케이힐은 90분에 결승골을 터뜨려 에버턴에게 3-2 승리를 안겨주었다.

2010-11 시즌 아시안컵에 차출되기 전 전반기에는 리그에서 8골을 넣을 정도로 득점 감각이 뛰어났으나 아시안컵에서 발 부상을 안고 오면서 후반기에는 침묵했다. 이 골가뭄은 2011-12시즌까지 이어져 2010년 12월 맨시티전 득점 이후 2012년 1월 블랙번전에서 득점하기 전까지 34경기 연속으로 무득점을 기록했었다.

2011-12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날 것으로 밝혀지면서 8년간 에버튼 생활을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5월 13일, 에서 치러진 뉴캐슬과의 최종전에서 경기 종료 후 상대 미드필더인 요앙 카바예와 언쟁을 오간 뒤 폭력적인 행동으로 퇴장을 당하면서 아쉬운 마무리를 했다. 이후 케이힐은 "클럽과 팬들을 포함한 에버튼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지난 8년 동안 에버튼 선수가 된 것은 특권이었고 매우 영광이었다. 떠나는 결정은 어려웠지만, 나는 항상 에버튼을 지원할 것이며, 클럽의 미래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밝히면서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프리미어 리그 통산 228경기 56골 23도움 에버튼 통산 278경기 69골 29도움을 기록하였는데 프리미어 리그 에버튼 구단 최다 득점 3위의 기록이다. 기록

강팀에게 기록한 순도 높은 골과 도움들도 많았는데 아스널에게서 통산 4골 1도움 리버풀에게 통산 5골, 첼시에게 통산 3도움, 맨유에게 통산 2골, 토트넘[3]에게 2골을 기록하였으며 본격적으로 강팀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2009-10 맨시티에게서 2골 1도움을 기록하였다.

1.3. 뉴욕 레드불스(2012.7~2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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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6일, 케이힐은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하면서 MLS로 진출했다. 이로써 프리미어 리그에서 수년간 상대했던 티에리 앙리와 같은 팀에서 재회하게 됐다.

2013년 10월 20일, 휴스턴 다이너모와의 경기에서 8초만에 득점하여 MLS 역사상 가장 빠른 득점 기록을 세웠다.[4]

레드불스에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며 2013 시즌이 끝난 뒤 MLS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2015년 1월 26일, 아시안컵 4강 UAE전을 앞둔 묘한 시점에서 UAE의 알 와다 이적설이 나왔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A리그로의 리턴을 기대했던 호주 팬들은 무척 아쉬워하는 중이다. 스타 플레이어가 은퇴를 앞두고 중동에 가는 것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1.4. 상하이 선화(2015.2~2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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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일, 상하이 선화로 이적하였다.

2015 시즌이 끝난 뒤 상하이와 연장 계약을 체결했지만 새로 부임한 그레고리오 만자노 감독이 전력외 통보를 하며 결국 2016년 2월 16일자로 팀과 계약을 해지하였다. 위약금은 두둑히 챙길듯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2월 17일날 케이힐의 에이전트가 한국에 체류중이라 하며 K리그행도 적극적으로 검토중이라고 한다. 중국 슈퍼리그 항저우 그린타운 에서도 관심 보이고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항저우 부회장은 케이힐 영입에 부인한 상태 48시간 안에는 거취가 결정될 거라고 한다.

나이가 많긴해도 지난 중국리그에서 준수한 활약을 보여줌으로 아시아리그 에서 검증받은거나 마찬가지기에 많은 팬들이 그의 K리그 행을 바라고 있는 중이다. 2월 19일 오후에 나온 기사로는 중국, 일본, 한국 세곳에서 영입제안을 받았고, 호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현재 K리그에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포항 스틸러스, 제주 유나이티드, 성남 FC, 서울 이랜드가 관심을 가지고있고 이중 약 3구단이 정식 오퍼를 보냈다는 루머가 있다.

1.5. 항저우 뤼청(2016.2~6)

2016년 2월 21일 강하게 링크되었던 항저우 그린타운(항저우 뤼청)과 6월까지의 단기 계약을 맺었다. 항저우 감독으로 홍명보가 부임한 상태라 이래저래 국내 언론에 많이 노출될 듯 싶다.

1.6. 멜버른 시티 FC(2016.8~2017.12)

계약기간 종료 후 재계약을 맺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와 2016년 8월 11일, 멜버른 시티 FC에 3년 계약의 조건으로 입단했다. 2년동안은 선수로 활약하고, 3년차부터는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한다.

10월 15일 멜버른 빅토리 FC와의 맬버른 더비에서 A-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후반 27분 35m 거리에서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득점을 신고했고, 더비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결과는 4:1.

2017년 2월 4일, 멜버른 빅토리와의 경기에서 1:1 동점 상황에서 교체로 출전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두번째 골 실점에 대해[5] 핀정에 항의하다가 심판에게 모욕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퇴장을 당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다. 호주 축구 역사상 선수가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에 퇴장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2017년 12월 6일, 소속팀과 계약을 해지하였다. 기사 그러나 호주가 월드컵에 진출했고, 본인도 자신의 커리어를 월드컵에서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에 그러기 위해선 월드컵 개막 전까지 뛸 팀을 찾아야 했다.

1.7. 밀월 FC 2기(2018.1~6)

본인이 프로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던 밀월 FC에 2018년 1월, 단기 계약을 맺으며 입단했고, 2017-18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났다.

1.8. 잠셰드푸르 FC(2018.7~2019.3)

그리고 2018-19 시즌 인도 슈퍼리그 잠셰드푸르 FC와 계약을 맺으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2019년 3월 28일, 현역 은퇴 소식을 알렸다.


[1] 11골[2] 아쉽게도 3차예선에서 비야레알에게 패하며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3] 2004-05 시즌 9위, 2009-10시즌 4위 시절에[4] 이후 2015년 마이크 그렐라에 의해 깨졌다.[5] 실점 당시 선심은 이를 오프사이드로 판정했다. 그러나 주심이 선심의 판정을 뒤집고 득점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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