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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00:01:16

톰 랜드리

톰 랜드리의 수상 이력 /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슈퍼볼 로고.svg
VI XII

파일:NFL 로고.svg 1966년 NFL 올해의 감독상
조지 할라스
(시카고 베어스)
톰 랜드리
(댈러스 카우보이스)
조지 알렌
(로스앤젤레스 램스)
돈 슐라
(볼티모어 콜츠)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b0b7bc,#191919><tablebgcolor=#b0b7bc,#191919> 파일:댈러스 카우보이스 로고.svg댈러스 카우보이스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b0b7bc,#e89b02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55555,#aaaaaa
1960 ~ 현재
1대
톰 랜드리
★★☆☆☆
(1960 ~ 1988)
2대
지미 존슨
★★
(1989 ~ 1993)
3대
배리 스위처

(1994 ~ 1997)
4대
챈 게일리
(1998 ~ 1999)
5대
데이브 캄포
(2000 ~ 2002)
6대
빌 파셀스
(2003 ~ 2006)
7대
웨이드 필립스*
(2007 ~ 2010)
8대
제이슨 개릿
(2010 ~ 2019)
9대
마이크 맥카시
(2020 ~ 현재)
슈퍼볼 우승 슈퍼볼 준우승 * 시즌 도중 경질
}}}}}}}}}}}}}}} ||

파일:Pro Football Hall of Fame logo.png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Hall of Fame Landry.jpg
톰 랜드리
헌액 연도 1990년
}}} ||
파일:external/a.espncdn.com/dm_130602_NFL_20Greatest_8_Tom_Landry.jpg
토머스 웨이드 "톰" 랜드리
Thomas Wade "Tom" Landry
출생 1924년 9월 11일
텍사스주 미션
사망 2000년 2월 12일 (향년 75세)
텍사스댈러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텍사스 대학교/오스틴 캠퍼스
직업 미식축구 선수 (코너백 / 은퇴)
감독
프로입단 1948년 AAFC 드래프트 19라운드 128순위
뉴욕 양키스 지명
소속팀 뉴욕 양키스 (1949)
뉴욕 자이언츠 (1950~1955)
지도자 뉴욕 자이언츠 수비 코디네이터 (1954~1959)
댈러스 카우보이스 감독 (1960~1988)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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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L
슈퍼볼 우승 2회 (VI, XII)
NFL 챔피언 1회 (1956)
프로볼 1회 (1954)
NFL 올해의 감독상 (1966)
NFL 퍼스트팀 올프로 1회 (1954)
NFL 100주년 기념 올타임 팀 (2019)
명예의 전당 (1990)

NFL 펀팅 야드 리더 2회 (1952, 1955)
SN 올해의 감독상 1회 (1966)
UPI 올해의 감독상 1회 (1966)
UPI NFC 올해의 감독상 1회 (1975)
댈러스 카우보이스 링 오브 아너

1. 개요2. 생애
2.1. 선수 경력2.2. 지도자 경력2.3. 은퇴 이후
3. 평가4. 연도별 성적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미국의 前 미식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22년 기준으로 NFL에서 가장 많이 승리한 감독 중 한명이자 댈러스 카우보이스에서 29년 동안 감독직을 역임했다. 미식축구의 전설 중 한명으로 불리는 감독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통산 승수는 2023년 기준 역대 4위(250승, 참고)

2. 생애

2.1. 선수 경력

학창시절부터 학업과 운동 모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특히 야구와 미식축구에 능하여 텍사스 대학교/오스틴 캠퍼스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했다. 2차 대전에 공군으로 참전했다가 1946년에 학교로 복귀를 하였고 1952년에 학업을 마쳤다.
파일:external/www.baseball-cards.com/f55b-152.jpg
뉴욕 자이언츠 시절의 랜드리
1949년에 AAFC 팀인 뉴욕 양키스[1]에 입단했으나 AAFC가 해체되고 NFL 팀인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다만 그의 선수생활 6년 간 실적은 별 볼일 없었다.

2.2. 지도자 경력

파일:external/hapmoran.org/Landry.jpg
뉴욕 자이언츠 코치 시절의 모습. 맨 오른쪽이 빈스 롬바르디.
선수생활 도중인 1954년에 뉴욕 자이언츠의 수비 코디네이터로 부임해 당시 감독이던 짐 리 하웰(Jim Lee Howell) 옆에서 5년 동안 코치수업을 하다가 1960년에 댈러스 카우보이스가 창단되자 감독으로 부임을 하였다.

창단 첫 해에는 신생팀이라 그런지 12전 1무 11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시작해 1964년까지 하위권을 맴돌다가 밥 릴리, 돈 퍼킨스, 리로이 조던 등을 중심으로 1966년에 디비전 1위를 차지하면서 첫 위닝시즌을 달성해냈다. 그러나 1970년까지 정규시즌에선 강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선 무기력했는데 지구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66년과 67년엔 과거 뉴욕 자이언츠 코칭스탭 동료였던 빈스 롬바르디 감독이 지휘하는 그린베이 패커스에게 무릎을 꿇었는데, 특히 1967 시즌 결승전에선 혹한 속에서 끈질기게 버티다가 17-21로 패배했다.

1968 시즌엔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게 졌고, 처음 진출한 슈퍼볼 V(5회)에서는 볼티모어 콜츠에게 16-13으로 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쳤으며, 당시 선수로 뛰던 피터 젠트의 저서 <노스 댈러스 포티>에 의하면 팀 선수들은 술과 마약에 빠지며 파티를 즐기는 등 기강이 엉망이었다.
파일:external/thenypost.files.wordpress.com/landry1.jpg
슈퍼볼 XII 우승 후 기뻐하는 선수들과 랜드리
다만 1969년에 영입한 베트남전 참전자 출신인 로저 스타우벅을 중심으로 팀 기강을 다져 1972년 2년 연속으로 슈퍼볼에 오르게 된다. 슈퍼볼 VI(6회)에서 마이애미 돌핀스를 24-3으로 승리하여 첫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를 들었다. 4년 후인 1976년 슈퍼볼 X(10회)에 올랐으나 피츠버그 스틸러스한테 패했다. 이 후 1978년 슈퍼볼 XII(12회) 덴버 브롱코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두 번째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1978년에도 슈퍼볼 XIII(13회)에 올랐으나 피츠버그 스틸러스한테 다시 한번 패배한다. 랜드리의 지휘 아래 카우보이스는 70년대에만 5번의 슈퍼볼에 올라 2번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다면 나쁜 일도 있는 법. 1981년 NFC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조 몬태나에게 'The Catch'라고 불리는 극적인 역전 터치다운을 허용한 후 슈퍼볼 진출이 좌절됐고, 1970년대를 빛낸 영광의 멤버들이 떠나면서 침체기가 시작돼 1986년 이후 플레이오프조차 가지 못했으며 랜드리 자신도 환갑을 넘으면서 새 풋볼 환경에 적응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1988년 시즌이 끝난 이후에 팀을 산 제리 존스 구단주는 랜드리를 경질시켰고, 이로써 그의 지도자 인생 34년이 종결되었다. 랜드리는 카우보이스에서 250승을 기록했고 이는 현재까지 팀의 최다승리 기록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2.3. 은퇴 이후

1990년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과 1993년 텍사스 스타디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00년 2월 12일에 백혈병으로 투병 도중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톰 랜드리는 미식축구계의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에 비할 수 있는 현대 미식축구 전술의 아버지인 인물이고 특히 수비전술을 현대적으로 정립한데 기여한 가장 창조적인 미식축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감독이다.

과거 럭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러닝백이 달리는 게 중심이었던 과거의 풋볼은 공격팀 7명이 LOS에 정렬하면 같이 맞불을 놓는 7-다이아몬드 혹은 7-2의 흐름이 일반적이었다. 언제나 구기종목에서 공수의 기본은 선수와 선수의 맨투맨 대응이기 때문에 수비수는 항상 공격수에 1:1로 따라가기 위해 숫자를 맞춰야했고 늘 수동적일수 밖에 없었다. 톰 랜드리는 이때 공격팀과는 달리 수비팀은 공 스냅전에 LOS를 넘지만 않으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규칙에 주목하여 수비 라인맨이 스냅 전에 자유롭게 위치를 바꾸는 변화를 시도했다. 축구로 치면 오버래핑, 압박수비, 포지션 스위치를 총망라한 유기적인 수비전환으로 공격수들의 각개격파를 노린 것이다.

이로 인해 공격수들은 수비수들이 눈앞에서 위치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걸 보고 전술적 혼동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수비수들이 오히려 경기 주도권을 쥐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톰 랜드리의 시도를 통해 현대 미식축구의 수비는 단지 공격수들의 볼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공이 움직이기 전에 미리 공격수를 쓰러뜨린다라는 근본적인 마인드 변화가 생겼고 이런 적극적인 공세의 수비라는 개념이 바로 패스러쉬의 정립.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시대를 낳게한 원동력이다.

그런 수비개념의 변화에 따라 다시 정리되어 확립된 수비체계가 바로 현대 미식축구의 기본 수비스킴중 하나인 4-3 디펜스이다. 기존 사람수대로 붙던 수비 라인맨들의 숫자를 줄이고 이를 라인배커로 대체해, 이들의 유연한 수비라인 참여 혹은 커버플레이로 공격진의 다양한 패턴을 하나의 포메이션에서 변용하면서 대응하게 된 것이다.

이 수비에 대응하기 위해 빌 월시가 개발한 것이 바로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로 "수비수 니들이 스냅전에 움직인다고? 그럼 우리도 스냅전에 전술을 바꾼다!."라는 개념에서 시작한 공격 전략이다. 톰 랜드리가 코치 커리어의 끝을 맞을때 등장했던 팀이 80년대의 팀이자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의 원조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그 야전사령관 조 몬태나였음을 상기하면 그 나이너스를 상대로 벌였던 역사적인 경기인 1981년 NFC 챔피언쉽, 그리고 이 경기의 결승 터치 다운 패스를 잡아낸 드와이트 클락의 'The Catch'가 미식축구 역사의 가장 거대한 변화의 물결의 시작을 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코칭 트리에는 댄 리브스(전 덴버 브롱코스 감독), 마이크 딧카(전 시카고 베어스 감독), 존 맥코빅(전 캔자스시티 치프스 감독), 진 스털링스[2](전 피닉스 카디널스 감독) 등이 속해 있다.

4. 연도별 성적

연도별 성적
<rowcolor=#00224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1960 DAL 12 0 11 1 .042 지구 7위 -
1961 14 4 9 1 .321 지구 6위 -
1962 14 5 8 1 .393 지구 5위 -
1963 14 4 10 0 .286 지구 5위 -
1964 14 5 8 1 .393 지구 5위 -
1965 14 7 7 0 .500 지구 2위 -
1966 14 10 3 1 .750 지구 1위 CC 탈락
1967 14 9 5 0 .643 지구 1위 CC 탈락
1968 14 12 2 0 .857 지구 1위 ECC 탈락
1969 14 11 2 1 .821 지구 1위 ECC 탈락
1970 14 10 4 0 .714 지구 1위 슈퍼볼 준우승
1971 14 11 3 0 .786 지구 1위 슈퍼볼 우승
1972 14 10 4 0 .714 지구 2위 CC 탈락
1973 14 10 4 0 .714 지구 1위 CC 탈락
1974 14 8 6 0 .571 지구 3위 -
1975 14 10 4 0 .714 지구 2위 슈퍼볼 준우승
1976 14 11 3 0 .786 지구 1위 DR 탈락
1977 14 12 2 0 .857 지구 1위 슈퍼볼 우승
1978 16 12 4 0 .750 지구 1위 슈퍼볼 준우승
1979 16 11 5 0 .688 지구 1위 DR 탈락
1980 16 12 4 0 .750 지구 2위 CC 탈락
1981 16 12 4 0 .750 지구 1위 CC 탈락
1982 9 6 3 0 .667 지구 2위 CC 탈락
1983 16 12 4 0 .750 지구 2위 WC 탈락
1984 16 9 7 0 .563 지구 4위 -
1985 16 10 6 0 .667 지구 1위 DR 탈락
1986 16 7 9 0 .438 지구 3위 -
1987 15 7 8 0 .467 지구 2위 -
1988 16 3 13 0 .188 지구 5위 -
총계 418 250 162 6 .605 슈퍼볼 2승 3패 7CC 2ECC 3DR 1WC

5. 관련 문서



[1] 야구팀 뉴욕 양키스와는 관계 없다.[2] 앨라배마 대학교 출신이라 폴 브라이언트 코칭트리에 속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