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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0 20:41:45

킬페리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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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péric II | 킬페리크 2세
파일:메로빙거 왕조의 최후의 왕.jpg
제호 한국어 킬페리크 2세
프랑스어 Chilpéric II
생몰 년도 672년 ~ 721년 2월 13일
재위 기간 네우스트리아의 왕
715년 ~ 718년
프랑크인의 왕
718년 ~ 721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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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 가문에게 실권을 잃고 몰락해가는 왕조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패배해 명목뿐인 국왕으로 전락한 인물. 메로베우스 왕조에서 실권을 쥔 마지막 국왕으로 일컬어진다.

2. 행적

672년 킬데리크 2세와 빌리칠트 왕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으로 다고베르가 있었다. 아버지 킬데리크 2세는 다고베르 1세 사후 궁재가 왕을 밀어내고 전권을 쥐고 각지의 귀족들이 정부의 통제에 불응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왕권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궁재 레오데가리우스를 해임하고 룩셀 수도원에 수감했으며, 왕명에 따르지 않은 보딜로를 잡아다가 막대로 채찍질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보딜로 등 귀족들은 왕을 암살하기로 했다. 675년, 리브리(오늘날 로그네스) 수펭서 사냥하던 킬데리크 2세는 아내 빌리칠트, 다섯살 된 장남 다고베르와 함께 피살당했다. 이때 3살이었던 킬페리크는 수도원에 보내져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성직 활동에 전념했다. 그렇게 40년간 수도자로 지내던 714년, 그의 운명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687년 테르트리 전투에서 정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국왕 테우데리크 3세를 수중에 넣은 피핀 2세는 프랑크 왕국의 단독 궁재로서 27년간 국정을 자기 뜻대로 이끌었다. 그는 권력 세습을 이루기 위해 장남 드로고를 샹파뉴 공작으로 선임했고, 막내아들 그리모알드를 노르데베르트 공작으로 삼았다. 그런데 714년 그리모알드가 모종의 이유로 급사했고, 뒤이어 피핀 2세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후 그리모알드의 아들 테오도랄드가 궁재를 세습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피핀 2세의 미망인인 플레트루다가 섭정을 맡았다.

카롤루스 가문의 권력 독점과 세습에 반감을 품고 있던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715년 상파뉴 인근의 숲에서 아우스트라시아군을 격파하고 카롤루스 가문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뒤 라간프레드를 궁재로 선출했다. 이후 다고베르 3세가 사망하자, 그들은 다니엘 수도자를 수도원에서 꺼낸 뒤 왕에 옹립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그는 4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716년, 킬페리크 2세는 라겐프리드와 함께 카롤루스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정벌하기 위한 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는 프리슬란트 왕 라드부드와 동맹을 맺고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을 상대로 쾰른 인근 평원에서 격파했다. 마르텔은 에펠 산맥으로 숨었고, 킬페리크 2세는 라겐프리드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인 메츠에 입성했다. 이제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플레트루다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고를 넘겼으며, 테오도랄드 역시 궁재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롤루스 가문은 몰락하고 메로베우스 왕조가 부활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와 라겐프리드가 네우스트리아로 돌아갈 때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마르텔은 추종자들을 규합하고 병력을 끌어모은 뒤 돌아가는 적을 추격하여 말메디 인근의 앙블레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717년 3월 21일, 카롤루스 마르텔은 네우스트리아로 진군해 캉브레 인근의 빈시에서 킬페리크 2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아우스트라시아로 귀환한 마르텔은 플레트루다와 테오도랄드를 축출한 뒤 클로타르 4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의 세력이 갈수록 커지자, 킬페리크 2세와 레겐프리드는 아키텐의 공작 외드와 동맹을 맺었다. 718년 초, 킬페리크 2세는 외드의 군대와 연합하여 수아송 인근에서 카롤루스 마르텔과 격돌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대패한 킬페리크 2세는 루아르 강 남쪽으로 도주했고, 라겐프리드는 앙제로 도망쳤다. 이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외드는 킬페리크를 버리고 카를 마르텔에게 귀순했다.

때마침 마르텔이 옹립한 클로타르 4세가 사망했다. 이에 마르텔은 외지에 숨어있던 킬페리크 2세에게 전령을 보내 프랑크 왕국 전역의 왕으로 인정할 테니 자신을 궁재로 인정하고 전권을 쥐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더는 대항할 도리가 없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719년 병사들에 의해 방패 위로 올려져서 모든 프랑크인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명목상일 뿐이었고, 마르텔이 사실상 프랑크 군주로 군림했다. 그 후 실의 속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721년 2월 13일 아르덴의 아티니에서 사망했고, 누용에 안장되었다가 생 드니 대성당에 옮겨졌다. 이후 다고베르 3세의 아들 테우데리크 4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