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타델 (키르케시움 성채) 일대의 위성사진
1. 개요
아랍어 البصيرة영어 Busayrah
시리아 동부의 도시. 마야딘과 아부카말 사이의 유프라테스 강 동안에 위치한다. 고대 시기 두라 에우로포스, 중세 시기 라흐바와 함께 시리아와 이라크의 경계를 이루던 요새 도시 키르케시움 (카르키시야)였다. 전략적 거점이던 도시는 근대 들어 쇠락했고, 지명도 부사이라로 바뀌었다. 현재 인구는 약 7천명이고, 2010년대 중반 다에시가 점령했으나 시리아 민주군이 수복하여 로자바 연방 하에 있다.
2. 키르케시움
아랍어 قرقيسيا영어Circesium
시리아어 ܩܪܩܣܝܢ
그리스어 Κιρκήσιον
유프라테스 강과 하부르 강의 합류 지점에 세워진 성채 도시로,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을 구성했다.
2.1. 역사
성채 추정도
지명은 키리쿠스 (경기장)를 갖춘 도시란 뜻이다. 256년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가 점령한 로마 성채들 중 하나로 처음 기록되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버려진 두라 에우로포스를 대신할 시리아 동부의 요새 도시로 변모시켰다. 363년 율리아누스의 메소포타미아 원정 당시 로마군은 키르케시움에서 부교를 놓아 하부르 강을 건넜다. [1] 다만 원정의 실패 후, 요비아누스 황제가 평화 협정을 통해 사산 제국에 일대를 할양했다. 그러다 4세기 말엽 테오도시우스 1세 시기에 수복되어 제5 파르티카 군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6세기 초엽에는 전란으로 버려져 있다가, 530년경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복구하고 둑스 휘하의 수비대를 배치했다. 573년, 시리아를 침공한 호스로 1세는 부관 아다르마한에게 키르케시움 부근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진격하게 했다. 580년에는 마우리키우스의 로마군이 키르케시움을 후방 보급 기지로 삼아 진격했다. 590년에는 바흐람 추빈의 반란으로 폐위된 호스로 2세가 당도하자 키르케시움 성주 프로부스는 그를 수용, 히에라폴리스로 향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머물게 하였다.
이슬람 정복 당시 키르케시움은 자지라 방면 사령관 이야드 빈 가늠이 파견한 하빕 이븐 마슬라마 알 피흐리에게 전투 없이 항복하였다. (640년경) 이후 카르키시야라 불린 도시는 자지라 주 산하 하부르 군의 치소가 되었다. 2차 피트나 시에는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에 복속하여 우마이야 왕조에 적대한 카이스 부족장 주파르 이븐 알 하리트의 거점이 되었다.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수차례의 시도 끝에 690년, 수개월의 포위 끝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9세기 중반에는 이집트에 기반한 툴룬 왕조 령이 되었다가, 881년 섭정 알 무와팍크의 활약으로 압바스 왕조가 수복하였다. 10세기 함단 왕조 하의 카르티시야에 대해 지리가 알 이스타크리와 이븐 하우칼은 번성하는 도시라 기록하였다. 1260년경 카르키시야는 일 칸국령이 되었는데, 1266년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가 점령하고 몽골-조지아인 수비대를 학살하였다. 다만 이후 그대로 회군하여 재차 일 칸국의 성채로 남았다. 오스만 제국기에 카르키시야는 쇠락하여 마을 수준에 불과했고, 지명도 알 부사이라로 바뀌었다. 20세기 초엽 기준 부사이라에는 폐허가 된 성채 옆, 40여 진흙 집들이 있는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