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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02:11:57

이븐 주바이르

1. 개요2. 활동
2.1. 초기 생애2.2. 후세인 이븐 알리의 조언자2.3. 카르발라 참극2.4. 칼리파 선포2.5. 제2차 무슬림 내전(피트나)2.6. 무크타르와의 대립2.7. 짧은 전성기와 죽음

1. 개요

우마이야 왕조의 세습과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의 죽음(카르발라 참극, 680년)에 반발하여 스스로를 칼리파라 칭하고 봉기하여, 제2차 피트나(제2차 무슬림 내전)를 일으킨 인물이다.

한때 이슬람교의 발흥지인 아라비아 반도 서부 히자즈와 이라크, 이란까지 세력하에 두며, 초기 우마이야 왕조의 존립을 위협했으나, 시리아로 진군할 기회를 활용하지 않고 현 상태에 안주했으며, 오히려 같은 반우마이야 세력이자 쉬아파인 이라크 쿠파의 무크타르를 경계하여 힘을 낭비했다. 이후, 내부를 결속시킨 우마이야 왕조 제5대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반격에 밀려 메카카바에서 692년에 전사했다.

2. 활동

2.1. 초기 생애

쿠라이쉬 부족 중 바누 아사드(Banū Asad) 출신이었던 이븐 주바이르의 풀네임은 아브드 알라(압둘라) 이븐 알 주바이르 이븐 알 아왐(Abd Allah ibn al-Zubayr ibn al-Awwam)이었다. 그의 모친인 아스마 빈트 아비 바크르가 선지자 무함마드의 막내 부인인 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의 자매[1]였기 때문에, 그와 후세인 이븐 알리는 피가 안 섞인 친척이라 할 수 있었다.

이븐 주바이르의 부친인 알 주바이르 이븐 알 아왐(594~656)은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의 치세때인 640년, 명장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동로마 제국령 이집트를 정복할 때 동행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 후, 자신의 동생을 이집트 총독에 앉히며 이슬람의 세속화를 이끌던 우마이야 가문 출신의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이, 그 동생의 폭정에 분노하여 상경한 이집트 군중에 살해되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제4대 정통 칼리파가 되었는데, 알리의 순수성에 기반한 회귀주의에 기득권 세력인 쿠라이쉬 부족 등이 반발하여 발생한 제1차 피트나(제1차 무슬림 내전)에서 무함마드의 막내 부인 아이샤와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가 맞서게 되자,(낙타 전투, 656) 앗 주바이르 부자는 아이샤 편에서 싸웠다.

아이샤의 군대는 그녀 외에도 탈하 이븐 우바이둘라 알 타이미, 마르완, 그리고 압둘라의 아버지인 앗 주바이르 이븐 알 아왐이 지휘했는데,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의 공세때 앗 주바이르는 알리의 말이 떠올랐는지 전선을 이탈해버렸다. 사태를 관망하던 바누 사드의 족장 알 아흐나프 이븐 카이스는 그의 이탈을 전해듣고 무슬림 내전을 일으킨 당사자가 동료들을 버리는 것은 명예롭지 않다며 휘하의 예멘인 아므라 빈 알 자르무즈를 보내 죽이도록 했다. 앗 주바이르의 수급을 본 칼리파 알리는 한때 용맹한 동료였던 그의 허탈한 죽음에 심히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살해되고, 분열된 아이샤 군대가 공중 분해되자,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는 성도 메카로 피신하여 은둔했다.

2.2. 후세인 이븐 알리의 조언자

아버지의 사망 이후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는 쉬아파 진영으로 전향하여,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 이븐 알리와 함께 메디나에서 지냈다.

2.3. 카르발라 참극

2.4. 칼리파 선포

파일:이슬람 피트나.png
684년 봄, 존망의 위기에 몰린 우마이야 왕조. 핑크색이 우마이야 왕조이고, 녹색이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의 세력권이다.

후세인 이븐 알리의 생전에는 그의 권위를 인정하던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는 카르발라 참극 이후 만연한 분노의 기류를 타고, 후세인의 죽음을 거룩한 순교로 승화시키며 지지 세력을 모았다. 압둘라는 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외손인 자신이 후세인 다음으로 칼리파 자격이 있음을 선포했고, 충성 서약('바이아')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우마이야 왕조의 제2대 칼리파 야지드 1세는 곧바로 토벌에 나서는 대신 우선적으로 협상을 제시했는데, 압둘라는 이를 거부하고 히자즈의 메카에서 자립했다.(683년) 그 영향으로 메카 북쪽의 메디나에서도 주민들이 봉기해 야지드 1세의 폐위를 선언하고는 우마이야 조의 시장을 추방한 후, 안사르의 원로인 압둘라 빈 한달라 알 가실을 칼리파로 추대했다. 이로써 다마스쿠스, 메디나, 메카에 세 칼리파가 병존하게 되었다. 메디나의 군중은 마르완을 중심으로 한 1,000여 명의 우마이야 문중을 포위했고, 그들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야지드 1세는 메카의 경우와 달리 곧바로 토벌군을 편성했다.

2.5. 제2차 무슬림 내전(피트나)

683년 9월 24일 우마이야군은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메카를 포위했다. 히자즈인들 뿐만 아니라 카와리즈파 세력까지 수비에 가담했기에 저항은 거세었고, 포위군의 투석기로 카바가 불타고 흑석이 깨지는 피해가 있었다.(10월 31일) 제1차 메카 공방전이 한창이던 11월, 야지드 1세는 사냥 도중 낙마하여 40세를 전후로 한 나이로 요절했다. 당대인들에게 이는 천벌로 여겨졌다. 소식을 접한 우마이야군 지휘관 후세인 빈 누마이르가 휴전을 요청하자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는 이를 수용했다. 그러자 후세인 빈 누마이르는 한발 더 나아가 압둘라에게 복속할테니 함께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여 대권을 차지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진의를 의심한 압둘라는 이를 거절했고, 신임 칼리파로 즉위한 야지드 1세의 아들 무아위야 2세가 회군 명령을 내리자 우마이야군은 메카를 떠났다. 3대 세습으로 즉위한 무아위야 2세는 병약하고 경건했기에 더이상 성지가 파괴되고 동족상잔을 벌이는 대신 압둘라와 평화 협정을 맺었고, 더 나아가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나이가 2배 이상으로 많은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가 제안을 거절하고 공세를 재개하자 무아위야 2세는 칼리파직을 포기하겠다며, 정통 칼리파 시대처럼 슈라 위원회에 선출권을 넘겼다. 이후 잠적하던 20대의 칼리파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684년 2월) 그 후 우마이야 가문은 훗날를 모색했다. 이미 아라비아 반도 전역과 이집트, 이란 등이 반란의 불길에 휩쌓여 있었고, 우마이야 가문의 본거지인 시리아 역시 바누 카이스(아랍 북부)가 족장 앗 다하크 빈 카이스 알 파흐리의 지휘하에 마르즈 라히트 평원에 모여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에 대해 충성을 서약했다. 반면 카이스 부족과 대립하고 있었던 예멘계 바누 칼브(아랍 남부)는 여전히 우마이야 가문에 충성을 다하며, 골란 고원과 하우란 사이의 알 자비야에 모여 칼리파 선출에 나섰다. 자비야 회의때 무아위야 2세의 어린 동생이었던 칼리드와 우마이야 가문의 원로인 마르완이 후보에 올랐고, 연륜이 있는 마르완이 먼저 즉위한 후, 칼리드가 그 후계자가 되며 그 다음에는 종손인 아므르 빈 사이드가 계승하는 구도가 확립되었다.

684년 양측은 마르즈 라히트 전투에서 격돌했고, 그 결과는 카이스 부족의 대패와 앗 다하크의 전사였다. 이로써 바누 칼브와 바누 카이스 간의 원수 관계가 시작되었고, 승리를 거둔 마르완 1세는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즉위식을 거행했다.

2.6. 무크타르와의 대립

파일:2차 피트나 이슬람.png
전쟁의 중반 무렵인 686년의 형세. 서쪽부터 아브드 알 말리크(핑크색),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푸른색), 무크타르(녹색), 카와리즈파(노란색) 순이다.

후세인 이븐 알리의 복수를 주장하며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이라크의 쉬아파 타와빈('참회자들') 군대는 아인 알 와르다(라스 알 아인)에서 후세인 빈 누마이르가 이끄는 20,000명의 우마이야군과 조우했다. 685년 1월 4일에 시작된 전투는 3일간 지속되었고, 초반에는 열정이 넘쳤던 타와빈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날이 갈수록 우마이야군의 수적 우세가 효력을 발휘했다. 결국 반란의 주동자인 술레이만 빈 수라드 쿠자이는 전사했고, 타와빈군 역시 거의 전멸했다. 리파 빈 샷다드만이 대부분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마르즈 라히트 전투의 패잔병들인 카이스 부족이 주둔한 카르키시야로 향했고, 일부 패잔병들은 쿠파로 돌아가 또다른 쉬아파 수령 무크타르에게 합류했다. 이들은 스스로 쉬아 알 마흐디, 쉬아 알 학크, 쉬아 알 무함마드라 칭하며 무크타르군의 중추를 이루었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이 있었던 무크타르는 이븐 알 하니피야를 칼리파로 지지하는 한편 기존 아랍인에 더하여 이란계 마왈리까지 포섭하여 쿠파를 장악했다. 마왈리가 주력인 13,000명의 무크타르 군대는 686년 8월 카지르 전투에서 우바이둘라 & 후세인 빈 누마이르 & 슈라빌을 전사시키며 후세인 이븐 알리와 타와빈군 병사들의 복수를 이루었다. 비록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타와빈 운동의 참가자들은 카르발라 참극의 72인과 마찬가지로 순교자들로 승화되어 쉬아파 반란의 열기를 더하였다.

한편 지원군을 이끌고 동진하던 우마이야 왕조의 제5대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카지르 전투의 패전보를 접하고는 회군했고, 이라크 대신 히자즈로 파병해 메디나를 공격했다. 이에 자신감이 넘치던 무크타르는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에게 동맹을 제안하며 3,000명의 지원군을 보냈다. 뒤늦게 2,000명의 지원군을 보낸 압둘라는 무크타르군이 승리할 경우, 메디나가 그에게 넘어가고 본거지를 빼앗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따라서 우마이야군과 무크타르군이 싸우는 동안 무크타르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주바이르군에 배신당한 무크타르군은 붕괴되었고, 생존자들은 사막으로 도주했다.

5,000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견해 잔여 병력을 수습한 무크타르는 이로써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와 대립하게 되었다. 압둘라는 시리아에 대한 소극적인 공세와는 달리 이라크의 쉬아파 반우마이야 반란군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동생인 무사압 빈 앗 주바이르를 바스라 총독으로 봉해 파견했고, 도시를 접수한 무사압은 스스로를 '도살자'('알 자자르')라 칭하며 군대를 모아 북상했다. 당시 무크타르의 주력군은 우마이야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모술에 배치되어 있었고, 무사압은 3개월 동안 쿠파를 봉쇄했다. 무크타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쿠파 주민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거두었으며, 결국 65세의 무크타르는 17명의 추종자만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가 주바이르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687년 4월) 승리한 무사압 빈 앗 주바이르는 쿠파 주민들에게 비무장 상태로 성문을 나오면 사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주민들이 나타나자 그는 하루에만 7,000명을 학살했고, 숨어 있었던 무크타르의 부인까지 죽였다. 모술의 이브라힘 알 아슈타르가 복속해오면서 이라크는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에 의해 평정되었다.

2.7. 짧은 전성기와 죽음

한편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암살 이후, 숨죽이고 지내던 카와리즈파 세력은 이란 남부의 파르스에서 봉기하여 주바이르군이 장악한 이라크를 위협했다. 이에 무사압 빈 앗 주바이르가 반격에 나서 이들을 격파하고, 역으로 파르스까지 점령하며 이란에 대한 영향력까지 확보하는 대공을 세웠다. 이렇게 압둘라의 주바이르 정권이 이슬람권의 동부를 공고히 장악하자 대권의 형세는 양강 구도로 굳어졌다.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가 아라비아 반도, 동생 무사압 빈 앗 주바이르가 이라크 및 이란을 담당한 것과 비슷하게 우마이야 왕조 역시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가 시리아, 동생인 압둘 아지즈가 이집트를 관장했다. 다만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의 아라비아 반도 지배는 완벽하지 않았다. 685년부터 반도 중앙의 야마마에서 카와리즈파 세력이 일어나 점차 동부를 잠식해 나갔다.

687년 이라크 전역 이후 일종의 소강 상태가 도래했다. 689년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야마마의 카와리즈파 세력이 메카 부근의 타이프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고, 이에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의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이라크 원정을 위해 킨나스린에 주둔했다. 이에 무사압 빈 앗 주바이르는 티그리스 강변의 바주마이라에 주둔하며 맞섰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바스라의 바크르 부족장 말리크 빈 미스마와 연락해 포섭하고, 할리드 빈 압둘라를 파견해 무사압의 후방을 교란하게 했다. 할리드는 바스라의 친우마이야파와 함께 봉기하여, 인근 주프라에서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에게 충성하는 우마르 빈 우바이둘라와 맞섰다. 양측의 충돌이 30여일간 지속되자 바주마이라 진영의 무사압은 주흐르 빈 카이스 휘하 1,000명의 지원군을 파견했다. 아브드 알 말리크 역시 무크타르의 쉬아파 반란 당시 무사압 빈 앗 주바이르에게 동생을 잃은 쿠파인 귀족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에게 지원군을 주어 파견했다.

다만 양측의 지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압둘라 진영이 우세를 점했고, 휴전 협상이 열렸다. 그 결과 할리드는 다마스쿠스로의 안전 귀환을 보장받았고, 부상당한 말리크 빈 미스마는 야마마로 도주했다. 한편 다마스쿠스에서는 후계자 자격을 박탈당한 아므르 빈 사이드가 칼브 부족의 지원을 받아 아브드 알 말리크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반란을 진압한 이는 후세인 빈 누마이르의 장교이던 핫자즈 빈 유수프로, 그는 이때를 기반으로 우마이야 왕조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반란의 후속 조치를 위해 아브드 알 말리크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가자 무사압 빈 앗 주바이르 역시 바스라로 귀환하여 반란에 가담한 이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이로써 쿠파 뿐만 아니라 바스라의 귀족들 역시 무사압을 싫어하게 되었다. 한편 689년 말엽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 측의 자지라(메소포타미아 북부) 총독 무할라브 빈 아비 수프라는 카와리즈파의 습격에 시달리던 바스라로 배치되었는데, 이로써 자지라 지역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아브드 알 말리크는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차 북상했다.

아브드 알 말리크가 친히 지휘하는 우마이야 군대는 카이스 부족장 주파르 빈 알 하리스 알 킬라비가 농성하는 카르키시야(키르케시움)을 포위 공격했다. 다만 여름 내내 이어진 공성전에도 함락되지 않자 아브드 알 말리크는 협상에 나서 재물과 직위를 주어 그들을 포섭했다. 따라서 이미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에게 충성을 맹세했기에 번복을 거부한 주파르를 제외한 카이스 부족은 우마이야 정규군에 편성되었다. 이후 아브드 알 말리크는 니시비스로 진군하여, 그 곳에 남아있던 2,000여 명의 카이사니야 세력을 항복시키고, 사면하여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가을 무렵 자지라를 평정한 아브드 알 말리크는 과거 무아위야 1세와 마찬가지로 이라크 중부의 마스킨에 주둔했다.

684년 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서서히 반란 세력들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고, 692년 초엽 우마이야 대장군 알 핫자즈 이븐 유수프 휘하 2,000명의 병력이 남하했다. 이전의 포위전과 달리 파괴와 학살을 원치 않았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지시에 따라 알 핫자즈는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자 칼리파의 승인 하에 메디나의 증원 병력과 함께 메카를 포위했다.(제2차 메카 공방전) 도시는 봉쇄되었고, 아부 쿠바이스 산에 설치된 투석기에 의해 주바이르군은 포격당했다. 포위가 장기화되면서 핫즈 순례 기간이 다가오자 알 핫자즈는 개인 자격의 순례자로서 입성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분노하여 카바에 대한 포격을 지시했다.

다만 그 직후 폭풍이 몰아치자 이를 천벌이라 여긴 우마이야군 병사들은 포격을 중단했다. 이에 핫자즈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고, 오히려 승리의 증표라며 포격을 지속하게 했다. 6개월간의 포위 끝에 알 핫자즈가 사면을 약속하자 10,000명에 달하는 메카 수비 병력이 항복했고, 그중엔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의 아들들도 있었다. 이에 최후를 직감한 압둘라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나가 우마이야군 진영에 돌격하다가 전사했다.(692년 가을) 이로써 기나긴 제2차 피트나가 우마이야 세습 칼리파조의 완승으로 종결되었고, 알 핫자즈는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히자즈의 총독이 되었다. 이후 우마이야 칼리파조는 이슬람 정복 전쟁을 다시 개시해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동쪽으로는 트란스옥시아나에 이르는 이슬람 역사상 최대의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1] 둘 다 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