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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0:02:38

클로드 마켈렐레

클로드 마케렐레에서 넘어옴
클로드 마켈렐레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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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생제르맹 FC 주장
파울레타
(2005~2008)
클로드 마켈렐레
(200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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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마켈렐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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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축구 감독
파일:Claude_Makelele_23-24_profile_avatar-removebg.webp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이름 클로드 마켈렐레
Claude Makélélé
본명 클로드 마켈렐레 신다
Claude Makélélé Sinda
출생 1973년 2월 18일 ([age(1973-02-18)]세)
자이르 공화국 킨샤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
[[콩고민주공화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 체중 70kg
직업 축구 선수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선수 FC 낭트 (1991~199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7~1998)
RC 셀타 데 비고 (1998~2000)
레알 마드리드 CF (2000~2003)
첼시 FC (2003~2008)
파리 생제르맹 FC (2008~2011)
감독 파리 생제르맹 FC (2011~2014 / 수석 코치)
SC 바스티아 (2014)
스완지 시티 AFC (2017 / 수석 코치)
KAS 오이펜 (2017~2019)
첼시 FC (2019~2023 / 코치)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 FC (2024)
국가대표 71경기 (프랑스 / 1995~2008)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기타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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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

선수 시절 레알 마드리드첼시에서 활약했던 미드필더로 레알과 첼시의 중원을 든든하게 받쳐준 수비형 미드필더의 교본같은 선수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89년 US 믈렁에서 축구를 시작하였으며 1990년 스타드 브레스투아 29 유스에 들어왔으나 팀의 재정 문제로 인해 바로 다음 해에 1부 리그의 낭트 아틀랑티크로 이적했다. 94/95 시즌에는 크리스티앙 카랑뵈와 호흡을 맞추며 탄탄한 미드필더진을 이끌며 낭트의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에 기여했다.

낭트에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 후 1년 가량 뛰다가 스페인의 RC 셀타 데 비고로 이적하여 2년간 70경기 3골을 기록했다.

사실 이때의 마켈렐레는 아주 패스를 못하는 선수도 아니었고 수비 지향적인 선수도 아니었다. 나쁘지 않은 패스에 공격도 종종하는 오히려 파트리크 비에라에 가까운 스타일을 구사했던 선수라고 봐야하는게 옳다. 셀타 비고에서 70경기 3골이었지만 실제 2년간 넣은 골은 컵대회까지 포함 6골이었고 이전에 있던 낭트에서 넣었던 골은 컵대회 포함 12골이었다. 약 시즌당 2~3골 정도를 넣었다. 마켈렐레의 영혼의 짝꿍으로 자주 오인되는 파트리크 비에라는 익히 알려지다 있다시피 수비 일변도의 미드필더가 아닌데 이런 비에라도 한 시즌에 대략 3~4 골정도 넣었음을 생각해본다면 마켈렐레가 그 당시만 해도 아주 공격을 안하는 선수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첼시 이적 이후 그리고 PSG 시절까지 합친 8시즌 동안 넣은 골이 4골이다. 셀타 비고와 첼시 시절 가운데 낀 레알 마드리드 시절이 4시즌 동안 1골을 넣었는데 이 시절부터 확실하게 스타일이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생각만큼 공격력이 없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워낙 쟁쟁한 공격력의 소유자들이 넘쳐났던 레알시절에 공격재능을 일부러 사그라들게 만들었다고 보는게 맞다.

여튼 셀타 비고 시절의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당시 갈락티코 정책으로 세계적인 미드필더와 공격수를 끌어모으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2.1.1. 레알 마드리드 CF

2000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의 관심을 받게 된 마켈렐레는 태업을 통해 자신의 이적료를 낮춰 셀타 비고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에 입성한 후 당시 주목받던 브라질 미드필더 플라비우 콘세이상과 주전 경쟁에서 열세에 놓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그런거 없고 입단 초기부터 팀을 떠날 때까지 레알 마드리드 중원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1]

그가 뛰던 기간 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그야말로 우주마저 정복할 기세로 스타 선수들을 불러 모았는데, 기존에 활약하던 라울 곤살레스, 호베르투 카를루스 외에 루이스 피구 (2000년 입단), 지네딘 지단 (2001년 입단), 호나우두 (2002년 입단), 데이비드 베컴 (2003년 입단) 등 당대 최고의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연례 행사처럼 끌어 모으고 있던 시절. 마켈렐레는 셀타 비고에서의 활약보다 훨씬 수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지나치게 공격 지향적으로 흐를 수 있었던 팀 전술의 밸런스를 맞춰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당시 지다네스 & 파보네스[2]라고 하여, 공격진에는 당시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영입했던 반면, 수비진에는 유망주로 채워 넣어 선수진을 운영하다보니, 수비진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선수층이 엷은 약점이 있었는데, 마켈렐레는 엄청난 활동량과 체력으로 포백의,바로 앞에서 상대 공격을 차단한 뒤, 직접 전진하기 보다는 그의 앞에 배치된 그야말로 기라성같은 스타플레이어들에게 연결[3]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여 팀의 가장 치명적인 리스크였던 수비 불안 문제를 말끔히 상쇄해주었다.

결국 우주방위대급의 공격진과 마켈렐레의 우주 방어급 수비력을 바탕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2000/01 리그 우승, 2001/02 챔피언스리그 우승, 2002/03 리그 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4-2-3-1 포메이션을 사용하던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서 2의 한 자리는 이반 엘게라, 산티아고 솔라리[4], 구티 등 여러 선수가 전술과 팀 상황에 따라 활용되었으나, 나머지 한 자리는 그냥 마켈렐레 붙박이. 당시 발롱도르를 차지했던 지단, 피구를 입단시킨 뒤, 이들의 재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그들의 수비 부담을 덜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지우개처럼 상대 공격을 지워내던 마켈렐레의 활약이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겐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격진의 기라성같은 갈락티코들의 화려한 플레이에 비하면 궂은 일을 도맡아 하다보니 눈에 짤 띄기 쉽지 않았는데, 그가 팀 전술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오히려 그가 빠져있을 때 여실히 나타났다. 일례로 2002/03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유벤투스 전에서 그가 부상으로 빠진 레알 마드리드는 유벤투스에 중원을 완전히 내주며 눈이 썩어 들어가는 경기력을 보여주다가 1:3으로 패배하며 탈락하게 된다. 한 마디로 어느 덧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버린 마켈렐레. 입단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마켈렐레도 이제 유럽 대륙이 주목하는 미드필더로 조금씩 성장하게 되고, 당시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수비형 미드필더의 교본으로 찬사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허나 2003년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슈퍼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에 입단한 뒤, 레알 마드리드는 상대적으로 네임 벨류가 낮은 마켈렐레를 소홀히 하게 된다. 당시 레알의 회장이던 플로렌티노 페레스"마켈렐레와 같이 평범한 패스를 하는 인간에게 고액의 연봉을 줄 수 없다!"며 마켈렐레의 주급 인상 요구를 단번에 거절함과 동시에 이적시켜버리는 최대의 병크를 저지른다. 결국 마켈렐레는 당시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인수하여 스타들을 끌어모으던 첼시로 이적하고 만다. 베컴이 입단하면서 공교롭게도 마켈렐레가 팀을 떠나는 모양새가 되자 지단은 이런 말을 남기며, 마켈렐레가 부재한 팀 상태를 염려한다.
“당신은 왜 벤틀리의 엔진을 잃어버리면서, 금색 페인트로 겉치장만 하려 하는가?”
지네딘 지단

화려하진 않아도 전술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마켈렐레가 떠난 뒤, 많은 이들이 우려한대로 역시나 레알 마드리드의 공수 밸런스는 급격히 붕괴되었다. 마켈렐레가 지탱하던 중원은 중앙 미드필더로 변신한 데이비드 베컴[5]이반 엘게라가 맡았으며, 아르헨티나의 신예 에스테반 캄비아소[6]가 백업을 맡게 된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레알마드리드는 의외의 모습을 보이며 수비적인 문제점을 크게 보여주지 않았다. 2003/04 시즌 레알마드리드는 모든 대회 19승 5무 3패라는 호성적으로 전반기를 마무리 하였으나, 카를로스 케이로스 당시 감독의 지나친 주전 고집, 로테이션의 부재로 주요 선수들이 혹사당했으며, 결국 후반기를 대차게 말아먹고 선수단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리그 4위로 마무리하게 된다. 특히 기대를 모았던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는 AS 모나코에게 1차전 홈경기에서부터 2골을 내주며 수비가 흔들리더니, 2차전 원정경기에서 중원의 힘싸움에서 완전히 밀리며 참패하고 탈락한다.

슈퍼스타 데이비드 베컴을 영입했음에도 2003/04 시즌 처참한 실패를 맛본 레알 마드리드는 이반 엘게라를 본래 포지션인 센터백으로 내리고, 수비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대체하고자 토마스 그라베센, 파블로 가르시아, 마하마두 디아라, 에메르송, 페르난도 가고 등을 영입했지만 기대 이하였고, 시간이 꽤 지나 2009년 1월, 라사나 디아라를 데려오며 겨우 중원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실제 안정된 상태를 되찾은 것은 마켈렐레가 떠난 뒤 6년이 지난 2009년 여름, 리버풀로부터 샤비 알론소를 영입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6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형 미드필더의 주인은 거의 매 시즌 바뀌었고 그 사이 한때 잘 나갔던 갈락티코 정책도 폭망하면서 폐지되었으며 팀도 유럽 정상권에서 자연히 멀어졌으니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서 마켈렐레의 활약이 전술상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 이해할 만 하다.

2.1.2. 첼시 FC

보통 레알 마드리드에서 첼시로 가면서 레알 마드리드 공수의 밸런스가 붕괴된 것으로 마켈렐레의 무게감을 꼽지만 사실 첼시에서의 활약이 오히려 마켈렐레의 무게감을 더해준다.

첼시에서의 첫 번째 시즌인 2003-04 시즌에는 램파드와 짝을 맞춰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뛰었고, 첼시의 리그 준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4강 달성에 크게 공헌한다. 다만 2003-04 시즌은 무패 우승을 달성한 벵거의 아스널이 첼시보다 훨씬 이슈화 되었기에 큰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첼시에서의 두번째 시즌이었던 2004/05 시즌을 앞두고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한 뒤, 마켈렐레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4-4-2가 여전히 주류[7]를 이루었던 당시 프리미어리그에서 무리뉴의 4-3-3(또는 4-1-2-3)은 신선한 충격을 가져오는데, 특히 중앙 미드필더의 수싸움에서 타 팀보다 한 명의 우위를 가져가며 중원의 힘싸움을 압도했던 부분이 주목할만한 포인트이며, 역삼각형으로 배치된 3명의 미드필더(보통 왼쪽부터 램파드, 마켈렐레, 티아구 멘데스) 중 아래 꼭짓점에서 경기하게 되는 마켈렐레가 이 전술의 핵심이었다. 무리뉴가 마켈렐레에게 내린 임무는 포백 보호와 중원 장악. 뛰어난 활동량과 엄청난 수의 가로채기, 효율적인 태클로 중원을 휩쓸며 실점 위기의 원천들을 봉쇄해버렸다. 무리뉴는 4-3-3포메이션과 함께, 기존 첼시의 포메이션이던 4-4-1-1포메이션도 병용했다. 그럴 때는 2003-04 시즌과 마찬가지로 램파드와 짝을 맞추어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처럼 뛰었다. 이 시즌의 기록은 전체 50경기 1골, 리그 36경기 1골이다.

2005-06 시즌에는 프랑스에서 에시엔이 영입되면서 첼시는 마켈렐레-마이클 에시엔-프랭크 램파드로 구성된 세계 최고의 중원을 보유하게 된다. 에시엔의 영입 효과는 눈부셨다. 램파드는 좀 더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마켈렐레는 수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시즌만큼의 기록은 아니었지만, 이 시즌 역시 리그우승&리그 최저실점을 기록하는 등 나름의 좋은 기록들을 남겼다.

2004-05 시즌, 2005-06 시즌 모두 좋은 활약을 하면서 2005년 연말에 FIFA FIFPro 월드 XI에도 선정된다.
파일:imagesXJWBAM1I.jpg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주제 무리뉴의 2004/05 시즌 PL 역대 최소실점(15실점)의 일등공신도 마켈렐레이다. 사실 축구는 단순하게 보자면 공격과 수비라는 개념을 넘어서 공을 소유하거나 공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두 가지의 상황으로 나뉜다. 공을 우리팀이 소유하는 동안에는 사실 수비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실점을 할 위험한 상황을 줄이는 동시에 공격을 통하여 득점할 상황의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많은 감독들은 볼 점유율이라는 수치에 신경써서 팀을 운영한다. 이런 관점에서 마켈렐레는 굉장히 빛이 난다. 그저 그런 팀이라면 수비만 뛰어난 미드필더라는 존재는 어찌보면 계륵에 가깝다. 선수 한 명이 후달리는데 그래도 공수 양쪽에서 힘 좀 내라고 넣어놓은 미드필더가 수비만 해제낀다면 수비야 좋아지겠지만 공격에서는 원래 있어야 하는 선수 한 명이 없는채로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선 팀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주 뛰어난 공격자원들이 있는 팀이라면 선수 한명을 늘리는 것보다 그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구성하는 방향으로 가는게 더 나을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2000년대 중반의 첼시였다.

일단 상대방이 공격해오면 마켈렐레는 어느 루트로 오는지에 관계없이 공격을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본인이 공을 소유하게 되면, 전진을 자제하고 공격력이 뛰어난 램파드나 아니면 왕성한 활동량의 에시엔에게 볼을 줌으로써 공격의 시발점이 되었다. 상대팀의 공격을 사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아 포백의 체력낭비와 실수할 가능성을 매우 줄임과 동시에 양쪽 풀백이 쉽게 오버래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고 그에 따라 공격에서의 숫자 확보도 용이하게 해주었다.

2006-07 시즌에는 독일에서 미하엘 발락이 바다건너 첼시로 날아오게 된다. 출전기회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리그 29경기에 출전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리그에서 1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테리, 램파드, 발락이 모두 부상이탈했을 때 주장 완장을 찼다!

2007-08 시즌에는 34살이나 되어버린 나이 때문에 슬슬 출전수가 줄어들었다. 리그에서는 19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예선부터 결승전까지 모든 경기에 출전하는 노익장을 보여주었으나 결승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마지막으로 첼시를 떠난다.

첼시에서의 최종 기록은 리그 144경기 2골, 대회 합산 217경기 2골.

2.1.3. 파리 생제르맹 FC

허나 나이가 들면서 활동량과 압박이 예전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자[8] 결국 2007/08 시즌 이후 고국의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다. 다행히도 첼시는 레알과는 달리 그의 부재에도 미드필더진이 크게 무너지지 않았으나 대신 잘못된 감독 선임으로 다음 시즌을 거의 말아먹게 된다.[9]

2010-11 시즌을 마지막으로 파리 생제르맹에서 팀 동료 그레고리 쿠페와 함께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2.2. 국가대표 경력

2006년 독일 월드컵 이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대표팀과의 인연이 없던 선수였다. 1995년에 대표팀에 발탁되었으나 당시 프랑스는 지단, 데샹, 프티 등 그가 없어도 될 만큼 엄청난 미드필더진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리사라수, 드사이, 튀랑, 블랑 등 이른바 철의 포백이라 불리운 역대 최고의 수비라인까지 보유하여 레블뢰 주전 발탁은 꿈에도 꾸지 못할 정도였으며, 1998년 조국에서 열린 월드컵유로 2000에도 출전하지 못하며 프랑스의 우승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UEFA 유로 2000 이후 국가대표팀 주장이었던 디디에 데샹의 은퇴 이후 2001년부터 점점 국가대표로 출전횟수가 늘어나게 되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드디어 메이저 대회 첫 출전의 기회를 잡았으나 조별리그 덴마크전 단 한 경기에 출전한 것이 전부였고 결과도 2-0으로 패배했고 프랑스는 세네갈 쇼크의 희생양이 되며 한 골도 넣지 못하고 탈락했다.

유로 2004에서는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경기 출전하게 되었지만 8강 탈락으로 빛이 바랬다. 대회 이후 지네딘 지단, 릴리앙 튀랑과 함께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으나... 1년 후 다시 이들과 함께 국가대표 복귀를 선언했다.

33세라는 노장임에도 주전 미드필더로 발탁되어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대활약을 펼쳤다. 조별 리그에는 지단과 마찬가지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토너먼트에서는 달랐다. 파트리크 비에라[10] 등 당시 퇴물이라 불리던 다른 노장 선수들과 함께 스페인, 브라질, 포르투갈 등의 정상팀을 박살내는데 기여했다.[11] 안타깝게도 팀은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와 격돌,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여 준우승을 했다.

국내에서는 이상하게 파트리크 비에라와 영혼의 듀오로 손꼽는 경우가 많은데, 마켈렐레-비에이라 조합은 잉글랜드스티븐 제라드-프랭크 램파드 조합만큼이나 현시창인 경우였다. 막상 둘이서 함께 맹활약한 적은 2006년 월드컵이 유일한데 프랑스의 흑역사였던 레몽 도메네크의 업적이 마켈렐레-비에이라 조합의 완성과, 독일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사실 이 전술은 수비 지향적인 지루한 전술이며 볼을 돌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공격을 전개할 때 4-5명만 관여하는 식이었으며 지네딘 지단이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고 양 날개 프랑크 리베리플로랑 말루다의 폼이 좋았기에 망정이었다.

월드컵 이후 다시 한번 국가대표를 떠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레몽 도메네크 감독은 곧바로 유로 2008 예선에 마켈렐레를 차출하여 국가대표 경기를 뛰게 하였고 당시 첼시 감독이었던 무리뉴는 마켈렐레를 뽑아간 도메네크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마찰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유로 2008 본선에 데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네덜란드, 이탈리아, 심지어 루마니아에도 밀려 조 4위를 기록해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며 8강 진출에 실패하였고 마켈렐레는 대회 직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하였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2011년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어시스턴트로 선임되었다. 2014년 5월 23일, SC 바스티아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2년.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 2014년 11월 3일에 경질되었다.

2017년 1월 스완지 시티에 수석코치로 부임하였다가 10개월 후 벨기에 주필러리그 KAS 오이펜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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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프랭크 램파드가 2019-20 시즌 첼시의 감독이 된 직후 코칭 스태프로 선임되었다. 부임 직후 첼시에서 임대 선수를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2023년까지 기술 멘토로서 첼시에 근무했다.

2024년 9월 13일,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24년 10월 7일, 라커룸 내 영향력 부족 및 구단과의 철학 차이로 인해 불과 3경기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피지컬은 약했으나[12] 압도적인 활동량과 커팅이든 태클이든 어쨌든 볼을 되찾아오는 실력만으로도 피지컬적 약점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을 정도로 현역시절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명으로 거론되던 선수이다.

단점으로는 공중볼싸움과 몸싸움에 아주 강했던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 단점을 상술한 특유의 체력과 활동량으로 커버했다.[13] 진정한 포백 보호자의 대표주자라고 할 만큼 상대방의 공격이 포백에 닿기 전 혹은 역습이 시작하는 타이밍에 벌써부터 상대편 공을 가진 선수에게 달려가서 압박과 태클을 끊임없이 가했다.

또한, 수비 포지션의 선수들도 빌드업이 당연시 되는 현 관점에서 봤을때, 패스가 평범한 수준이었기에 (혹은 그것은 본인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인지) 볼을 가로채면 요즘 월드클래스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하는 대지를 가르는 역습 스루패스나 빌드업같은 것보다는 람파드에시엔같은 플레이메이커에게 볼을 연결해주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는 그 당시의 전술적 한계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전술 이해, 패스 능력이라는게 패스미스 안하고 아군 플레이메이커에게 잘 주기만 해도 좋은 선수로 평가 받았었기에 현역시절, 그렇게 큰 단점으로 지적되지는 않았다.[14]

그리고 볼 키핑 능력 또한 훌륭했다. 마치 수비만 잘했던 선수로 알려졌지만 발기술이 떨어지는 선수는 절대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빌드업 능력은 부족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엄청난 활동량과 최고 수준의 태클, 뛰어난 키핑 능력, 상대방의 공격을 읽는 능력과 수준급 센터백 이상가는 대인 마킹능력을 가진 선수로, 수비형 미드필더의 자리에서는 최정상급의 레전드로 꼽힌다. “Makelele Role”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2000년대 초반에서 중후반까지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15][16]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비슷한 유형의 선수로 꼽히며, 현역 선수 중 입지상으로는 카세미루가 유력하다. 첼시 FC의 레전드 미드필더 은골로 캉테와는 엄연히 말하면 다른 유형이다. 마켈렐레가 수비적 롤을 소화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라면 캉테는 중원 전체를 왔다갔다하며 공격적으로도 활동해야 하는 박스 투 박스이기 때문에 캉테와 마켈렐레는 다른 유형의 선수이다. 다만 비슷한 키와 왕성한 활동량으로 중원을 장악한다는 점은 비슷하여 캉테를 제2의 마켈렐레라 칭하는 사람이 많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기타

7. 같이 보기

1 랑드로 · 2 붐송 · 3 리사라수 · 4 비에라 · 5 갈라스 · 6 마켈렐레 · 7 피레스 · 8 드사이 · 9 사하
10 지단 · 11 윌토르 · 12 앙리 · 13 실베스트르 · 14 로탕 · 15 튀랑 · 16 바르테즈 · 17 다쿠르
18 페드레티 · 19 사뇰 · 20 트레제게 · 21 말레 · 22 고부 · 23 쿠페
파일:프랑스 국기.svg 자크 상티니

1 랑드로 · 2 붐송 · 3 아비달 · 4 비에라 · 5 갈라스 · 6 마켈렐레 · 7 말루다 · 8 도라수 · 9 고부
10 지단 · 11 윌토르 · 12 앙리 · 13 실베스트르 · 14 사하 · 15 튀랑 · 16 바르테즈 · 17 지베
18 디아라 · 19 사뇰 · 20 트레제게 · 21 심봉다 · 22 리베리 · 23 쿠페
파일:프랑스 국기.svg 레몽 도메네크

[1] 지금 보면 의외일지도 모르겠으나, 플라비우 콘세이상은 당시 브라질의 코파 아메리카 2연패와 데포르티보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라 리가의 톱 미드필더로 떠올랐던 반면에 마켈렐레는 실력은 있었지만, 1998년 월드컵유로 2000에서 우승한 프랑스의 멤버에 포함되지 못한 선수였고, 당시 마켈렐레게 태업을 통해 본인 이적료를 낮췄다고는 하더라도 플라비우 콘세이상이 2,600만 유로의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에 입성한 반면 마켈렐레는 1,400만 유로 가량의 낮은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즉, 레알 마드리드는 마켈렐레보다 콘세이상에게 더 기대를 하고 있었다.[2] 소위 “지단-파본” 정책이라고 하여 공격진에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고, 수비진에는 프란시스코 파본과 같은 유스팀에서 발굴한 유망주를 육성하여 채우는 것이 골자인데, 애초 당시 유스팀에서 키워서 올린 프란시스코 파본, 라울 브라보 같은 젊은 수비수들이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인 선수들이어서 그냥 망한 정책이 되어버렸다. 이 유망주들만 믿고 1999년 미첼 살가도의 영입 이후, 2004년 왈테르 사무엘이 영입되기 전까지 5시즌간 단 한 명의 전문 수비수를 영입하지 않은 당시 레알 마드리드 경영진의 배짱도 놀라울 따름. 우주를 쓸어담던 마켈렐레의 놀라운 수비력과 말년을 불태운 페르난도 이에로의 활약이 없었다면, 갈락티코 1기 초반의 대성공도 불가능했을 정도로 이 정책은 레알 미친짓거리였다.[3] 마켈렐레의 패싱력이 형편없는 편은 아니나 애초에 창의적인 빌드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포백 앞에서 조기에 상대 공격을 차단한 뒤, 기라성 같은 공격진에게 연결해준 것 만으로도 최소한의 공격의 시발점 역할은 담당했던 것이었다.[4] 2000년 여름, 막장 구단주 헤수스 힐의 전횡으로 2부리그로 강등되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입단했던 왼발잡이 윙어. 2001/2002시즌 마켈렐레와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되는데, 역할은 2013/2014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 앙헬 디 마리아가 맡았던 하프윙과 유사했다. 공격형 미드필더 지네딘 지단을 측면 플레이메이커 역할의 왼쪽 윙어로 배치하여, 중앙으로 이동할 때 왼쪽 측면으로 스위칭을 하기도 했으며,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오버래핑을 들어올 때에는 수비를 커버하기도 했다. 또한 빌드업 능력이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마켈렐레보다 중앙에 스피드를 부여하기에는 적합했다. 전술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부여 받을만큼 축구 지능이 탁월했던 선수로 마켈렐레와 함께 굳은 일을 담당했으나 결국 마켈렐레와 마찬가지로 축구인들과 팬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훗날 인터 밀란에 입단한다. 2018년 레알 마드리드 감독을 잠시 맡기도 했다.[5]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양측면 미드필더는 지네딘 지단루이스 피구가 맡고 있어 베컴의 자리가 사실 모호했다. 만약 피구와 베컴에게 양 사이드를 맡기고, 지단을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진시킬 경우, 이 3명의 부족한 수비력 때문에 더블 볼란테를 둘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공격수 한 명을 빼야하고, 최전방 공격수 호나우두나 팀의 상징인 세컨드 스트라이커 라울 곤살레스 중 한 명을 벤치로 내리자니 그것도 참 난감한 상황. 따라서 당시 레알 마드리드 전술과 상황을 이해했던 이라면 결국 베컴에게 다소 어울리지 않는 중앙 미드필더를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에 마켈렐레가 잔류하여 베컴의 중앙 미드필더 파트너가 되었다면, 마켈렐레가 수비적으로 공헌하며 중원을 장악해주는 상태에서 베컴이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 없었던 정확한 롱패스를 통한 빌드업으로 신규 공격 루트를 창출해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고, 사실 이게 레알 마드리드가 기대했던 것이다. 물론 마켈렐레가 팀을 떠나면서 이 계획은 없는 일이 됐다. 그 뒤 베컴은 중앙 미드필더로 다소 고전하다가 피구가 팀을 떠난 05/06 시즌에서야 본래 포지션인 오른쪽 미드필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6] 훗날 인터밀란으로 옮겨서 대성한다. 이 당시는 신예로서 레알 마드리드의 중원을 도맡기 버거운 모습을 보여주었다.[7] 알렉스 퍼거슨도 맨유에서 4-3-3을 시도하였으나 신통치 않아 여전히 2명의 중앙 미드필더를 기용하는 4-4-2를 기본 포메이션으로 삼았다.[8] 이무렵 마켈렐레 스타일의 수비형 미드필더보다는 더욱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미드필더들이 각광받기 시작하는데, 마침 압박-탈압박에 능하고, 빌드업에 재능이 있었던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출현했던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9] 첼시는 미드필더진에 큰 변화가 없었지만 레알은 이 때 마켈렐레만 갈아댄 것이 아니다. 그나마 중원을 잡아줄 플라비우 콘세이상, 스티브 맥마나만도 마찬가지였다.[10] 마켈렐레-비에이라 조합이 동시에 제대로 가동된 유일한 때기도 하다.[11] 특히 브라질전에서는 그 유명한 4를 막아내며 팀의 1-0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12] 사실 키만 작았지 다른 피지컬 요소는 꿀릴 것이 없었다. 스피드도 준수했고 끈적끈적한 몸싸움도 꽤 잘했다.[13] 마켈렐레의 발에 페인트를 묻혀서 경기동안 경기장 바닥을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확인해 보면 마켈렐레의 발자국이 없는 지역이 없다는 그 유명한 활동량과 두개의 심장 세개의 심장을 넘어서는 철인이라는 말이 나올 체력으로 온 필드를 경기 내내 휩쓸고 다녔다.[14] 이게 단점으로 지적 받았다면 그 당시 팬들에게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억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15] 마켈렐레 이전에는 펩 과르디올라페르난도 레돈도 같은 선수들이 보여주었던 “앵커맨” 스타일의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각광받던 시절이 있었다. 과르디올라가 FC 바르셀로나를 떠난 뒤, 예상치못하게 중소 클럽들을 전전하면서 “시대가 나같은 스타일의 미드필더를 원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는데, 이 때가 바로 마켈렐레 스타일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각광받기 시작했던 시점과 일치한다.[16] 마켈렐레와 가장 비슷한 유형의 수비형 미드필더로는 다비드 알벨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마시모 암브로시니 등이 꼽히며, 현역 선수중에는 카세미루가 비슷한 유형의 선수이다. 그리고 세부 포지션은 다르지만 비슷한 역할을 했던 선수로는 젠나로 가투소가 있었다.[17] 그래도 요즘은 mc시즌, UP시즌이 그나마 전 시즌에 비해 슛을 비롯한 스텟이 그나마 좋게 나와 상황이 좀 나아졌다.[18] 라틴어의 "클라우디우스(Claudius)"[19] 이 시기 이후 잉글랜드는 '홈그로운 규정'과 '팀그로운 규정'을 도입,강화하여 육성시스탬을 개편했고, 다양한 스타일의 선수를 배출해 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것이 성공하여 잭 그릴리쉬, 필 포든, 제임스 매디슨, 데클란 라이스, 주드 벨링엄 등 창의적인 미드필더들을 배출해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