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Credit Party of Canada (Socreds) | |
슬로건 | |
<colcolor=#026702> 프랑스어 명칭 | <colbgcolor=white,#010101>Parti Crédit social du Canada |
한글 명칭 | 캐나다 사회신용당 |
창당일 | 1935년 10월 14일 |
해산일 | 1993년 9월 27일 |
대표 | 존 혼 블랙모어 솔론 얼 로우 로버트 N. 톰슨 레알 코우테 파비앙 로이 |
의회 | 30석 / 265석 (1962년) |
당 색 | 초록색 (#026702, Green) |
이념 | 사회신용주의 분배주의 혼합 정치 포퓰리즘 농본주의 사회보수주의 기독교 우파 |
정치적 스펙트럼 | 우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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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나다 사회신용당(Social Credit Party of Canada)은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기에 등장한 급진적 경제 개혁을 주장하는 대중주의 정치 정당이었다. 이 당의 기원은 20세기 초 영국의 엔지니어 메이저 C.H. 더글라스(Major C.H. Douglas)가 개발한 사회신용(Social Credit)이라는 경제 이론에 있다. 더글라스는 현대 경제의 핵심 문제는 일반 대중의 구매력 부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통적인 경제 시스템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속도에 비해 사람들에게 돈을 분배하는 속도가 느려, 생산과 소비 사이에 만성적인 불균형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사회신용" 또는 국민 배당금(national dividend)을 직접 시민들에게 지급함으로써 구매력을 높이고 경제 활동을 촉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전통적인 경제 정책에 소외감을 느끼던 사람들, 특히 경제 대공황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2. 역사
2.1. 캐나다에서의 사회신용 운동의 등장
사회신용운동은 1930년대 초 캐나다 서부에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 심각했던 앨버타 주를 중심으로 주목받았다. 당시 농민들과 농촌 지역 사회는 가뭄, 상품 가격 하락, 높은 부채로 인해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1935년, 앨버타 출신의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자이자 라디오 방송 진행자인 윌리엄 애버하트(William Aberhart)는 사회신용 이론을 받아들여 앨버타 사회신용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경제적 구제를 절실히 필요로 하던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같은 해 앨버타 주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주 정부를 장악했다. 애버하트의 성공은 연방 차원에서도 사회신용 운동의 확산을 자극했고, 이에 따라 캐나다 사회신용당이 1935년에 창당되었다.2.2. 전성기
사회신용당의 초기 이념은 경제 개혁, 대중주의, 종교적 열정이 혼합된 형태였다. 애버하트는 앨버타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다졌지만, 이 운동은 브리티시컬럼비아와 퀘벡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이는 경제적 어려움과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이 배경이 되었다. 사회신용당의 주요 주장은 은행 및 금융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점과, 정부가 신용 창출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은 사립 은행들이 과도한 권력을 휘두르며 신용과 통화 공급을 장악함으로써 소수 엘리트만을 부유하게 만들고, 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 배당금(모든 시민들에게 매달 지급되는 금액)과 가격 규제를 통해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높이고 경제를 활성화하려 했다.1935년 연방 선거에서 사회신용당은 처음으로 출마해 하원 17석을 확보했으며, 이 의석들은 모두 앨버타에서 나왔다. 비록 사회신용당이 자유당이나 보수당 같은 주요 정당에 비하면 전국적으로 큰 위협이 되진 않았지만, 서부 지역에서 급진적 경제 개혁에 대한 높은 지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연방 차원의 사회신용당은 초기에 내부 분열과 지도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애버하트는 앨버타 주의 정치에 집중했기 때문에, 연방 정당 차원에서 강력하고 통합된 지도자가 부재했다. 이런 이유로 1930~40년대 동안 사회신용당은 서부 지방을 넘어 전국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실패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 사회신용당은 퀘벡에서 새로운 지지 기반을 발견하며 전환점을 맞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퀘벡에서는 연방 정부와 기존 정당들이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이익을 소홀히 한다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몬트리올 시장 카밀리앙 후드와 대중주의 정치인 레알 코우테는 퀘벡에 사회신용 이론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카우에트는 퀘벡의 독특한 정치적, 문화적 맥락에 사회신용 이론을 적응시키며, 경제적 대중주의와 퀘벡 자치, 전통적 가톨릭 가치를 결합한 독자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이 접근법은 중앙집권적 경향에 불만을 품고 있던 퀘벡 주민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1962년 연방 선거에서 사회신용당은 30석을 차지했으며, 이 중 대부분의 의석이 퀘벡에서 나왔다. 이는 1930년대 이후 처음으로 하원에서 의미 있는 존재감을 보인 순간이었다. 카우에트는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그의 개인적 인기와 지도력 덕분에 퀘벡에서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시기 사회신용당은 경제 개혁(국민 배당금 지급, 은행 시스템 규제)에 주력했을 뿐만 아니라, 퀘벡 민족주의와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며 보수 성향 유권자들에게도 큰 지지를 얻었다.
2.3. 쇠퇴와 해체
그러나 사회신용당은 내부 분열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960년대 초, 당은 서부와 퀘벡 간의 주요 갈등에 직면했다. 서부파는 로버트 톰슨(Robert Thompson)이 이끌었으며, 사회신용 이론의 경제적 원칙에 초점을 맞췄지만 퀘벡파가 중시하는 문화적, 민족적 이슈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갈등은 서부 기반의 캐나다 사회신용당과 카우에트가 이끄는 퀘벡의 랄리망 크레디티스트(Ralliement créditiste)라는 두 개의 분리된 파벌로 나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분열은 당의 전국적 영향력을 제한했고, 점차 쇠퇴로 이어졌다.1970~80년대에 사회신용당의 영향력은 빠르게 약화되었다. 1980년 연방 선거에서 마지막 의석을 확보한 이후, 이 당은 사실상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1980년대 말, 서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대안으로 개혁당(Reform Party)이 떠오르며 사회신용당에 큰 타격을 입혔다. 개혁당은 재정 보수주의, 서부 소외 문제, 정치 개혁을 중심으로 한 현대적 대중주의를 제시하며, 사회신용당의 전통적 경제 이론을 대체했다.
1976년 카우에트의 사망은 당의 쇠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후 강력한 지도자의 부재로 사회신용당은 더욱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1990년대에는 연방 사회신용당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하지만 사회신용당의 유산은 서부 소외 문제와 대중주의를 강조하며 이후 캐나다 정치에 영향을 미친 다른 정치 운동들에 남아 있다.
3. 정책
1. 국민 배당금 (National Dividend)사회신용당의 핵심 정책 중 하나는 국민 배당금 제도였다. 이 제도는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해 대중의 구매력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사회신용 이론은 현대 경제에서 생산과 소비 간의 불균형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즉, 기업이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에 비해, 대중이 이를 구매할 충분한 돈을 가지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제는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매력의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과 급여가, 기업이 생산한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신용당은 정부가 경제의 총 생산량과 대중의 구매력 사이의 격차를 메우기 위해 국민 배당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 배당금은 모든 국민에게 차별 없이 지급되며, 기본적인 생계 유지와 소비를 가능하게 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이 정책은 대공황 시기에 실업과 빈곤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직접적인 경제적 구제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의 높은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2. 사회적 크레딧 체제 (Social Credit System)
사회신용당은 금융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당시 금융 시스템이 소수의 엘리트와 은행권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작동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신용당은 은행의 신용 창출 권한을 축소하고, 신용 창출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정부가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신용 이론에 따르면, 은행이 신용을 창출할 때 일반 대중은 대출 이자와 같은 부담을 떠안게 된다. 이는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신용당은 은행과 금융 기관의 역할을 축소하고, 신용 창출과 관리 권한을 정부가 직접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사회신용당은 중앙은행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중앙은행은 국민 배당금 지급과 경제 안정화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 추가적인 돈을 발행해 경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대중의 경제적 부담을 완화하고, 금융 시스템을 보다 공정하게 운영하고자 했다.
3. 가격 조정 정책 (Compensated Price System)
사회신용당은 "보상 가격 시스템(Compensated Price System)"을 통해 시장에서의 가격 안정화를 도모하려 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대중이 필수품과 주요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가격을 조정하고 보조하는 것이다.
우선, 가격 보조정책을 이용하여 사회신용당은 정부가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규제하여, 대중이 이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물품의 공정 가격 유지로 특정 상품의 생산 비용과 판매 가격 사이의 차액은 정부가 보조금 형태로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소비자는 합리적인 가격에 상품을 구매할 수 있고, 생산자는 적정한 이윤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특히 식료품, 의류, 주택 등과 같은 필수품에 적용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생산자가 이윤을 유지하면서도 소비자가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는 데 목표를 두었다.
4. 역대 선거 결과
선거 연도 | 얻은 의석 수 | 전체 의석 수 대비 비율 | 득표율 (%) | 주요 지역 기반 |
1935 | 17 | 6.8% | 4.1% | 앨버타 |
1940 | 10 | 4.0% | 4.2% | 앨버타 |
1945 | 13 | 5.2% | 5.2% | 앨버타, 브리티시컬럼비아 |
1949 | 10 | 3.6% | 4.1% | 앨버타 |
1953 | 15 | 5.2% | 6.6% | 앨버타, 브리티시컬럼비아 |
1957 | 19 | 6.5% | 6.8% | 앨버타, 브리티시컬럼비아 |
1958 | 8 | 2.8% | 3.5% | 앨버타, 브리티시컬럼비아 |
1962 | 30 | 10.3% | 11.2% | 퀘벡, 앨버타 |
1963 | 24 | 8.3% | 9.8% | 퀘벡, 앨버타 |
1965 | 9 | 3.1% | 5.3% | 퀘벡 |
1968 | 14 | 4.7% | 8.0% | 퀘벡 |
1972 | 15 | 5.0% | 7.4% | 퀘벡 |
1974 | 11 | 3.7% | 6.5% | 퀘벡 |
1979 | 6 | 2.0% | 4.7% | 퀘벡 |
1980 | 1 | 0.3% | 2.2% | 퀘벡 |
1984 | 0 | 0.0% | 0.1% | - |
1988 | 0 | 0.0% | 0.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