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6년 일본에서 영화 북경의 오십오일과 애니메이션 에이트맨의 주제가를 부른 가수 카츠미 시게루([ruby(克美, ruby=かつみ)][ruby(茂, ruby=しげる)])가 자신과 내연관계였던 여성을 살해한 사건. 해당 사건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2. 카츠미 시게루
카츠미 시게루는 1937년 미야자키현 미야자키시 출신으로 본명은 츠무라 세이야(津村誠也)이며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56년에 친구들과 음악 그룹을 결성하면서 음악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1960년 NHK 오사카에서 주최한 오디션에 합격했으며 이듬해인 1961년에 예명을 카츠미 시게루로 바꾸고[1] 도쿄로 상경했다. 도쿄의 한 재즈바 무대에서 도시바 레코드의 디렉터에게 스카웃되어 '안개 속의 조니(霧の中のジョニー)'[2]로 음반 데뷔 후 4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1963년 에이트맨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담당했으며 1964년에는 레코드 가수에서 본격적으로 가요로 전향하면서 발표한 '방랑자(さすらい)'가 60만장이라는 대성공을 거두고, 1965년과 1966년 2회 연속으로 NHK 홍백가합전에 출전하는 등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65년 요코미조 세이시 원작의 NHK 드라마 '인형 사시치의 체포장'[3]에도 조연으로 출연했으나 2차례의 홍백가합전 출장 이후에는 이렇다 할 히트곡을 내지 못해 카츠미의 인기는 점차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3. 범행 경위
카츠미는 점차 저조해지는 인기를 반등시키기 위해 음악 관계자들에게 계속 접대를 베풀었는데 이 과정에서 1000만엔에 달하는 빚을 지게 된다. 카츠미는 당시 교제중이던 긴자의 일류 호스티스 오카다 히로코(岡田裕子)에게 매달 30만엔을 빌려 빚을 전부 갚았지만 여기에 맛을 들이고 점차 도박에 빠져 살다가 진 빚을 다시 오카다 히로코의 돈으로 갚는 등 방탕한 삶을 살았다. 이런 막장스러운 생활 탓에 오카다가 카츠미에게 준 돈의 총액이 무려 3500만엔에 달했다고 하며 오카다는 호스티스로 일하면서 버는 수입으로는 카츠미가 요구하는 돈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결국 유흥업소(소프랜드[4])에서까지 일을 해야 했다.이후 카츠미는 오카다의 고향인 오카야마로 내려가 그녀의 부모에게 오카다와 결혼 의사를 전했고, 친지들과 친구들을 초대해 결혼식을 올렸다. 1975년 카츠미의 인기 반등을 위해 당시 소속사였던 도시바 레코드에서는 그의 복귀를 위해 '3000만엔 작전'이라는 기획을 실시하고 카츠미 자신도 예명 표기를 '克美茂'로 바꾸면서 '상처'라는 곡으로 컴백했다.
문제는 오카다와 교제 당시 카츠미에게는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었고 심지어 이혼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오카다에게 아내와 이혼했다고 속여서 그녀와 불륜관계를 지속했는데 오카다와의 결혼도 실제로는 위장결혼이었다. 결국 불륜이 탄로나 스캔들로 번질 것을 우려한 카츠미는 오카다의 곁을 떠나 가족에게 돌아가는데 그제서야 그가 자식까지 있는 유부남임을 알게 된 오카다는 언론에 사실을 전부 폭로하겠다며 크게 분노했다.
카츠미는 1976년 5월 6일로 예정된 홋카이도에서의 신곡 홍보에 오카다와 동행할 예정이었으나 이미 그녀를 자신의 복귀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겼던 데다 혼자 홋카이도에 가겠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오카다는 카츠미의 아내를 찾아가 결판을 짓겠다고 맞섰고, 이에 카츠미는 밧줄로 오카다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지인 소유의 차량을 빌려 시신을 트렁크에 숨기고 그대로 하네다 공항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시킨 채 홋카이도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틀 후인 5월 8일에 오카다의 시신이 발견되고, 경찰이 차량 소유주를 통해 카츠미의 신원을 파악하여 그를 체포했다. 카츠미는 불륜이 스캔들로 번질 것을 두려워해 오카다를 살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살인사건이 불륜 이상으로 더 커다란 스캔들이 되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셈이다.
4. 사건 이후
체포 이후 카츠미의 음반들은 일본 전국의 매장에서 모두 회수조치되었다. 카츠미는 1976년 8월 23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오사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7년 만인 1983년 10월 가석방되었고[5] 출소 이후 밴드 시절의 동료이기도 했던 전 매니저의 도움으로 음악 사무소를 차리고 재혼하면서 가라오케 교실을 차리는 등 다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막장스러운 사생활은 어디 가지 않아서 1989년에는 마약 불법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살았고, 1996년에는 무려 31세 연하의 여성과 4번째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말년에는 뇌경색과 심장병 등 각종 지병과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당시 거주하던 도치기현의 작은 스낵바에서 공연을 하는 등 근근이 활동을 이어가다가[6] 2013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75세.
[1] 처음에는 자신이 직접 지은 '카츠키 시게루(勝己しげる)'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카츠키'는 '자기 자신(己)을 이긴다(勝)'는 의미에서, 'しげる'는 그가 평소에 존경하던 정치가 요시다 시게루에서 따 왔다고 한다.[2] 존 레이톤의 노래 'Johnny Remember Me'의 번안곡이다.[3] 요코미조의 초창기 작품. 당시는 본격 추리소설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포졸들의 활약을 다루는 '체포 이야기(捕物帳)'가 유행했던 시기로, 인형 사시치의 체포장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되어 완성된 작품이다. '인형 사시치'라는 이름은 주인공인 사시치가 마치 인형처럼 잘 생긴 미남이라는 데서 붙은 것이다.[4] 당시는 '터키탕(トルコ風呂)'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를 보고 경악한 한 튀르키예인 학자가 귀국 후 이 사실을 알리면서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했고 결국 1984년에 일본 전국의 업소들이 소프랜드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5] 여기에는 팬들과 지인 등 관계자들의 탄원도 한 몫을 했다고 전해진다.[6] 몇몇 방송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연예계 복귀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