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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3:32:59

스페인의 인판타 카를로타 호아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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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2B6DA><colcolor=#000000> 포르투갈 왕국 주앙 6세의 왕비
스페인의 인판타 카를로타 호아키나
Infanta Carlota Joaquina de España
파일:Carlota_Joaquina.jpg
이름 스페인어 카를로타 호아키나 테레사 카예타나 데 보르본 이 보르본파르마
(Carlota Joaquina Teresa Cayetana de Borbón y Borbón-Parma)
포르투갈어 카를로타 조아키나 테레자 카에타나 드 보르봉 에 보르봉 파르마
(Carlotta Joaquina Teresa Caetana de Bourbon e Bourbon Parma)
출생 1775년 4월 25일
스페인 아란후에스 아란후에스 궁전
사망 1830년 1월 7일 (향년 54세)
포르투갈 왕국 신트라 켈루스 궁
배우자 주앙 6세 (1785년 결혼 / 1826년 사망)
자녀 마리아 테레자,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마리아 이자벨, 페드루 4세,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자벨 마리아, 미겔 1세, 마리아, 아나
아버지 카를로스 4세
어머니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형제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도 7세,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마리아 이사벨,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카를로타 호아키나 서명.sv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스페인의 공주3.2. 포르투갈의 왕세자비3.3. 포르투갈의 왕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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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브라질 왕국의 왕 주앙 6세의 왕비이자 페드루 4세미겔 1세의 어머니이자 마리아 2세의 할머니이다. 포르투갈에서는 카를로타 조아키나라고 불린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의 장녀이자 페르난도 7세의 누나이자 이사벨 2세의 큰 고모.

2. 작위

3. 생애

3.1. 스페인의 공주

파일:Mengs_-_Infanta_Carlota_Joaquina.jpg
카를로스 4세의 장녀이자 둘째로 태어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첫째가 요절하면서 맏이로 자랐다. 아버지인 카를로스 4세는 어리숙하고 무능했기에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가 정치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행보를 보면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어렸을 때 그녀의 고모할머니인 포르투갈의 왕대비 마리아나 빅토리아[1]의 추진 하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에 혼담이 진행되었다. 1785년에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삼촌 가브리엘과 포르투갈의 마리아 1세의 딸 마리아나 비토리아의 정략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같은 해에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마리아 1세의 차남인 베자 공작 주앙과 결혼하게 되었다.

3.2. 포르투갈의 왕세자비

파일:Infanta_Carlota_Joaquina_-_Prado.jpg
베자 공작부인 카를로타 호아키나, 1787년

후에 주앙 6세가 되는 베자 공작 주앙은 결혼했을 당시 18살이었다. 반면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10살이었다. 당연히 주앙 6세는 어린 신부에게 관심이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5년 후에야 첫날밤을 치렀다. 1788년에 주앙 6세의 형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주제가 사망하면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왕세자비가 되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첫 아이를 가지기도 전에 주앙 6세가 다른 여성을 임신시켜 스페인으로 보내버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성격이 매우 달랐다. 주앙 6세는 우유부단하고 게을렀으며, 정치보다는 종교에 좀 더 몰두했다. 또한 어머니 마리아 1세의 영향으로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거칠고 행동력이 있으며 야망이 넘쳤다. 부부 사이에서는 9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아홉번째 아이를 낳고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다.

포르투갈의 궁중은 스페인에 비해 매우 종교적이고 엄격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여러번 정치에 간섭하려 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포르투갈에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성질 나쁘고 못생긴 여자라는 평을 받았다. 부부가 낳은 아이들 중 밑에 애들은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바람을 펴서 낳았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는데,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평판이 안 좋기도 했지만 부부가 둘 다 워낙 인물이 안 좋은 데에 비해 아이들은 인물이 괜찮았기에 난 소문으로 보인다.

3.3. 포르투갈의 왕비

1807년에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정세가 급박해졌다. 포르투갈은 영국과 함께 나폴레옹에 맞섰지만 패배했고, 왕가는 브라질로 피신했다. 망명기간 동안 카를로타는 포르투갈보다는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있었던 스페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1816년, 마리아 1세가 사망하고 주앙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었다.

14년이 지나고 돌아온 포르투갈은 자유주의 혁명의 영향으로 변해있었다. 사람들의 반발을 제어할 수 없었던 주앙 6세는 입헌군주제를 승인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보수파였던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이에 반발해 자신과 정치 성향이 비슷한 막내아들 미겔 1세를 왕위에 올리려고 했다. 주앙 6세를 유폐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영국이 개입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미겔은 해외로 추방당하고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켈루스 궁에 가택연금을 당했다.

1826년에 주앙 6세가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심한 경련과 구토를 하다가 급사했기에 사람들은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왕을 암살했다고 의심했다. 건강 문제를 핑계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자 의혹은 커졌다. 현대의 연구 결과 주앙 6세의 시신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면서 이 의혹은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관련 논문

후계자인 페드루 4세는 당시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로 군림하고 있었다. 페드루 4세는 곧장 딸 마리아 2세에게 포르투갈의 왕위를 양도하고 쫓겨났던 동생 미겔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동안의 섭정은 페드루 4세의 동생이자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딸인 이자벨 마리아가 맡게 되었다. 그러나 미겔 1세가 왕위 찬탈을 시도하면서 포르투갈은 내전에 휩싸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미겔 1세의 편에 서서 미겔의 자유주의 탄압을 지원하다가 1830년에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Carlota Joaquina of Spain)
<colbgcolor=#fff3e4,#331c00> 카를로스 4세
(Carlos IV)
<colbgcolor=#ffffe4,#323300>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펠리페 5세
(Felipe V)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Elisabeth Farnese)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
아우구스트 3세
(August III)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Austria)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
(Maria Luisa of Parma)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
(Philip, Duke of Parma)
펠리페 5세
(Felipe V)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Elisabeth Farnese)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Louise Elisabeth of France)
루이 15세
(Louis XV)
마리아 레슈친스카
(Maria Leszczyńska)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스페인포르투갈의 왕자비 마리아 테레사
(Maria Teresa, Infanta of Spain and Portugal)
1793년 4월 29일 1874년 1월 17일 스페인포르투갈
페드로 카를로스 왕자[2]
슬하 1남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왕자[3]
1남 베이라 공 안토니우
(Francisco António, Príncipe da Beira)
1795년 3월 21일 1801년 6월 11일
2녀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
(Maria Isabel, Queen of Spain)
1797년 5월 19일 1818년 12월 26일 페르난도 7세[4]
슬하 2녀
2남 페드루 1세 & 4세
(Pedro I and IV)
1798년 10월 12일 1834년 9월 24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슬하 3남 4녀[5]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
슬하 1녀
3녀 스페인의 왕자비 마리아 프란시스카
(Maria Francisca, Infanta of Spain)
1800년 4월 22일 1834년 9월 4일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왕자[6]
슬하 3남
4녀 포르투갈의 섭정 이자벨 마리아
(Isabel Maria, Infanta Regent of Portugal)
1801년 7월 4일 1876년 4월 22일
3남 미겔 1세
(Miguel I)
1802년 10월 26일 1866년 11월 14일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아델하이트 공녀
슬하 1남 6녀[7]
5녀 마리아 다 아순상 공주
(Infanta Maria da Assunção)
1805년 6월 25일 1834년 1월 7일
6녀 롤레 후작부인 아나 데 제주스 마리아 공주
(Infanta Ana de Jesus Maria, Marquise of Loulé)
1806년 10월 23일 1857년 6월 22일 제1대 롤레 공작 누누 조제 세베루 드 멘도사 홀링 드 모라 바헤투
슬하 2남 3녀


[1] 주제 1세의 왕비. 펠리페 5세의 딸.[2] 고모 마리아나 비토리아(마리아 1세의 장녀)의 아들이자 어머니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친사촌으로 사촌 겸 오촌이다.[3] 어머니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둘째 남동생으로 외삼촌이다.[4] 어머니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첫째 남동생으로 외삼촌이다.[5] 마리아 2세, 페드루 2세[6] 어머니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남동생으로 외삼촌. 큰언니 마리아 테레사의 두번째 남편과 동일인물이다.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는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먼저 결혼했다가 사별한 뒤 마리아 테레자와 결혼했다.[7]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마리아 테레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