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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22:32:28

카를로스 페우셀레

카를로스 페우셀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후안 카를로스 이리바렌
(1930)
카를로스 페우셀레
(1930)
움베르토 레카테리니
(1931)
}}}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인
파일:Carlos_Peucelle.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카를로스 페우셀레
Carlos Peucelle
본명 카를로스 데시데리오 페우셀레
Carlos Desiderio Peucelle
출생 1908년 9월 13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망 1990년 4월 1일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신체 171cm | 체중 72kg
직업 축구선수(아웃사이드 라이트)
축구 감독
등번호 -[1]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산 텔모 (1925~1926)
스포르티보 부에노스아이레스 (1927~1930)
CA 리버 플레이트 (1930~1941)
감독 CA 리버 플레이트 (1945~1946)
CA 산 로렌소 (1954)
스포르팅 크리스탈 (1960)
CA 리버 플레이트 (1966)
국가대표 59경기 12골 (아르헨티나 / 1928~1940)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
2.1.1. 국가대표 경력
2.2. 감독 생활
3. 플레이 스타일&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클럽5.2. 국가대표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라 마키나의 전술적 토대였다.

2. 생애

2.1. 선수 생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페우셀레는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팀에서 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이름이 알려진 페우셀레에게 많은 클럽이 구애를 했고 최종 승자는 선수를 끌어모으며 신흥 강호로 떠오르던 리버 플레이트였다. 1930년부터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기 시작한 페우셀레는 1932년 베르나베 페레이라가 팀에 합류한 이후 첫 우승을 맛보았다. 그 이후는 팀과 함께 승승장구했다.

2.1.1. 국가대표 경력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그는 소속팀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라이트 윙어로 활약하였지만 팀의 사정에 따라 스트라이커로도 종종 활약하였다. 1929년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초대 월드컵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초대 월드컵의 결승 토너먼트에서 3골을 넣었고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2차례 우승을 차지하였다.

2.2. 감독 생활

라 마키나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지만 그가 다시 리버 플레이트의 감독이 되었을 때 모레노 등의 이탈로 이미 라 마키나는 해체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도력+멤버빨로 리버 플레이트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평가

드리블 스킬로 유명한 라이트 윙어였다. 또한 축구 지능이 뛰어나 소속팀과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다재다능한 멀티플레이어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리버 플레이트의 첫 전성기를 함께한 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했으며, 라 마키나의 전술적 토대를 마련한 선수로도 유명하다.[2]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이는 1969년 페우셀레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고 자신의 책 제목을 축구 시간과 라 마키나의 역사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