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cd0000> 말라야 공산당 서기장 친펑 陳平 | Chin Pe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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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ffe400> 본명 | 왕분후아 王文华 Ong Boon Hua |
| 출생 | 1924년 10월 21일 |
| 해협식민지 딘딩스 시티아완 캄풍콕 36번지 | |
| 사망 | 2013년 9월 16일 (향년 88세) |
| 태국 방콕 | |
| 장지 | 페락주 체모르 |
| 재임기간 | 말라야 공산당 서기장 |
| 1947년 3월 6일 ~ 1989년 12월 2일 | |
| 종교 | 무종교 |
| 소속 정당 | 말라야 공산당 |
| 군사 경력 | |
| 복무 | 말라야 항일 인민군 |
| 1941년 ~ 1945년 | |
| 말라야 민족 해방군 | |
| 1948년 ~ 1989년 | |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 말라야 비상사태 말레이시아 공산반란 |
1. 개요
말레이시아의 공산주의 정치인.2. 생애
시타완에서 중산층 화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때 공산주의 사상에 눈을 뜨고 1941년 말라야 공산당에 입당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말라야 항일 인민군으로 일본군에게 게릴라전을 펼쳤으며 한편 영국군 정보장교 프레디 스펜서 채프먼과 협조해 136부대소속으로 비밀 작전, 특수 정찰, 비정규전을 보조했다. 이 공으로 대영제국 훈장 4등급을 수여받았다.전쟁이 끝나고 서기장인 라이 텍은 연합국 산하에 공산당 자치정부를 만들어서 나중에 독립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기존 계획과 매우 달랐는데, 원래 계획은 일본이 말라야에서 철수하자마자 독립 국가를 세우자는 계획이었다. 이에 당에선 라이 텍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올라왔다. 이후 1947년 3월 6일, 감사 날짜가 잡혔고 당일이 되자 당 자금을 들고 도주해버렸다. 이후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홍콩으로, 그리고 이후에는 태국으로 도망갔고 그 직후에 잠적했다.
라이 텍이 도망가자 선거를 통해 친펑을 새로운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이후 친펑은 방콕과 홍콩을 방문해 현지 공산당원들에게 라이 텍을 찾아서 죽여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후 각각 2명의 베트남인 및 태국인 공산당원들이 라이 텍을 찾아다니다가, 이후 태국 공산당 고위 당원의 증언에 의하며 3명의 당원들이 라이 텍을 잡으려고 했으나 실수로 목을 졸라 죽여버렸고, 이후 시체는 메콩강에 마대에 담겨 버려졌다고 했다.
전후 식량가격 폭등으로 시작한 경제난 화교와 무슬림간의 갈등으로 말라야가 어지러워졌고 이에 친펑은 대영제국 훈장을 반납하고 파업과 폭동을 반영을 선동하며 주민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고 이에 영국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를 말라야 비상사태라고 한다.
1948년 말라야 민족 해방군을 결성하고 밀림 속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쳐 교통시설을 파괴하고 영국군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영국군역시 강경하게 진압했으며 반공 소수민족들을 고용해 게릴라들을 참수하며 잔혹하게 진압했고 공산군 절대 다수가 화교 출신이어서 무슬림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세력이 위축되었다. 결국 1960년 친펑을 포함한 수뇌부가 태국으로 달아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태국에서 당군을 재편하고 베트콩의 전술을 차용했다. 8년 뒤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고 말레이시아로 돌아와 말레이시아 공산반란을 일으켰다. 말레이시아 정부 역시 특수부대를 창설하고 영국, 뉴질랜드의 간접지원을 받아 대응했다. 1970년 공산군 내부분열이 발생했으나 1975년까지 세력은 탄탄한 편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말레이시아 정부가 유화적인 작전을 펼치고 세계의 공산권 국가들이 하나둘씩 무너져가며 전투의지를 상실했으며 1988년 정부와 협상을 시작해 1989년 평화협정과 동시에 당이 해산되었다. 친펑을 포함한 간부들도 태국으로 떠났다. 그 후로 고국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결국 2013년 방콕의 한 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고향 페락주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