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千葉工業大学, ruby=ちばこうぎょうだいがく)] 치바공업대학 Chiba Institute of Technology | ||
국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
분류 | 사립대학 | |
개교 | 1942년 | |
캠퍼스 | {{{#000000 츠다누마(津田沼) 캠퍼스}}} ^치바현 나라시노시(習志野市) 츠다누마^ {{{#000000 신나라시노(新習志野) 캠퍼스}}} ^치바현 나라시노시(習志野市) 시바조노(芝園)^ {{{#000000 도쿄스카이트리타운(東京スカイツリータウン) 캠퍼스}}} ^도쿄도 스미다구 오시아게^ {{{#000000 아카네하마(茜浜) 캠퍼스}}} ^치바현 나라시노시(習志野市) 아카네하마^ {{{#000000 치쿠사(千種) 캠퍼스}}} ^치바현 치바시 츠다누마 치쿠사쵸(千種町)^ | |
재학생 | ||
학부 | 9,310명 | |
대학원 | 777명 | |
교직원 | ||
교원 | 516명[ ] | |
직원 | 268명 | |
홈페이지 |
소개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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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바공업대학 정문 |
치바공업대학은 후지와라공업대학과 더불어 일본 제국에서 유이한 구제 사립 공과대학인 흥아공업대학(興亞工業大學)으로 1942년 설립되어, 현재 치바현 나라시노시(習志野市) 츠다누마(津田沼)에 본부를 두고 있는 명문 사립대학이다. 약칭 치바공대(千葉工大) 또는 공대(工大), 영어로는 CIT 또는 Chiba Tech.
치바공업대학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의 중추가 될 인재 양성과 함께 신교육, 그러니까 전인적 교육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인격을 가진 향학심 넘치는 리더를 양성한다"는 교육 이념으로 설립된 1942년의 흥아공업대학은 당시 도쿄제국대학을 대표로 한 기존의 대학 교육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었다. 치바공업대학은 메이지 시대에서 쇼와 시대까지 일본의 교육 정책과 활동에 관여해 온 사와야나기 마사타로 (세이조학원의 창립자)와 오바라 쿠니요시(타마가와학원의 창시자)를 중심으로 교육자로서의 경험과 그것에 근거한 연구를 바탕으로 창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과대학임에도 교육학자가 초대 총장을 맡아 대학의 기초를 쌓는 등 전통적인 기술교육과 전문교육뿐 아니라 리버럴 아츠 등 폭 넓은 교양 교육과 전인교육을 중시하는 교풍을 가지고 있다.
2. 설립 과정
메이지 유신 이후의 교육은 부국강병을 위한 기초로서 정부 주도로 서구화와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뤄졌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이 파견되어 19세기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면서 제국대학(문관 양성기관)과 일본육군사관학교•일본해군병학교(무관 양성기관) 등의 관학 엘리트 교육기관이 순차적으로 만들어져서 구미에 멸시당하지 않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중앙집권적인 교육이 이뤄졌다. 그러나 더 심각했던 것은 국가 중추를 담당하는 인재의 양성이었다. 에도 시대까지는 일본 정신을 바탕으로 지도자적 자질을 가진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 교육이 중심이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는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서양의 선진 지식과 기술을 갖춘 전문가 양성에 집중하면서 유신 원로들을 보조하는 전문가 집단이 숨가쁘게 배출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교육이 변질되고, 국가의 대계를 이끌던 원로들이 사망하면 각 전문가 집단이 분파주의를 형성해 대립하는 등 다양한 문제가 생겼다.치바공업대학을 창립한 인사들은 국토도 작고 자원도 없는 일본이 향후 국제 사회에서 생존 번영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사회적 풍조와 교육에 문제를 느끼고 제국대학의 관학을 비롯한 기존의 엘리트 교육, 구체적으로는 동양 정신을 잊고 서구주의에 경사된 모방 교육, 자유의지를 배제한 중앙집권적이고 창조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무기 교육, 학생 학생 개인의 개성구 인격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인 강의와 암기 위주 지필시험 성적의 우열만으로 사람을 평가를 하는 균일하고 단순한 교육으로는 진정으로 국가와 사회를 짊어질 인재는 키울 수 없다는 위기감으로 창립을 계획한 것이었다.
유신 이후 당시까지 19세기 유럽 스타일의 교사 중심 강압적 교육이 아니라 학생의 자주성과 주체적인 학습을 중시하는 자유 교육을 기반으로 세계 제일의 교육 입국 건설 실현을 지향했던 문부관료인 사와야나기 마사타로의 유지를 계승한 교육학자 오바라 쿠니요시 등에 의해서, 세계문화 공헌을 바라보고 일본제일 세계제일의 교육본산을 목표로, 1929년부터 흥아공업대학 설립 계획이 시작되었다.
계획을 세울 당시 오바라 등 관계자는 타키가와 사건 등의 경험에서 국립 교육의 한계를 느끼고 "자유와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학이 국가를 지탱하는 인재를 양성하기에 적합한 환경"이라며 "메이지 유신의 대업은 사학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이루었다"고 사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당초 구상은 타마가와가쿠엔이 경영하는 사립 기숙사제 대학으로 타마가와주쿠공업대학을 계획했으나, 태평양전쟁 중이었던 당시 일본의 전체주의 과 군국주의 사회적 풍조에 어긋난 교육 이념을[2] 내걸고 있었던 데다가 군부를 비롯한[3] 종래의 교육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강한 반발과 압박을 초래하여 설립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당시 문부대신, 도쿄시 교육국장, 교토제국대학 총장, 도호쿠제국대학 총장, 도쿄제국대학, 도쿄공업대학 학장 등 정치인들과 교육계 관계자는 물론 모리 콘체른, 도쿄 가와사키재벌을 비롯한 산업계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또 수는 적지만 황족으로 육군 대장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을 필두로, 일본제국 해군의 나가노 오사미 원수, 타카라베 타케시 해군대장, 야마나시 대장 등이, 그리고 일본제국 육군 에서는 히시카리 타카시 대장과 도이하라 겐지 대장 등의 군 관계자들까지 오바라의 생각에 공감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오바를 지원하고 있었다. 특히 저항 세력의 심한 반대에도 대학 설립 계획이 성공한 것은 황족 육군 대장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나가노 오사미 해군 원수의 압박과 하시다 구니히코 문부대신의 지원이 주효했다고 한다.
코아공업대학 |
대학령의 요건을 갖추고 대학 설립을 신청한 상황에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문부성 방침 지도에 따라 국책 실천 대학으로 발전하면서 태평양전쟁 중인 1942년 5월 15일 도조 히데키 내각하에 코아공업대학(興亞工業大學)의 명칭으로 타마가와가쿠엔 내에 설립되었다. 대학 설립 초기에 도쿄제국대학과 도쿄공업대학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받았으며, 그래도 부족한 실험 설비와 장비•기기 등은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1946년 치바현으로 이전하면서 교명을 치바공업대학으로 변경했다. 치바대학과 시바우라공대를 비롯해 와세다대학, 주오대학, 호세이대학 등과의 합병도 검토됐지만 1950년 치바현 츠다누마마치(현 나라시노시 ) 츠다느마 캠퍼스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3. 캠퍼스
- 츠다누마 캠퍼스: 3~4학년 및 대학원생
- 신나라시노 캠퍼스: 1~2학년
- 도쿄 스카이트리타운 캠퍼스: 로봇 등을 전시하고 있는 위성캠퍼스
- 아카네하마 교지: 운동장
- 치쿠사 교지: 기숙사
4. 조직
- 공학부
- 기계공학과
- 기계전자창성공학과
- 첨단재료공학과
- 전기전자공학과
- 정보통신시스템공학과
- 응용화학과
- 창조공학부
- 건축학과
- 도시환경공학과
- 디자인과학과
- 선진공학부
- 미래로봇공학과
- 생명과학과
- 지능미디어공학과
- 정보과학부
- 정보공학과
- 정보네트워크학과
- 사회시스템과학부
- 경영정보과학과: 경영시스템코스, 경영정보관리코스
- 프로젝트관리학과: 경영시스템코스, 프로젝트매니지먼트코스
- 금융•경영리스크과학과: 국제코스
- 대학원
- 공학연구과
- 창조공학연구과
- 선진공학연구과
- 정보과학연구과
- 사회시스템과학연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