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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첸 라마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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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판첸라마10세.jpg
10대 판첸 라마
한문 確吉堅贊
법명 최키 걀첸
영문 Choekyi Gyaltsen
티베트어 ཆོས་ཀྱི་རྒྱལ་མཚན
출생 1938년 2월 19일
중화민국 칭하이성 쉰화 사라족 자치현
사망 1989년 1월 28일 (향년 50세)
중화인민공화국 티베트 자치구 라싸
재임 기간 1949년 6월 3일 ~ 1989년 1월 28일
국적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궁중교육
직업 승려, 정치가
종교 티베트 불교
판첸라마
재임기간
10대 1949년 6월 3일 ~ 1989년 1월 28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중국에 협조했으나 투옥2.3. 복권과 말년2.4. 후계 문제
3. 참고문헌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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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베트의 10대 판첸 라마. 인도로 망명하여 중국에 저항한 달라이 라마 14세와 달리 중국과 협조하는 노선을 취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38년, 군벌 마부팡이 지배하던 중화민국 청해성 순화현 온도향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1937년, 판첸 라마 9세가 입적한 이래로 티베트 정부 산하의 켐포위원회는 새 판첸 라마를 찾는 작업 중에 있었다. 1941년, 켐포위원회가 파견한 조사단은 12명의 후보를 추려냈으며 그 중에서 청해성 순화에서 3살된 판첸 라마 10세와 1947년에 발견된 2명의 아이를 유력 후보로 보고 티베트의 타쉬롱포 사원에 보냈다. 판첸 라마 10세는 판첸 라마 9세의 옛 수행원들과 국민정부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리총통 리쭝런이 1949년 5월 18일, 최끼니마를 판첸 라마 10세로 선포하였다. 8월 10일, 국민정부 몽장위원회 위원장 관길옥이 최끼니마를 판첸 라마 10세에 즉위시켰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판첸 라마 10세를 정식 판첸 라마로 인정하지 않았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자 판첸 라마 10세는 자신의 명의로 마오쩌둥과 주더에게 중공 성립을 축하하는 통전을 보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이를 구실로 1949년 11월 24일자 라디오 베이징을 통해 판첸 라마가 마오쩌둥에게 티베트를 해방시켜 달라고 요청한 것이라고 선동한 후 1950년 10월, 티베트를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는 핑계로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침공 이후인 1952년 4월 28일, 인민해방군의 지원으로 라사로 도착하였다. 1954년, 라싸-청두, 라싸-시닝을 잇는 도로가 완공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공표되자 류사오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통일적 다민족 국가로 선포하고 각 지역의 민족자치지방은 중공의 불가분의 부분이라고 선포하였다.

2.2. 중국에 협조했으나 투옥

1954년 9월,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개최되자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겸 제1 부주임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년 11월, 인도에서 열린 석가모니 열반 2500주년 기념대회에 달라이 라마 14세와 함께 참가하였으며 자와할랄 네루 수상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1959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 14세를 따라가지 않고 티베트에 잔류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의 정통성을 저항하기 위해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마오쩌둥과 판첸 라마의 초상화를 걸라고 지시했다. 1961년, 베이징의 인민회의에 참석하여 <1960년의 티베트>라는 보고서를 제출함으로 중국의 티베트 통치를 찬양하는 등 중국에 협조하는 노선을 취했다.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의 승려들을 탄압하고 문화유산을 파괴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판첸 라마는 다시 1961년 말의 인민회의에 참석하여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한편 그에게 중국의 탄압이 너무 거세다고 우려를 표명하고 1962년, 나중에 <독화살>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탄압을 정리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7만언서라 불린 이 보고서에 대해 1962년 9월 북대하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격노하며 무산계급의 적들이 자행한 일대 반격이라고 평했다. 그러자 중국은 즉각 판첸 라마 폄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2년, 라싸로 돌아온 판첸 라마에게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를 비난하고 티베트 자치구 주비위원회 의장에 취임할 것을 요청했으나 판첸 라마는 이를 거절하였고 분노한 중국 정부는 판첸 라마의 공식활동을 중지시키고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1964년 8월, 판첸 라마는 중국에 대해 비판하는 연설을 한후 티베트 자치구 주비위원회에서 사회주의의 장애물로 규정되어서 완전히 숙청되었고 베이징으로 압송당했다. 1965년, 중국 언론은 판첸 라마가 티베트 자치구 주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비롯한 공직에서 해임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시기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 있었다고 하며 중국 정부가 판첸 라마를 강제로 둥비우의 손녀랑 결혼시키려 했다거나 판첸 라마가 중국을 탈출하여 해외 망명을 신청했다거나 아예 중국 측에게 암살되었다거나 하는 정체불명의 뉴스들이 보도되기도 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티베트는 고난에 처하게 되었다. 8월 하순에 이르러 라싸에서도 홍위병 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섬서성 성양시의 서장민족학원, 베이징항공학원, 베이징지질학원 등 본토에서 1천여명의 홍위병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티베트어 서적, 역사유물과 개인 필기장까지 반동으로 몰아 닥치는대로 때려부수고 불태웠으며 전통적 도로명과 지명을 모조리 개명했고 중공이 남겨둔 사원 529개도 파괴했다. 그동안 판첸 라마는 베이징에서 갖은 고문과 학대를 당하였으며 1974년에야 겨우 출옥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가택연금을 당하는 처지였다. 문혁이 끝난 후인 1977년 10월에 가택연금이 해제되었으며 1978년에 자신이 그간 감금당한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며 앞으로 사회주의 건설과 중국 내 민족들의 일치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자아비판한 후에 복권이 이루어졌다.

2.3. 복권과 말년

1979년 정협 5기 전국위원회 2차 회의에서 정협 전국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되었고 1980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에 티베트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6월에 18년 만에 티베트로 돌아온 판첸 라마는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운집한 군중들에게 축복의례를 베풀고 자신이 당한 고초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리고 후야오방이 주도한 티베트 자유화 정책에 발맞춰 사원의 복구, 티베트에 근무하는 간부들의 티베트어 학습, 티베트 독립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86년 2월, 20년 만에 묀란쳄모 의례를 주재하여 10만명의 참가자들에게 축복을 베풀었으며 그해에 열린 세계 불교연합회 15차 대회에 출석하였다. 티베트 민족의 특성을 보호하기 위해 불교를 증진한다는 구실로 티베트어 고급불학원을 창설하여 불학원 원장에 취임하였고 중국불교협의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하지만 1987년 9월, 대대적인 승려들의 반중 시위가 일어났고 이들은 설산사자기를 흔들며 티베트 독립과 달라이 라마 만세를 외쳤다. 판첸 라마는 이에 대해 분리주의 운동이 공산당의 종교적 자유 허용 정책을 포기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티베트인들은 1979년 이래로 실시된 티베트에 대한 자유조치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87년, 티베트 학자들과의 비밀 회동에서 1962년에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조차도 축소된 것이며 10~15%의 티베트인이 투옥되었다고 털어놓는 등 중국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1988년 1월, 중국 정부는 판첸 라마를 라싸로 파견하여 새로운 묀람쳄모 의례를 준비하게 했고 판첸 라마는 1987년 9월 소요로 체포된 승려들의 석방을 알선하였다. 하지만 1988년 3월, 라싸에서 판첸 라마가 거행한 묀람쳄모에서도 시위가 벌어졌으며 1988년 12월, 조캉 사원에서 중국군이 발포하여 2명의 티베트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중공은 귀주성 서기 후진타오를 티베트 서기로 임명하고 티베트인들의 저항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험악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판첸 라마는 다시 라싸로 파견되었는데 지난 30년간 티베트가 발전을 위해 치른 대가가 소득보다도 크다고 말하는 등 중국의 탄압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9년 1월 28일 시가체에서 석연치 않은 심장마비로 입적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판첸 라마의 장례식 거행을 담당하는 한편 령탑 건립을 명령하였다. 중국불교연맹은 달라이 라마 14세를 장례식에 초청했으나 달라이 라마는 거절하였으며 1989년 3월 5일, 1988년 시위에서 사망한 승려들을 추모하기 위한 승려들의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중국 경찰이 발포하자 폭동으로 이어졌고 3월 7일, 티베트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계엄령은 1990년 4월 30일에야 해제되었다.

2.4. 후계 문제

판첸 라마 10세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를 찾는 일이 정치적 현안으로 대두하였다. 원래 환생자를 찾는 것은 3년 이내로 실시되어야 했으나 티베트에서 발생한 정치적 소요 때문에 1995년까지 환생자 탐색이 연기되었다. 공산당은 타쉬룽포 사원에 중국 안에서만 환생자를 찾는다는 조건으로 환생자를 탐색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타쉬룽포 사원은 나그축카에서 게둔 최키 니마라는 소년을 찾아 판첸 라마의 환생자로 확인하고 1995년 4월, 이를 비밀리에 달라이 라마 14세에게 알렸다.

1995년 5월 14일, 달라이 라마 14세가 중국 측에 그 어떠한 논의도 하지 않고 선수를 쳐서 공식적으로 게둔 최키 니마를 판첸 라마 11세로 선포하자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기만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격렬히 반발하며 달라이 라마는 정치적으로 중국을 배신하고 종교적으로 불교를 배신했다고 맹비난하였다. 중국 정부는 1996년 5월, 티베트에 달라이 라마 사진을 거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판첸 라마의 지명권은 달라이 라마가 아니라 중국 정부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게둔 최키 니마를 구금하고 1995년 11월 29일 새벽 6시, 중국 정부는 중국 공산당원의 자녀인 기알첸 노르부를 판첸 라마 11세로 공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이고, 미국 정부도 모습을 드러내라고 촉구했다. #

3. 참고문헌


4. 여담

보이차를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잘 알려진 인물이다. 운남성에서 재배되는 보이차는 티벳으로 많이 팔렸는데 이중에서 버섯모양으로 긴압한 "긴차"는 티벳 불교의식에서 쓰이던 것으로 사원에서 소비되고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이후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생산이 중단되고 대신 벽돌모양의 '전차'만 찍어내도록 했기 때문에 긴차의 맥이 끊어져버렸다. 그러다 판첸라마가 복권되고 세계불교대회를 준비할때 하관차창을 방문해서 긴차의 생산을 요청했고, 이렇게 긴차가 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찍어낸 복각 긴차는 "반선긴차"라고 불리며 일종의 레어템 취급을 받고 있으며 현재도 하관차창에서 티벳 판매용으로 "보염패"라는 브랜드로 긴차를 제조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