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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3-26 03:53:26

최우평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최우평
崔羽平[1]
平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후괴(後槐)
본관 강화 최씨(江華 崔氏)[2]
출생 1878년 3월 22일
전라도 남평현 도개면 입석리
(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덕동1리 입석마을)
사망 1908년 10월 27일
전라남도 능주군 부춘면 석정리
(현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석정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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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8년 3월 22일 전라도 남평현 도개면 입석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덕동1리 입석마을)에서 아버지 최병교(崔柄敎, 1859. 7. 16 ~ 1910. 3. 1)와 어머니 도강 김씨(1856. 8. 1 ~ 1898. 2. 2) 김병환(金秉煥)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최일교(崔一敎, 1845. 1. 25 ~ 1862. 9. 21)에 입양되었다.

그는 1907년 12월 5일 심남일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키고 1908년 3월 의병 600여명을 소집하자 심남일 의병대에 입대하여 나성화(羅成化)·노병우(盧炳友)와 함께 후군장(後軍將)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달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그는 그해 3월 7일 있었던 강진군 오치동(五治洞) 전투를 비롯하여 남평군·영암군·장흥군·해남군·능주군 등지에서 9회에 걸쳐 일본군 및 일본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그 뒤 10월 27일 심남일 의병진이 그 이튿날 일본군 헌병대를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나주군 노안(老安)에 머물러 있던 도중, 이 계획을 미리 탐지한 일본군 30여명에 의해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10여 차례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그는 능주군 석정(石亭)에서 직접 일본군을 꾸짖으며 돌진하여 싸우다가 결국 일본군이 쏜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 [2] 우윤공파(右尹公派) 27세 종(鍾) 항렬. 족보명은 최종익(崔鍾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