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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1:44:13

최수일(정무직 공무원)

박정희 정부 시절 대한민국 의료보험 시대를 연 공직자
최수일
崔守一 / CHOI SOO IL
파일:최수일사진.png
<colbgcolor=#404a9e> 출생 1931년 12월 16일
중국 용정
사망 2017년 1월 31일
본관 강릉최씨
본적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배우자 이기숙
자녀 아들 최영수,최영인

1. 개요2. 생애3. 대한민국 국민연금 및 건강보험제도 시행
3.1. 국민연금 제도 시행3.2. 모든 정부 부처가 반대한 건강보험 제도의 시행
4. 약력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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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1년 중국 용정에서 출생하였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직전에 월남하여 육군장교로 참전하였고, 5.16혁명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소속 보건사회부 연락장교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 박정희대통령 이강력히 추진하고자 했던 국가 근대화사업의 토대가 되는 자활지도사업을 담당하면서 국가발전에 기여하였다. 자활지도사업은 몇 년후 ‘근면.자조.자립’ 정신을 기치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으로 발전하면서 1970년대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뒷받침해준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1972년 초대 보건사회부 사회보험과장으로 우리나라 국민연금제도의 기틀을 만들었다. 당시 오일쇼크로 국민연금제도 시행이 유보되었으나, 16년후인 1988년 보건사회부 차관으로 재임하면서 국민연금을 시행함으로써 그 소임을 마무리하였다.1977년 보건사회부 사회보험국장으로 건강보험제도를 도입하고 시행한 주역으로 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당시 건강보험제도에 대해 정부부처 및 보건사회부 내에서 조차 인식의 한계가 있었다. “시기상조다”, “국가를 망치게 하는 공무원이다”라는 반대를 딛고 건강보험제도를 추진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음으로써 대한민국 건강보험 시대를 열었다.88서울올림픽을 앞둔 1983년 제3대 환경청장으로 취임하면서 강력한 환경정책을 추진 하여 도심의 공해문제를 해결하고,특히 당시 오염이 심각했던 한강 및 중랑천을 깨끗히 정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한국제약협회 상근부회장, 의료보험연합회장(현 심평원) 백신협회장을 지냈으며, 녹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등을 수훈하였다.

2. 생애

1931년 12월 16일 중국 용정에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용정에서 소학교를 나오고 광명중학교에 진학하였다.광명중학교 출신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주요 인물로는 정일권 前 국무총리, 박임환 대장(1군사령관, 교통부장관 역임), 김동하 중장(해병대사령관 역임), 이주일 대장(감사원장 역임), 서대숙 前 하와이대 교수, 지종걸 前 국회의원, 윤동주시인, 문익환 목사 등이 있다. 해방 후 중국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 부친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숙청의 와중에 사망하였고 최수일 또한 중학교 3학년 아직 어린 나이에 구타를 당하면서 인민재판을 받게 된다.연일 계속되는 구타와 인민재판으로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용정을 탈출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이런 결심을 모친에게 말씀드리자, 아들의 마음을 헤아린 모친은 “그래, 너만이라도 도망가서 살아라”라고 말씀하신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최수일은 모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세월이 흐른 후 혼자되신 모친, 폐병으로 죽어가는 형, 세 살짜리 어린 동생을 남겨두고 혼자 살려고 도망친 것에 대해 두고 두고 자책한다. 최수일은 일단 함경북도 청진의 친척집으로 피신하여 거기서 청진사범전문학교를 졸업 한 후 자유민주주의를 찾아 월남한다. 월남 후 얼마 안있어 6.25전쟁이 일어나자 장교로 입대하여 참전한다. 종전 후 육군 정보장교로 계속 복무하던 중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박정희의장이 이끌던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차출되어 중앙정보부 파견 근무 명령을 받게 된다.그러나 당시 2년여간 폐결핵으로 투병하다 겨우 회복되는 상태로 창설 초기 중앙정보부의 격무를 감당하기 어려워 다른 부서 배치를 요청하였고, 그때 배치된 행정 부처가 평생의 인연을 맺게 되는 보건사회부였다.1960년대 박정희대통령이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던 국가 근대화의 토대가 되는 자활지도사업을 담당하였다. 자활지도사업은 훗날 ‘근면, 자조, 자립’ 정신의 새마을운동으로 발전하면서 1970년대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뒷받침해준 정신적인 힘이 된다. 1972년 초대 보건사회부 사회보험과장으로 우리나라 국민연금제도의 기틀을 만들었다. 당시 오일쇼크로 국민연금제도 시행이 유보되었으나, 16년 후인 1988년 보건사회부 차관으로 재임하면서 국민연금을 시행에 큰 역할을 한다.특히 최수일은 1977년 보건사회부 사회보험국장으로서 건강보험제도를 시행한 주역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당시 건강보험제도에 대한 사회 전반 및 관련 경제부처, 보건사회부 내에서 조차 인식의 한계가 있었으나 그는 “시기 상조다. 국가를 망치게 하는 공무원이다”라는 반대를 딛고 강하게 건강보험 제도 시행을 추진하여 박정희대통령의 재가를 받음으로써 대한민국 건강보험 시대를 열었다.88서울올림픽을 앞둔 1983년 제3대 환경청장으로 취임하면서 강력한 환경정책을 추진하여 도심의 공해 문제를 해결하고 특히 오염의 정도가 심각하였던 한강 및 중랑천 정화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여 지금의 맑은 한강, 중랑천을 만들었다. 1988년 공직을 마감한 후 한국제약협회 상근부회장, 의료보험연합회장,백신협회장을 지내는 등 50년 이상을 대한민국의 의료발전을 위해 50년 종사했다.

3. 대한민국 국민연금 및 건강보험제도 시행

3.1. 국민연금 제도 시행

1972년 청와대는 “철저하고 신속하게 국민연금제도 시행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보건사회부에 내린다.대통령의 직접 지시였기 때문에 당시 보건사회부로서는 발등의 불이 떨어진 격이자 부처와 장관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당시에는 부처내에 연금을 다루는 부서도 없었고 사회보험이라는 용어 조차도 낯설었던 시기였다. 보건사회부내에 사회보험과가 신설되었고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은 사회보험과장에 최수일이 임명된다.국민연금에 대한 아무런 기초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외국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가면서 법제, 관리제도, 연금수리, 보험요율, 적립금 활용과 지불 재정의 안전화 방안, 적절한 급여수준에 따른 노후빈곤 완화, 정액 기초연금과 소득비례 연금의 2층 구조연금, 보험료의 국세청 징수에 따른 낮은 무연금자.저연금자 비율 등 제도시행에 필요한 내용들을 하나 하나 완성해 나가고 최종입법에 앞서 공청회를 열게 된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중화학공업 자금 동원을 위해 실시하는 제도로 노동자를 수탈하는 제도”라는 비난을 받는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1973년 하반기에 국민연금 시행을 목표로 국민복지연금법이 최초로 제정되고 실시 행정부서로는 보건사회부에 복지연금국이 신설된다. 그러나 법안 공포를 눈앞에 둔 1973년 10월 오일쇼크가 발발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경제가 공황상태에 빠지자 대통령 긴급조치 제 3호에 의해 국민연금 실시가 유보된다.이 유보조치는 1988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다만 국민연금 작업과정에서 당시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최수일에게 공무원 연금법과 동일한 수준의 사립학교 연금법 수립, 시행을 제안하였고 최수일도 그 필요성을 인정, 1974년부터 사립학교 교직원 연금 시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이로써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과 같이 사립학교 교직원도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으로, 당시 민관식 장관의 혜안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3.2. 모든 정부 부처가 반대한 건강보험 제도의 시행

국민연금제도는 제정과 동시에 그 시행이 보류되는 처지가 되었다. 최수일은 1975년 복지연금국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국민연금제도 보다도 더 시급한 국민건강보험제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970년대 당시에는 병원비 부담이 커서 국민들이 마음 놓고 병원치료를 받을 수 없는 시기였지만 그 누구도, 그 어떤 부처도 건강보험을 실시하고자 하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 이에 최수일은 “가난한 사람도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강보험제도“ 시행에 대해 몇차례 장관 브리핑을 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가 중공업 우선 정책을 추진하던 시기라 오히려 국가를 망치게 하려는 공무원으로 인식되어 산하기관으로 전보될 위기도 몇차례 겪는다.비록 보건사회부내에서 조차도 부정적 시각이었지만 최수일은 건강보험 제도 시행에 대해 조용히 준비하면서 우리나라 건강보험 50년 역사가 조심스럽게 싹을 피우기 시작한다.1975년말 신현확씨가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각 실국의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최수일은 건강보험제도에 관한 계획과 전망, 제도 시행의 필요성을 보고한다. 신현확 장관은 시행안을 확인한 후 이전 장관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며 건강보험제도 시행에 적극 동조한다. 그리고 마침내 부처의 입법 방침을 결심하고 1976년 5월 임시국회에 법안을 제출하도록 승인한다. 이에 최수일은 우선 관련부처 와의 협의를 추진한다. 그러나 의외로 관련 부처의 반대 의견이 강해 난관에 봉착한다. 경제차관회의에서 부터 보류되자 국무총리실에 가서 직접 브리핑을 하고 다시 경제차관회의에 회부하여 심의, 의결을 받아낸다.이어 경제장관회의에 상정하지만 부결되자 최수일은 당시 청와대 이희일 경제수석을 방문하여 브리핑하지만 여기서도 승인을 받지 못한다. 참다 못한 최수일은 경제수석 앞에 브리핑 서류를 집어 던지고 나왔고, 국장 직급이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서류를 집어 던진 무례한 행동이 문제가 되었으나, 마침 최수일을 적극 지원하고 있던 박승함 당시 보건사회부 차관이 중재하면서 위기를 넘긴다.이러한 우여 곡절을 겪으면서 1976년 9월 11일 건강보험 시행안이 국무회의에 상정된다. 이때 국무회의를 직접 주재한 박정희대통령은 “건강보험을 실시하되 단계별로 신중히 확대 실시하며, 제도 시행 및 정착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와 함께 승인한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의 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자 1976년 12월 정기국회를 통과하였고 국민들에게 건강보험제도 시행을 공표한다. 당시 건강보험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여 최수일은 KBS, MBC, TBC 3개 방송국에 출연하여[1] 건강보험 제도에 대해 국민들에게 소상히 설명하기도 한다. 이로써 1977년 7월 1일부로 대한민국의 건강보험제도가 시행된다.

4. 약력

1952.06.13.~1953.07.27. : 육군 대위로 6.25전쟁 참전
1961.06.01.~1962.11.10. : 국가재건최고회의 보건사회부 장관실 파견 연락장교
1962.11.11.~1967.03.31. : 행정사무관(사회과, 이민과)
1967.04.01.~1975.01.27. : 서기관(약국제도담당관, 행정관리담당관, 연금기획과장)
1975.01.28.~1981.08.05. : 이사관(복지연금국장, 사회보험국장, 위생국장)
1981.08.06.~1983.02.16. : 환경청 차장
1983.02.17.~1983.07.08. : 보건사회부 기획관리실장
1983.07.09.~1986.05.23. : 환경청 청장
1986.05.24.~1988.03.05. : 보건사회부 차관
1989.01.01.~1990.09.30. : 제약협회 상근부회장
1990.10.01.~1993.09.30. : 의료보험연합회 회장

5. 저서

대한민국 의료보험, 이렇게 만들어 졌다(최수일.최영수 공저)

[1] 유튜브 “의료보험-최수일” 검색하면 당시 방송내용을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