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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6.4 항쟁/사건 진행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천안문 6.4 항쟁
1. 1989년 4월
1.1. 4월 17일1.2. 4월 22일1.3. 4월 26일
2. 1989년 5월
2.1. 5월 13일2.2. 5월 15일2.3. 5월 18일2.4. 5월 19일2.5. 5월 20일2.6. 5월 23일2.7. 5월 24일 또는 5월 27일2.8. 5월 30일
3. 1989년 6월
3.1. 6월 1일3.2. 6월 2일3.3. 6월 3일
3.3.1. 영국의 외교문서에 기록된 시위진압 내용
3.4. 6월 4일
3.4.1. 탱크맨3.4.2. 민주주의의 여신상

1. 1989년 4월

1.1. 4월 17일

중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후야오방의 추모를 위해 인민영웅기념비로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수백 명의 대학생들과 시민들로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중국정법대학의 대학원생들 약 600여명과 청년 교사들이 스스로 만든 화환을 들고 진혼곡을 부르면서 천안문 광장까지 행진했고, 약 60여명이 후야오방의 집에 문상을 갔다. 오후 3시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학생 왕단이 교내에서 530위안을 모금해서 화환을 사 천안문 광장으로 보냈고, 후야오방의 집에 추도하러 갔다. 24시부터 베이징대학, 베이징사범대학, 중국정법대학, 칭화대학 등 베이징 소재 대학생 약 6천여 명이 각 학교로부터 행진을 시작하여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뒤 후야오방에게 화환을 바쳤다. 그리고 수만 군중들이 정좌한 상태에서 후야오방에 대한 정확한 평가, 공무원의 직권을 남용한 불법 전매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한 내용을 담은 7개조 요구를 내놓았다.

1.2.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시안시에서는 군중 300여 명이 10여 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성(省) 정부를 습격했다. 구호는 '공농(工農)과 연합해 폭정을 타도하자'였으며 시위는 점점 내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3. 4월 26일

'덩샤오핑, 시위가 커지자 북경 시위 통제 지시.'라는 문구와 함께 인민일보는 이날 일명 '4.26 사설'로 불리는 사설을 통해 시위대와 근로자, 농민공 시위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했다. 이 사설은 시위대를 격분하게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시위 분위기를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1989년 5월


1989년 5월 2일자 KBS1 <뉴스초점> 보도 영상.

2.1. 5월 13일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학생 대표들이 '단식서'를 작성해 전국 인민들에게 발표했다. 이 글을 읽은 인민들은 학생들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시위대에 점차 동조하기 시작했다.

우얼카이시 둬라이티가 천안문 광장을 반쯤 비워서 소련 손님맞이를 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하였으나 차이링과 같은 초강경파들에 의해 거절당했다. 천안문 6.4 항쟁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우얼카이시 둬라이티는 이때쯤 운동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한다. 이는 수십년만에 이뤄지는 중소정상회담을 완전히 망쳐놓아 덩샤오핑 이하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얼굴에 제대로 먹칠을 한 결과로 이어졌는데, 중국 지도부는 학생 지도부를 매국노로 인식하게 됐는데 천윈, 왕전, 리셴녠, 펑전 등 건국 1세대 지도자들은 모두 격노하여 덩샤오핑에게 전화해서 이들을 가만 둘 수 없다고 행동을 촉구했다. 심지어 제일 동정적이었던 자오쯔양조차도 학생들이 정부를 핍박하고 있다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2.2. 5월 15일

5월 15일에 소련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방중하기로 했으나 천안문 광장이 시위대로 가득 찬 것 때문에 예포는커녕 카퍼레이드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천안문 앞의 장안가(長安街)를 통과하지 못하고 뒷길로 돌아 숙소인 베이징 서쪽의 조어대(釣魚臺)로 향했고, 회담을 하면서도 광장과 거리의 시민들과 시위대가 내는 소리가 들리는 등 중국 지도자들로서는 대단히 창피한 일이 벌어졌다. 특히 개혁개방으로 타임지에 두 번이나 올해의 인물로 선정이 된 덩샤오핑에게는 더더욱 얼굴을 붉힐만한 일이었다. 양상쿤은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사과해야 했고, 고르바초프와의 오찬 행사에 참가한 덩샤오핑은 국제적 망신에 긴장하고 분노한 나머지 젓가락질 실수를 해서 먹으려던 음식을 흘렸는데 이것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중국-소련 국경분쟁중월전쟁으로 전통적인 공산주의 우방국들과의 관계가 개판인 것을 추스르고 중소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소련의 서기장이 직접 내방한 역사적 상황에서 국제적 망신을 당한 중국공산당은 이 사태를 난동으로 규정했다.

2.3. 5월 18일


베이징 일부 지역에 한정해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오전 11시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공산당 원로들은 우얼카이시 둬라이티, 왕단 등 학생 측 대표와 전격적으로 면담을 가졌다. 신임 총리 리펑은 당내 강경파들을 대신해서 학생들을 강한 어조로 설복시키려 했으나, 학생 지도층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당일 당내 회의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기를 결정했고,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통수권을 쥐고 있던 덩샤오핑은 출동명령서에 사인했다. 오직 쉬친셴만이 "인민해방군은 인민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 없다."며 출동을 거부했는데, 그는 군법에 의해 직위해제 처분되어 소식이 끊겼고, 서방에서는 사형에 처해졌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실제로는 명령불복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형을 받고 이후 스자좡시에서 거주지 제한조치에 취해졌다고 한다. 사건 20여 년 후 홍콩언론인 빈과일보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인터뷰했는데, 그는 군인연금도 끊기는 등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었음에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 때로 되돌아가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2.4.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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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총서기 자오쯔양은 계엄선포를 막고자 동분서주했으나 5월 19일 선포될 계엄령을 막지 못하고 19일 새벽 4시 45분에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했다.[1] 그리고 병가를 사유로 사임장을 제출하고 중국공산당을 떠났지만, 결국 체포된 이후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되었고 현재까지도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몇 차례 덩샤오핑이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 시도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천안문 6.4 항쟁에 대한 입장을 선회하지 않았다.

리펑의 주장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덩샤오핑의 집에서 예비회의가 개최되어 신임 총서기로 장쩌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조직부장 쑹핑을 내정하였다. 동시에 후야오방과 후치리 숙청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다른 문건들과 교차검증되지 않으며 리펑의 일기 뒷부분에 이와 배치되는 내용도 있어서 가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오후 10시, 중앙 및 베이징시 당정군 간부대회가 소집, 혁명원로들과 군부지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자오쯔양과 후치리 등 온건파를 배제하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자오쯔양은 끝내 병을 이유로 이 대회에 참가하길 거부했으며, 차오스가 회의를 주재했다. 자오쯔양의 불참은 또 다시 당의 분열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해당행위로 간주되어 당 지도부의 분노를 샀다. 보고자를 맡은 국무원 총리 리펑이 이번 사태를 진압하지 못한다면 혁명선열의 고귀한 피가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였고, 5월 20일 새벽에 국무원 명의로 베이징시의 8개구에 계엄 실시명령을 내렸다. 원래는 21일 0시를 기해 계엄을 선포하기로 했으나 계엄 소문이 퍼지면서 20일 오후 10시로 앞당겨졌다.

2.5. 5월 20일

중국공산당계엄령을 선포한다. 중국공산당은 계엄령을 내린 후 제24군, 제27군, 제28군, 제38군, 제63군, 제65군, 제39군, 제40군, 제54군, 제67군 및 베이징 위수구의 군대 도합 약 5만 명의 대군을 베이징에 투입하여 펑타이구, 류리차오, 샤커우, 후자루, 고쳉, 칭허, 우커쑹, 푸싱루, 외삼환을 둘러쌌다. 난위안 비행장에는 공수부대 15군이 사흘에 걸쳐 투입되었고, 천안문 광장 상공에는 군용 헬기 5대가 등장해 대량의 전단지를 띄워 시위대의 퇴출을 호소했다.

하지만 저항하려는 학생들의 의지는 결연하였으며 곳곳에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군용차를 막으려 했다. 5월 20일, 38집단군 산하 1만 5천명의 병력이 도심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시위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끝내 무산되고 말았고, 65군은 여러 차례 천안문 광장까지 전진하려고 노력했지만 학생들의 반격에 밀려 스징산구하이뎬구로 후퇴했다. 포병 14사단은 샤허에서 기차를 통해 베이징에 도착했지만 역시 시민들에게 가로막혔다. 군 지도부와 당 보수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차오스는 당 지도부들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라고 발언했다. 이에 양상쿤이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계엄군에게 최대한 자제하고, 무기 사용을 엄격히 통제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절대로 총을 쏘지 말고, 다만 벽돌과 병을 던지는 시위대에겐 곤봉으로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6월 3일까지는 대단한 유혈사태가 없었다.

한편 시위대는 베이징 외곽으로 달려나가 눈물로 호소하면서 군인들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시위대에게 포위된 중국군에게 시위대측은 군인들에게 시위대를 지지하기를 호소했고, 시민들은 오히려 포위된 병사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반대로 진압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 중이었던 학생이 탈진해 쓰러지면 군의관이 돌보거나 군차량으로 병원에 후송시키곤 했다. 이렇게 군과 인민이 서로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고, 1970~1980년대 악랄한 정부의 민주화 시위 탄압을 겪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이 공산 국가라지만 저렇게 국민을 사랑하는 점은 배워봄직하다."는 여론이 강세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계엄 집행의 임무를 받은 중국군 장교들은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등을 보고 듣지도 말고 오직 중국공산당이 발표한 '4.26 사설'만을 보도록 명령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군중들을 진압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계엄군이 보통화를 몰라 시민과 소통이 안됐다는 주장도 있으나 시민들과 계엄군이 소통하는 영상은 엄청나게 많다. 계엄선포 직후 베이징에 진입하는 계엄군을 학생들이 눈물로 막아서자 계엄군이 동요하면서 눈물 흘리는 영상도 있다. 그리고 보통화를 모른다면 군복무는 어떻게 가능할까?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중앙군사위원회는 5월 22일,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철수하였고 베이징 시민들은 환호하면서 계엄군에게 꽃과 음식을 전달하면서 환송했다. 시민들의 지지도 더욱 강해졌는데, 특히 그간 공산당과 학생들에게 모두 무시당하던 자영업자들을 비롯한 신흥 부르주아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자오쯔양은 5월 21일,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비상회의를 개최하여 최후의 중재를 시도했고, 최소 51명의 상무위원들이 이에 동의하였으나 양상쿤은 이미 계엄이 선포되었으니 늦었다고 지지하지 않았으며 리펑은 온건파 완리의 귀국을 막으면서 자오쯔양의 입지를 좁혔다.

2.6. 5월 23일

후난성에서 온 세 사람이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 초상화에 페인트를 뿌리고 성루 벽에 '독재는 종식되어야 한다', '개인 우상화는 종식되어야 한다'라는 현수막을 붙여놓아 당국에 연행되었다. 각각 버스회사 직원, 신문사 디자인 편집국장,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들은 당시 당국에 탄압의 구실을 잡힐까봐 두려워했던 대학생들에 의해 공안에 연행되었다. 학생운동이 탄압된 후에 베이징 중급법원에서 ‘반혁명파괴죄’와 ‘선전선동죄’로 각각 16년, 20년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7. 5월 24일 또는 5월 27일

자오쯔양 총서기의 해임이 결정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문헌과 증언에 따라 5월 24일과 5월 27일로 갈린다.

한편 홍콩에서는 학생시위를 지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연이어 벌어졌고 5월 27일에는 홍콩의 스타들이 총출동한 민주가성헌중화(民主歌聲獻中華, Concert for Democracy in China)가 개최되었다. 또한 홍콩 시민들은 많은 돈을 모금해서 학생들에게 보내주었는데, 이 돈을 어떻게 사용, 관리할지를 두고 학생 지도부 안에서는 내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8. 5월 30일

베이징 소재 여덟 곳의 예술대학 교원들과 학생들이 공동 제작한 '민주주의의 여신상'이 새벽 천안문 광장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높이 8m, 직경 2m 남짓했다. 받침돌은 석고로 제작되었고 전체는 발포수지로 제작되었다.

5월말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왕단과 우얼카이시 둬라이티가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을 철수시키자는 의견을 몇번 내기도 했었으나 차이링과 같은 초강경파들에 의해 거절당했다.

3. 1989년 6월

이 기나긴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도달한 달이었다.

3.1. 6월 1일

중국공산당은 세계 언론사들의 라이브 방송을 제한하고 시위사진과 인민해방군의 사진을 찍는 것을 금지했고 검열했다.

3.2. 6월 2일

류사오보, 베이징대학 사회학연구소 강사 저우퉈, 사대주보의 전 편집장 가오신, 대만 가수 허우더젠 등 소위 '4군자'의 단식 선언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시위대에게 있어 상황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물자와 자금 관리가 주먹구구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일부 철없는 학생들은 많은 물을 낭비하는 등 단식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계엄령의 선포 이후 지방의 시위들은 대부분 진압되어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으며, 베이징의 시위 동력도 약해지고 있었다.

한편 이날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가 덩샤오핑의 집에서 소집되었다. 리펑은 광장을 즉시 정리하자고 제안했다. 덩샤오핑은 동란이 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경고했으며 그 결과가 문혁보다 심각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때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중심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거물이 없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6월 2일 저녁에 광장 정리 계획을 실시하여 6월 4일까지 완료하고, 광장에 남는 시민들은 "자신의 책임"으로 간주하기로 하였다.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및 계엄부대 지휘부 책임자 회의가 연속적으로 소집되어 6월 3일 0시에 계엄부대를 베이징 시내로 진주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2만 5천명의 계엄군이 인민대회당에 배치되었으며 광장 남쪽에 3천명의 부대를 추가 배치했다.

계엄군의 진입에 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고 대학 방송실들은 시민들에게 참여를 촉구했다.

3.3.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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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표시된 핏자국은 유혈 진압이 일어난 곳이며, 보라색 화살표는 계엄군이 들어온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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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 과정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이지만 상당히 잔인하다.
6월 3일 밤에 촬영된 영국 BBC 뉴스 영상이다.[2][3]
1995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The Gate of Heavenly Peace (한국 개봉명 태평천국의 문)"의 일부 영상이다.
마지막 진압 당시의 상황을 담은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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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을 설득하는 베이징 시민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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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을 하달받자 즉시 출동하는 계엄군의 모습이다.
인민을 해방시키겠다는 군대가 인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했다.

6월 3일 오후 4시, 중공중앙과 계엄군 긴급회의가 소집, 리펑이 반혁명 폭란이 수도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하면서 동란을 폭란으로 승격하였다. 이에 대해 베이징 시장 천시퉁도 동의하였으며, 중앙군위 부주석 양상쿤은 덩샤오핑의 발포 허가 명령을 전달했다. 다만 덩샤오핑은 광장에서는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였고 인식과 달리 광장에서는 사망자가 없었다.[4] 대부분의 사망자는 계엄군의 진입 가도에서 발생했다. 이는 덩샤오핑이 냉혹한 결단을 내렸지만 동시에 폭력 사용에 있어 상당히 자중한 것은 사실임을 보여준다.

오후 6시 30분, 베이징시와 계엄부대 지휘부의 긴급 통지가 발표되어 시민들은 모두 집에서 나오지 말고, 광장의 사람들은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역으로 더 많은 시민들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9시에 텔레비젼 방송으로 귀가가 종용되었으며, 10시에 계엄군이 도심으로 진입하기 시작, 10시 반에 발포하기 시작하면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중국공산당은 6월 4일 새벽 6시까지 일체의 예외 없이 시민들을 천안문 광장에서 해산시킬 것을 명령했고 밤 10시 베이징 동서에서 진입한 중국군 제38집단군과 공군 제15공수부대, 육군 제39집단군, 육군 제54집단군 등은 전차와 총기를 동원한 무차별 발포로 군중을 강제해산시켰다. 먼저 비무장 군인들이 도열해서 전진했으나 시민들의 저항에 후퇴했고, 그 다음에는 곤봉을 든 채 접근했다가 마찬가지로 후퇴했으며, 끝내 경기관총과 소총으로 시위대에 발포했다. 군인들 뒤에는 전차와 장갑차가 전진했다. 장갑차 위에 탄 군인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늘에 대고 중기관총을 쏘다가 시민들이 보이면 총구를 시민 쪽으로 들이대서 거부감 없이 쏴죽였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도망가는 시민들까지 전차를 몰고 가서 짓밟아 죽였다고 한다. 심지어 시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집에서 쉬고 있던 시민들도 사살당하거나 부상당했다. 군인들이 일반 가정집에도 총을 난사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심지어는 외국인 전용 거주구역에도 발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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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시민들은 격분해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버스나 택시 등을 동원해 전차가 도심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돌과 벽돌을 던졌으며, 화염병[5]으로 전차와 장갑차를 폭파시키고 승무원들을 끌어냈다. 끌려나온 군인들은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무차별 구타를 당해 맞아 죽었고, 시민들은 맞아죽은 전차, 장갑차 승무원 시체를 질질 끌고다니면서 불을 붙여서 다리에 매달거나 버스 채로 태워버리기도 했다. 총탄에 맞아 다친 부상자들은 시민들이 자전거와 수레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파시스트 정권 물러가라! 덩샤오핑은 살인자다! 정신이 있는 거냐? 형제같은 학생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다니!"라고 외치는 시민들로 거리는 가득했다. 중국의 양심 의사라고 불리는 장옌융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살상력이 높은 할로우 포인트[6] 탄환을 발포했고 광장에서는 학생들이 '민주대학'이라는 사설 기관을 설치해 서로를 교수로 임명하고 있었다.

결국 시민들의 저항을 뚫고 천안문 광장에 진입한 계엄군은 대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류샤오보를 포함해 광장을 지킨 학생 지도층들을 상대로 협상을 제시했다. 계엄군은 먼저 광장의 조명을 모두 꺼 버린 다음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광장에서 해산한다면 시민들을 더 이상 죽이지 않고 진압을 끝내고 학생 시위대를 무사히 보내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말하자면 시민들의 목숨을 인질로 삼은 것이다. 이때 강경파를 제외한 다른 학생 시위대는 협상을 받아들여 해산했다. 남겨진 사람들은 잔인하게 학살당했고[7], 시위대가 세운 거대 조형물인 '민주주의의 여신상'은 전차로 뭉개졌다. 강경파의 리더 차이링의 증언에 의하면 사실 복지부동인 중국 공산당의 태도에 실망해서 5월 말을 전후로 많은 대학생들이 광장을 빠져나갔으나, 아직 많은 수의 대학생들이 단식 투쟁을 하고 있었고 천막 안에서 더위에 지쳐 누워 자고 있었던 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의 전차에 깔려 숨졌다고 한다.

6월 19일 정치국 확대회의에 베이징시가 보고한 숫자에 따르면 계엄군 23명, 민간인 218명이 사망하여 총 241명이 사망했는데, 이중에서 학생이 51명이다. 리펑의 일기에는 사망자가 전국적으로 313명이 발생했으며, 이중에서 대학생이 42명, 군인이 23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시위대 관계자들이나 외국 학계에선 더 많이 추산하는데, 가장 큰 수치는 칭화대 학생자치회에서 발표한 4천명이다. 부상자도 2천에서 7천명으로 중구난방이다. 중국에서 인정한 공식 부상자는 7천명으로 이중에서 2천명이 시민, 군인이 5천명이다. 거꾸로 된 것이 아니다!

3.3.1. 영국의 외교문서에 기록된 시위진압 내용

당시 천안문 상황을 정리해 본국에 보고했던 영국의 외교전문이 2017년에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다만 사건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수집된 정보여서 지금 시점에서 밝혀진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시위 진압은 4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3단계는 선양(瀋陽) 군구에서 담당하여# 장병들이 무기 없이 공격하는 1단계, 탄약 없이 무기로 공격하는 2단계, 여기에 추가로 장교들이 장전된 휴대 무기로 시위대를 위협하는 3단계로 구분됐다. 그리고 4단계는 산시성에서 파견된 27군이 담당하는 무력 강제진압이었다. 이 정보를 제공한 정보원은 27군 병력은 60%가 문맹이며 "원시인"으로 불린다고 말했다.

선양군구에 의한 1~3단계의 목적은 27군 병력이 광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시위대를 밀어내는 것이었으나, 3단계에도 시위대가 물러서질 않아 밀어내지 못하고 대치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27군 장갑차들은 대치중인 시민과 선양군구 병력들에게 기관총을 발포하며 그대로 돌진하여 이들을 깔아뭉개고 광장으로 진입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기관총 사격도 무시하고 liubukou에 모여 싸움을 이어갔으나 27군 장갑차들은 이들을 마찬가지로 사격 후 깔아뭉개 버렸다. 이 과정에서 장갑차 한대가 사고가 나서 멈추자 시민들이 몰려와 운전자를 꺼내 병원으로 끌고갔다.

애초에 선양군구 병력은 천안문 광장에 도착한 후 학생과 주민들을 분리했고 광장을 떠나는데 1시간 주겠다고 통보했으나, 5분후 27군 장갑차가 공격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서로 팔을 걸고 버티려 했으나 27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이들과 대치하던 선양군구 병력도 구분하지 않고 같이 사살되었다. 이어 "떡"을 만들기 위해 장갑차들이 시신들 위를 반복해서 주행했고, 불도저로 모아 불태워진 후 물로 청소되었다. 여기서 죽지 않은 시위대 1천명은 정이루(正義路)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다고 통보받았지만 여기에 미리 배치되어 있던 기관총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3.4. 6월 4일

악몽의 밤이 지나가고 광장 안의 시위대는 대부분 해산되었다. 정부 측(친정부 성향) 지식인들이 남은 학생 시위대에게 협상을 하자며 다가왔다. 시위대에게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해산을 강권했고, 이후 시위 지도층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제안을 받은 학생들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를 중재한 사람들은 대만계 가수 허우더젠,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류샤오보 등 '천안문 사군자'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이었는데 이들 덕분에 천안문 광장에서는 그나마 평화롭게 시위대가 해산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해산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처음의 이 약속을 저버렸고, 이후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학생지도부 대표인 왕단, 지식인으로서 시위대를 해산시킨 지식인 중 한 명인 류샤오보 역시 체포되었다.

이 날은 베이징 전체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거리 곳곳에는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도로에는 차가 다니지 않고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다녔다. 날은 밝았고 창안제는 전부 진압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때까지도 저항하는 시민들은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광장과 거리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전소된 탱크와 장갑차, 차량들이 버려져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분노한 시위대가 죽인 계엄군 병사들의 시체 여러 구가 그슬려지고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다리에 목을 매달아 전시해 놓은 것도 있었고, 불타버린 버스에 목이 매달려 음경 부위에 막대기를 꽂아넣은 시체도 있었다. 하지만 시체의 대부분은 탱크에 깔려죽거나 총에 맞아 죽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후 시체들은 군인과[8] 민간인을 막론하고 인민해방군이 증거인멸을 위해 비닐팩에 담아 모조리 수거해서 어디론가 운반해 갔고 이후 도심 곳곳은 시체들과 유류품을 태우는 연기로 가득했다. 심지어 중국공산당 정부도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상당하고 실종되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아 누가 어디서 얼마나 죽었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베이징의 유혈사태에 충격받은 지방 대도시들에서 이에 항의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으나 이들 역시 순차적으로 모두 진압당했다.

3.4.1. 탱크맨

파일:tiananmen-square-fron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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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민주주의의 여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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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62e528761d0685343e1c-f3d1b99a743ffa4142d9d7f1978d9686.ssl.cf2.rackcdn.com/skgcjygq-1370076570.jpg

5월 29일에 대학생들의 주도로 건립된 조형물이다. 폴리에스테르 수지로 만들어진 이 석상은 '민주주의의 여신상'으로 불렸으며,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을 본떠 만들어져 공산당의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이루겠다는 민중들의 뜻을 형상화하는 의미에서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위치에서 제작되었다."라고 왜곡되어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이는 낭설이며 천안문 사건 당시에 정보가 제한되어 추측만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했던 서방권에서 체제 우위를 대 · 내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발표한 프로파간다적인 해석에 가깝다. 실제로 이 여신상의 제작에 조력한 차오 칭위안(Tsao Tsing-yuan)이 밝히길 이 조각상은 미국자유의 여신상을 모방하지 않았으며 1937년에 소련의 조각가 베라 무히나(Vera Mukhina)에 의해 세워진 '노동자와 콜호즈의 여성'에서 따 온 것이다.

천안문 시위대에 합류한 대학생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제1세계 국가들이 따르는 형식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민주화, 정치인의 정기 교체를 통한 부패 척결, 표현의 자유 등이었다. 자오쯔양은 학생 시위대가 중국공산당과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 민주화, 개혁 추진 등을 구호로 내걸었다고 회고했으며 5월 중순에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페인트로 훼손하고 독재 종식 등의 현수막을 펼친 이들을 천안문 시위대 측에서 자체적으로 체포해 공안에 넘기기도 했다. 게다가 비무장 비폭력의 천안문 시위대가 인민해방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부른 노래들은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沒有共産黨, 就沒有新中國)"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었다.

파일:external/www.chinatoday.com/tiananmen_1989_37.jpg

하지만 불과 4일만에 이 석상은 탱크에 의해 분쇄되어 철거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Goddess_of_Democracy_HK_20100604.jpg
홍콩중문대학교의 여신상의 모습이다. 2021년 12월에 홍콩 국가안전법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탱크맨과 더불어 천안문 6.4 항쟁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철거된 원본을 본떠서 1996년 6월에 홍콩 빅토리아 공원[9], 1994년에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 타운, 캐나다의 요크 대학교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등 전세계 각지에 모본들이 세워졌다.

[1] 참고로 사진에서 자오쯔양의 뒤에 서 있는 남자는 바로 원자바오다.[2] 본 영상에 등장한 특파원은 현재 BBC Radio 4의 From Our Own Correspondent를 진행하는 케이트 애디(Kate Adie)다. 여담으로 케이트 애디는 주영 이란 대사관 점거농성 사건(님로드 작전)과 같은 굵직한 사건사고 보도를 담당했다.#[3] 1분 45초경에 군중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른다.[4] 당연히 이것이 중국 정부의 공식 주장인데, 허우더젠을 비롯한 최후에 철수한 시위대 지도부들도 대체적으론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다만 밑에도 언급되듯이 철수를 거부한 학생들이 광장에서 학살당했단 주장도 있다.[5] 엔진룸에 던져 화재를 일으켰다.[6] 존 레논이 이 총알에 맞아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7] 기관총을 난사하고 시위대를 앉아 쏴 자세로 정조준해서 죽여 댔으며, 전차로 깔아 죽인 게 부지기수였다.[8] 물론 시위대들에게 사망한 군인들을 제외하고 선양군구 군인들만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럴 것이 시위대들에게 살해당한 군인들을 중국에서는 공화국의 수호자라고 추모하고 있기 때문.(물론 공화국의 수호자를 한국 사이트에 검색하면 검색결과가 나오지 않는다.)[9] 결국은 중국령이 되어버린 홍콩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 내에서 천안문 항쟁에 대한 여신상을 세운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