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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7:02:42

천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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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용
파일:천세용 열사.jpg
출생 1971년 5월
서울특별시
사망 1991년 5월 3일 (향년 20세)
서울특별시 세브란스 병원
사인 분신후 투신
학력 동북고등학교 (졸업)
경원대학교 (전산학과 2부)

1. 개요2. 생애3.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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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2. 생애

1971년 서울 출생으로 본디 미술을 하고 싶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미술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낮에는 노가다, 세차장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면서 밤에는 야간강좌를 듣는 등 열심히 살아 왔다. 그런 성실한 성격에 기반해 누구보다 적극적인 민주화 활동을 했다.

못다한 미술학도의 꿈을 「한얼」 만평기자를 하면서 펼치기도 해서 '말'보다는 '글'에 조리가 있었고 수많은 그림과 글을 통해 선후배와 동료들에게 자신의 감정과 문제의식, 조언 등을 했다고 한다.

그는총학생회 산하 선봉대인 '횃불대' 대원으로 모든 교내외 집회와 시위에 참석하는 등 “과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이므로 의식과 실천은 변증법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확신을 변혁운동을 통해 담보해 내려는 노력을 펼쳤다.

강경대 치사사건과 박승희, 김영균 학생의 분신으로 전국적으로 노태우 정부 규탄집회가 잇따르던 가운데서도 경원대 학생들이 축제와 체전 분위기에 들떠 집회에 참석하는 수가 점차 줄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1991년 5월 3일, 결국 '노정권 퇴진을 위한 4만학도 결의대회'가 시작되자 국기 게양대 난간에서 신나를 뿌린 몸에 라이터를 갖다댄 뒤 “6천 경원대 단결 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6m 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고 끝없는 민중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산화해갔다.

3. 유서

학우들이여, 이제 봅시다.
우리와 같은 학우들이 쇠파이프에 맞아 죽고 꽃다운 청춘을 불사르는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노태우 정권과 독점자본가들이 1천만 노동자와 4천만 민중형제들을 착취, 수탈하고 저항이 있는 곳마다 광폭한 탄압을 휘두르는 동안 과연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떨쳐 일어납시다.
슬픔과 분노를 그 자체로 끝낼것이 아니라, 현 정치 권력에 맞서 정면투쟁, 정면돌파해 나갑시다.
많은 할 일이 남았지만, 제 몫까지 여러분이 투쟁하여 준다면 편안히 눈을 감을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손으로 노태우 살인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민중의 나라를 건설하는 날까지 힘차게 투쟁합시다.
5월 3일 천세용
재벌에겐 특혜분양, 민중에겐 물가고통 노태우정권 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