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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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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채종기
蔡宗基 | Chae Jong-gi
파일:150986588856513.jpg
출생 1939년 2월 28일 ([age(1939-02-28)]세)
경상북도 칠곡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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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전처 이씨^(1937년 또는 1938년생)^[1]
(2006년 3월 이혼)[2]
장녀^(1958년 또는 1959년생)^[3]
차녀^(1962년 또는 1963년생)^[4]
장남^(1963년 또는 1964년생)^[5]
차남^(1965년 또는 1966년생)^[6]
직업 무직[7]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방화범.

2008년 2월 10일숭례문 방화 사건을 일으켜 숭례문을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2. 생애

그는 숭례문 방화 사건 당시 일산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던 68세[8] 남성으로, 택지개발에 따른 자신의 토지(건물)에 대한 보상액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해당 건설사가 건물 값의 감정 평가[9]를 토대로 9680만 원 #을 제시하였지만 63세였던 그는 4~5억을 주장하며 항의하였다. ‘숭례문 방화’ 토지보상 문제의 일산 땅은? 참고. 이후 패소하여 1억 5천만원으로 합의를 맺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후 이를 뒤집고 재차 항의하다가 결국 건물이 강제 철거되었으며 이에 앙심을 품은 것이다. 2002년 당시 일산의 땅값은 대로변이 평당 700만 ~ 800만원, 이면도로변이 평당 250만 ~ 400만원, 준농림지는 평당 150만 ~ 200만원 정도였다. # 따라서 이면도로 쪽 토지라고 생각해 보면, 평당 300만원은 당시 기준 나름대로 합당한 보상액이라고 추장되며, 합의금은 아예 평당 490만원 선으로 당시 기준으로 최고액이다.

67세가 된 2006년 4월 26일에는 같은 이유로 창경궁에 불을 질러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300만 원을 선고받은 적도 있었다. 즉, 문화재 방화가 숭례문이 처음이 아니다. 원래 종묘에 불을 지르려고 했는데 경비가 삼엄하여 표적을 숭례문으로 바꾸었다고 한다.[10] 참고로 문화재를 계속해서 방화(테러)한 까닭은 경비가 허술해 접근하기 쉽고 인명 피해가 나지 않으며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68세의 나이에 숭례문 방화 사건을 일으켰다.

현장 검증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 노무현에게 하소연해도 들어주지 않았다며 "노무현의 잘못이 99.9%", "내 잘못은 0.1%", "그래도 인명 피해는 없었잖아. 문화재는 복원하면 된다."라는 망언을 하여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검증이 끝난 후에는 "문화재를 훼손해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재판을 받은 채종기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이 구형되었으며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형이 과중함을 들어 항소했으나 2009년 8월 31일, 서울고등법원은 항소를 기각하고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결국, 감옥에서 죄수들 사이에서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심한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세간에서는 전통 문화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철없는 젊은 놈들이 장난쳤거나 구식 문화에 혐오감을 가져서 불을 질렀다고 추정했지만 뜻밖에도 범인이 60대 후반의 노인이었다는 사실에 경악과 충격을 금치 못했다. 예로부터 노인들은 전통과 옛것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이를 배반하듯 노인임에도 나잇값을 못 하고 분노에 눈이 멀어 문화재를 불태웠다는 파렴치한 범죄를 두 번이나 저지른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범행 2년 후인 2010년 2월 복역 중 처음으로 인터뷰를 가졌는데 2년 전 사건에 대해 묻자 '내가 그때 바보짓을 했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 10년 뒤 2018년 2월에 만기출소했다. #
[1] 2008년 당시 70세였다.[2] 토지 보상 문제로 송사를 시작할 때 채종기에게 기존 보상금 1억원만 받자고 제안했지만 결국 이혼했다. 하지만 명목상 이혼일 뿐 채종기가 강화도에 집을 마련해주고 동거했다. 그리고 이혼하고 한 달 뒤.. 창경궁 문정전을 방화했다.[3] 2008년 당시 49세였다.[4] 2008년 당시 45세였다.[5] 2008년 당시 44세였다.[6] 2008년 당시 42세였으며 막내이다.[7] 수입은 자식들에게서 용돈을 받거나 집 앞 텃밭 농사였다.[8] 방화 당시 나이. 현재는 [age(1939-02-29)]세.[9] 토지 92제곱미터(약 28평), 건물 약 9제곱미터 (약 2.73평). 대지지분을 계산하면 대략 제곱미터당 100만원, 평당300만원.[10] 종묘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