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222> 이름 | 채금석 (蔡金錫) | |
본관 | 평강 채씨 (平康 蔡氏)[1] | |
출생 | 1904년 4월 9일 | |
전라북도 임피군 북일면 마동리 (現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도암리 마동마을)[2] | ||
사망 | 1995년 12월 26일 (향년 91세) | |
전라북도 군산시 금동 군산의료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군산영명학교 (졸업) 경신중학교 (명예 졸업)[3] | |
포지션 | 공격수 | |
등번호 | - | |
별명 | 오토바이[4] | |
소속 | <colbgcolor=#eee,#222> 선수 | 경신중학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 조선축구협회 대표팀 |
감독 | 구암축구단 군산경찰축구단 | |
국가대표 | ?경기 ?골(일본) ?경기 ?골(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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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대한민국 축구의 제1세대 원로이시다.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 소속으로 활동하며 경평축구대항전에 출전했다. 또한 일본 대표에도 뽑혀 1936년 하계 올림픽 예선전에 출전했으며 은퇴 이후 고향인 군산에서 프로 축구, 실업, 대학, 초·중·고 등 후진 선수 양성에 공헌하였다.
2. 생애
1904년 4월 9일 전라북도 임피군 북일면 마동리(現 군산시 성산면 도암리 마동마을)에서 아버지 채규식(蔡奎植, 1880. 3. 4 ~ 1945. 4. 24)[5]과 어머니 우주 황씨(紆州 黃氏, 1880. 8. 17 ~ 1914. 5. 16)[6] 사이의 4남 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가족 전체가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현 군산시 구암동) 260-1번지로 이주했고,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조부 채창묵(蔡昌默, 1860. 5. 15 ~ 1930. 9. 8)의 권유로 군산영명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축구를 시작했다.이후 1925년 경신중학교에 입학해 공격수로 팀의 중심 역할을 했고, 김용식과 함께 조선축구대회에서 2년 연속으로 우승하는 데에 공헌했다.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일본 관헌을 폭행해 중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운동에 전념해 1930년에는 일본 대표인 와세다대학팀과의 경기에서 활약하여 승리를 얻게 하였다. 1933년 경평축구대항전에도 출전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대표선수로 중국 톈진에서 축구 경기에 참가하여, 러시아 및 중국 대표팀, 북경 보인대학팀과 싸워 5전 4승 1패의 결과를 얻었다. 빠른 돌파력으로 '오토바이 채'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1935년 5월 14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축구협회 주최 제1회 조선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 경성축구단 레프트윙(LW)으로 참가해 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대회 우승에 기여했으나, 경기 중에 오른쪽 다리 부상을 입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튿날 오는 6월 1, 2일에 걸쳐 열리는 제1회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에 출장할 조선대표팀을 편성할 때에도 후보로 편성되었고, 끝내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은 이 대회 성적을 토대로 이듬해 있을 1936 베를린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선발할 예정이었고, 국가대표에는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용식이 하프백, 숭실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영근(金永根)이 후보로 선발되었다.
그 뒤 경성축구단에서 활약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축구 발전에 기여하였다.
1985년 경신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995년 12월 26일 전라북도 군산시 금동 군산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3. 금석배 전국학생축구대회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열리는 전국 규모의 초·중·고 학생 축구대회로, 축구인 채금석 옹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한축구협회와 전북축구협회 등의 후원을 통해 1992년 창설되었다.1992년부터 2008년까지는 전라북도 익산시와 전주시를 순회하며 개최되었으나, 2009년부터 채금석 선생의 고향인 전북 군산시에서 영구개최가 확정되었다. 이후 초등부 경기는 매년 치러지고, 중·고등부는 홀수년도에 고등학교 대회가, 짝수년도에 중학교 대회가 번갈아 가며 치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