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차석보(車錫甫) |
이명 | 차덕보(車德輔), 차석보(車石甫) |
생몰 | 1864년 ~ ? |
출생지 |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차석보는 1864년경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고, 1907년 5월 대한매일신보를 운영하고 있던 임치정과 서신 교환을 통해 민족운동을 모색했다. 1908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청년교육회장을 맡아 교과 서적 인쇄회사를 설립했으며, 하와이의 박용만이 개최하려는 애국동지대표회를 후원하기 위해 의연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1908년 10월에는 발행이 중단된 <해조신문>을 다시 간행하기 위해 유진률, 문창범(文昌範) 등 35인으로부터 자금을 모집했으며, 1909년 <대동공보> 총무 및 일심청년회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9월에는 미주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지방회 평의원을 역임했다.1910년 1월 중순 <대동공보>가 폐간되자, 그는 신문 발행에 필요한 활자와 기계를 대동공보사에 양도하고, 재무를 맡아서 그해 4월에 <대동공보>가 다시 간행되는 데 기여했다. 또한 8월에는 유인석, 이범윤 등과 함께 한일병합을 반대하기 위해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했으며, 12월에는 <대동공보> 총무로 발탁되었다. 1911년 2월엔 한인 거류민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12년 9월에 이준 전기 간행 및 유족 구휼을 위한 연금모집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18년엔 정안립(鄭安立) 등이 중국 지린성 연길현에서 발기한 동성한족생계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차석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